[슬로우민트] 이효석 박사 추천 좋은 책 이야기, 첫 번째 책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일곱 번째 마지막 이야기:
- 구성주의의 반격: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017)
- 편도체-공포 가설과 옴니제닉 모델
- 인간은 불완전하다
- 빅테크의 표정-감정 연구는 낭비인가
- 소리는 실재하는가, 감정은 실재하는가
- 뇌,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기계
- 느낌을 측정할 수 있다면 (ft. 다윈과 스키너 비판)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노씨가 묻고 이효석 박사가 답하다
(일곱 번째, 마지막)
우리가 검사한 사람들은 모두 ‘화난’, ‘슬픈’, ‘겁에 질린’ 같은 동일한 감정 단어를 사용해 자신의 느낌을 표현했지만, 그 의미가 언제나 동일하지는 않았다. 몇몇 피험자는 이런 단어를 사용해 매우 섬세한 구별을 했다. 예컨대 그들은 슬픔과 공포를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또 다른 피험자들은 ‘슬픈’, ‘겁에 질린’, ‘불안한’, ‘우울한’ 같은 단어들을 뭉뚱그려서 ‘기분이 더럽다’는 의미로(조금 더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불쾌감이 든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행복, 평온, 자부심 같은 유쾌한 감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700명 이상의 미국 피험자를 검사한 결과 우리는 자신의 감정 경험을 구별하는 방식이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리사 펠드먼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제1장 ‘감정의 지문을 찾아서’ 생각연구소: 2017. 중에서
실내 장식 전문가라면 파란색의 다섯 가지 색조를, 하늘색, 코발트색, 군청색, 감청색, 청록색을 구별하고 지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내 남편이라면 그것을 모두 파란색이라고 부를 것이다. 내 학생들과 나는 감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했는데, 나는 이것을 감정 입자도Emotional granularity; 감정 경험과 지각을 섬세하게 또는 거칠게 구성하는 능력라고 불렀다. 감정 입자도의 발견은 감정 연구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감정의 정의… 느낌을 측정할 수 있을까
민노: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질문을 드릴게요. 이 책에서 한계로 느끼신 부분이 있다면 어떤 점일까요. 논리적인 약점이나 한계 혹은 아쉬움이 있었다면요.
이효석: 아까 드린 말씀과 좀 비슷한데 저는 이 책의 핵심적 주장인, 감정에는 물리적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본질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결국 해상도(= 책 속 ‘감정 입자도’)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감정에 관한 정의(定義; definition)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감정이 객관적인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책은 말하지만, 기쁨이나 슬픔, 이런 것들, 해상도가 아주 낮은 수준에서는 도파민이든 엔도르핀이든 아니면 코르티졸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든 노르아드레날린이든, 이런 걸 통해서 어느 정도의 객관적 실체가 존재하고 측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도파민(dopamine): 동물에 존재하는 아민의 하나로 머릿골 신경 세포의 흥분 전달에 중요한 구실.
엔도르핀(endorphin): 포유류의 뇌 및 뇌하수체에서 추출되는 물질을 통틀어 이르는 말.
코르티졸(cortisol): 부신 겉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하나. 항염증 작용이 있어 각종 염증성ㆍ알레르기 질환 따위에 이용.
노르아드레날린 (noradrenalin): 교감 신경 계통의 신경 전달 작용을 하는 부신 속질에서 아드레날린과 함께 분비되는 호르몬.
책에서는 이런 걸 정동(affect; “가장 단순한 느낌. 유쾌와 불쾌 및 평온과 동요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동한다.”), 곧 느낌 수준의 것이고 감정의 재료가 되지만, 감정 자체는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데, 그 경계가 과연 명확할까 하는 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리사 교수는 정동은 감정이 아니며, 감정은 정동을 재료로 사회적 실재로 뇌에서 인식되는 것을 감정이라 부르자라고 정의함으로써 감정이 구성된다는 것을 보인 게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민노: “해당도가 아주 낮은 수준에서라도 도파민 등의 물질을 통해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정동’을 측정할 수 있다”면 그걸 정동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이효석: 사실 본질주의적 입장에서는1편을 참조할 것 -편집자. 감정, 혹은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분 아니면 행복과 고통을 물리적,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느냐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가 5년 전 [호모데우스] (2017)의 서평에서 공리주의 뇌 과학적 완성을 살짝 언급한 부분이 바로 그 내용인데요.
“자유주의의 여러 문제가, 이들이 명백하게 과학의 발전에 따라 더욱 드러나고 부각되고 있는 것임에도, 이 공리주의의 문제는 과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분법을 연속적인 변수로 만드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며, 사실상 전문 영역이다. 정신적 만족과 피해를 양화(quantize; 양자화; 연속적인 양을 이산적인 물리양으로 만드는 것. 편집자)하기 위해서는 최신 뇌 과학 기술 곧, 호르몬의 양, 뇌 신경의 흥분 정도, 뇌 신경의 구조적 특성 등을 이용해 어떤 척도(measure)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효석, 어느 인공지능 과학자가 읽은 [호모데우스] 중에서
그러니까, 그때 이야기한 정신적 만족과 피해가 바로 행복과 고통이고, 이를 양화하는 방법으로 역시 물리적 객관적 실체인 호르몬의 양, 뇌 신경의 흥분 정도, 뇌의 구조를 생각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리사 교수가 말하듯, 우리가 똑같은 자극에 대해서도 자신의 인식 혹은 예측에 따라 이를 고통으로 느끼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니, 이런 접근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요.
