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연회]는 ‘히틀러의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음식을 먹어보아야 하는 여성 시식가들의 이야기’라는 소재의 비상함으로 먼저 눈길을 끄는 소설이다. 작가 포스토리노는 히틀러를 위한 음식의 실제 시식가였던 마고 뵐크(Margot Wolk)의 사연을 신문에서 우연히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세계 제2차 대전의 막바지, 독일 베를린에 살던 26세의 로자 사우어(Rosa Sauer)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어머니를 잃고, 갓 결혼한 남편 그레고르마저 징집되어 전장에 나가면서 혈혈단신 신세가 된다. 베를린을 떠나 시부모가 사는 볼프샨츠(Wolfsschanze) 근처의 작은 마을로 내려와 다감한 헤르타와 조용하지만 속정 깊은 조세프를 부모로 여기며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간다.
하지만 어느날 로자는 비상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빠진다. 히틀러의 음식을 먼저 먹어보고 독이 들었는지를 가리는 10명의 여성 시식가들 중 한 명으로 차출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볼프샨츠는 히틀러의 비밀 거처가 있어서 ‘늑대의 소굴'(Wolf’s Lair)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적(연합군)이 히틀러를 독살하려 한다고 의심한 친위대(SS)는 젊고 건강한 여성 10명을 차출해 히틀러가 먹을 음식을 미리 스크리닝하는 계획을 세웠다. 매 끼니마다 여성들은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먹고 기다린다. 음식에 독이 들었다면 반응이 나타날 것이고, 아마 죽을 것이다. 30분, 1시간,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이, 시식 여성들에게는 영원이고 지옥이다.
소설은 로자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히틀러의 음식 시식 요원으로 징집된 첫날의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로자 외에 시식 요원으로 차출된 다른 여성들이 하나씩 소개된다. 로자의 베를린 시절 이야기가 플래시백으로 중간중간에 적절히 삽입되고, 시부모인 헤르타, 조세프와 함께하는 생활이 묘사된다.
아무리 비상한 위기 상황이라도 되풀이되다 보면 그에 대한 감각도 점점 무뎌지게 마련이다. 로자는 점점 더 시식 요원으로서의 일상에 익숙해지고,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경배를 표현하는 테오도라 자매와, 전쟁의 비참한 와중에도 외모와 치장에 신경쓰는 울라, 로자와 팽팽한 갈등 관계를 형성하지만 서서히 서로 마음을 열게 되는, 그러나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엘프리데 등 다른 시식 여성들과 조금씩 연대 의식을 갖게 된다. 요리사