하지만 또 본질주의의 입장에서는, 뇌가 어떻게 예측할 것인지가 결국은 뇌의 과거 경험에 기반한 것이고, 그 경험이 바로 지금 뇌 신경의 연결 형태에 녹아 있으므로 이를 파악해서 뇌의 예측 자체를, 비록 아주 어렵더라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고요.
물론 행복이나 고통보다 훨씬 더 세밀한 수준의 감정은 리사 펠드먼 교수님의 말처럼 그냥 문화에 의해서 학습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경우, 호르몬의 양처럼 물리적, 객관적으로 측정가능한 수치가 있어도 사람마다 같은 감정에 대해 그 수치가 다 다를 수도 있고요. 사실 미묘한 감정이라는 것은 마치 언어처럼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다윈 비판에 관하여
다윈의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은 생물학이 현대 과학으로 발전하는 패러다임 전환의 기폭제가 되었다. 다윈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업적은 진화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의 멋진 표현처럼 “본질주의의 마비 작용”으로부터 생물학을 해방시킨 점이었다. 그러나 감정에 관해 다윈이 13년 후에 발표한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질주의로 가득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혁신적인 업접을 내다 버리고 다시 본질주의의 마비 작용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리사 펠드먼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제8장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 중 ‘우리는 다윈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생각연구소: 2017. 중에서
민노: 아, 하나 더. 책에서 리사 교수가 찰스 다윈 얘기를 물고 늘어지잖아요. 다윈이 [종의 기원] (1859)이라는 기념비적 책을 출판한지 13년 뒤에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1872)을 쓰는데 그 책을 보면 곤충도 감정이 있고, 벌레도 감정이 있다는 식으로 썼다면서 조롱에 가까운 방식으로 묘사하고, 다윈을 (본질주의로부터 생물학을 해방시킨 다윈이 다시 본질주의로 회귀했다고) 비판하는데요.
이효석: 곤충의 예를 들면, 곤충이 살아남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있을 거에요. 예를 들어 먹이를 쫓고 포식자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 같은 행동 말이죠. 먹이를 쫓는 게 좋아서 쫓는지 아니면 그냥 본능에 쫓는지는 상관이 없고요. 도망칠 때도 마찬가지죠. 바퀴벌레는 불을 켜면 빛을 피해 도망가잖아요. 그렇게 도망가게 만드는 어떤 호르몬과 같은 물질이 있고, 불쾌감이든 거부감이든 무언가가 있겠죠. 그러니까 모든 생명체는 그런 게 존재할 거라는 얘기고요.
물론 이걸 확장하면, 로봇 청소기가 배터리가 부족할때 다시 충전기로 돌아가서 배터리를 충전하는데 부족할 때 불쾌감을 느끼고 충전할 때 쾌감을 느끼느냐 하는 문제로 돌아가는데, 그건 우리 상식상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요. 즉, 느낌이나 감정은 어느 정도 복잡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어야 생기는 것으로 우리가 정의할 수도 있고요.
리사 교수는 동물이나 곤충이 감정을 가지지 않는 이유로 감정에 필요한 세 가지 개념 곧, 내수용, 개념, 사회적 실재가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동물이나 곤충은 일단 사회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고, 또 언어가 존재하지 않으니, 내수용에 의한 정동만 존재할 거라고 얘기를 하죠. 다윈은 그걸 일종의 감정이라고 표현한게 아닐까 생각한 거고요. 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은 해상도, 혹은 감정의 정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겁니다.
내수용(Interoception): 신체의 기관, 조직, 호르몬, 면역체계 등에서 유래하는 감각이 뇌에서 표상되는 것.
리사 펠드먼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주요 용어 해설’, 생각연구소: 2017. 중에서
개념(Concept): 특정 목적에 비추어 비슷한 것으로 취급되는 사례 집합(범주 참조).
범주(Category): 특정 목적에 비추어 비슷한 것들로 취급되는 사례 집합.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범주는 세계에 존재하고, 개념은 이런 범주의 정신적 표상으로 간주된다(개념 참조).
사회적 실재(Social reality): 어떤 것이 실재한다는 점에 대한 특정 집단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 이것은 언어를 통해 공유된다.
민노: 그럼 정동을 감정으로 볼 거냐 말 거냐 정도가 쟁점이지 정동이기 때문에 곤충은 감정이 없다거나 찰스 다윈이 되게 좀 삐끗했다고 리사 교수가 얘기하는 거는 좀 과하다는 느낌이라는 건가요?
이효석: 네, 그렇습니다. 결국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이죠. 감정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는 가의 문제라는 것요…
행동주의 비판에 관하여
그들은 신체와 뇌에서 감정을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앞뒤로 일어나는 것은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감정의 원인이 되는 사태와 감정에 뒤이어 나타나는 신체 반응을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중간에 두개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거기에는 신경 쓰지 말자! 이렇게 해서 심리학의 역사상 최악의 시기라 할 행동주의(behaviorism)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시기에 감정은 생존을 위한 행동, 즉 집합적으로 ‘4F’라 불리는 싸움(fighting), 도망(fleeing), 섭취(feeding), 교미(fucking)로 재정의되었다. 행동주의자에게 ‘행복’은 미소 짓기와 같았고, ‘슬픔’은 울음이었으며, ‘공포’는 얼어 붙어 꼼짝 않는 행동이었다. 이렇게 해서 감정의 지문을 찾는 골치 아픈 문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재정의를 통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리사 펠드먼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제8장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 중 ’심리학을 어지럽힌 행동주의’, 생각연구소: 2017. 중에서
민노: 리사 교수는 책에서 행동주의 심리학을 반어법을 사용해 조롱조로 공격하던데요. 소제목 중 하나가 “심리학을 어지럽힌 행동주의”일 정도니까요.
이효석: 예, 그렇죠. 저는 그 정도로 행동주의를 비판할 것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행동이라는 게 어쨌든 뇌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져서 나온 거잖아요. 결과로 나오니까 측정이 가능하고요.
과학에는 어떤 현상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시작 상태와 끝 상태를 가지고 그 현상을 설명하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모두 잘 아시는 고교 물리에도 그런 예가 나오는데요. 처음 배우는 힘과 운동이 어떤 현상을 시간을 기준으로 매 상태를 설명하는 방법이라면, 그 다음 배우는 일과 에너지가 바로 시작 상태와 끝 상태만을 가지고 그 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책상 위의 연필이 바닥에 떨어지는 현상을 설명할 때, 힘과 운동에서는 등가속도 운동으로 매 순간 연필의 속도를 구하지만, 일과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연필이 책상 위에 있을 때의 위치 에너지가 연필이 추락할 때 운동 에너지로 바뀌는 것으로 보고 그 시점의 연필의 속도를 구하게 되죠.
행동주의도 마치 에너지 보존처럼, 시작 상태와 끝 상태를 가지고 생명체를 설명하려 한 시도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어떤 설명이 더 좋은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있습니다. 현상을 더 잘 설명하는, 곧 더 잘 예측하는 설명이 좋은 설명이지요. 그런 면에서 행동주의는 실패했다는 것이고요. 이는 그 중간 단계인 뇌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겠죠.
이것도 위에서 저희가 쓴 표현인 해상도로도 설명이 가능하고요. 즉, 바퀴벌레처럼 단순한 곤충이라면 행동주의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겠죠. 빛을 보면 도망간다. 이런 식으로요. 로봇 청소기는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행동주의적 접근만으로 로봇청소기 내부의 알고리듬을 아마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을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행동의 복잡성도 어떤 생명의 기준이 될 수 있겠네요. 물론 로봇청소기가 집의 구조를 파악하고 돌아다니는 방법을 보면 매우 놀랍긴 합니다.
민노: 스키너의 행동주의는 당시로는 의미가 있었다?
이효석: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요.
민노: 지금은 어때요? 지금 관점, 지금 기준으로 행동주의 심리학을 평가하면 어때요?
이효석: 제가 그걸 평가할 수 있을 위치는 아닌것 같고요. 파블로프의 실험 같은 건 훌륭한 실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외부 조건만을 조절해서 내가 원하는 행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까지 나아가니까요.
민노: 그런 위험성이 있겠네요.
이효석: 그래서 아기한테 강한 빛이나 큰 소리로 자극을 줬던 그런 실험이 있었다고 하고요. 그건 마치 아주 복잡한 기계를 단순한 방법으로 다루려고 한 시도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케이스를 때리면 버그가 잡힌다, 그런 수준의. 물론 가전제품이 잘 작동하지 않을 때 때려보는 건 충분히 의미있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민노: 그럼 지금은 행동주의가 완전히 극복됐다고 봐야 되는 건가요? 어떤가요?
이효석: 네, 그것도 제가 답하기는 쉽지 않네요.
민노: 그건 제가 한번 좀 찾아봐야겠네요.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효석: 제가 조금 더 명확하게 딱 정리해서 말씀드렸으면 좋았을 텐데요.
민노: 아니요,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명쾌하게 답변을 주실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히려 좀 머뭇거리고, 고민하시고 쉽게 얘기를 못하시는 부분이 오히려 더 흥미로웠습니다.
이효석: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저도 이 책을 통해 충격을 받았고 제 생각을 많이 바꿨고, 이 분 리사 교수를 존경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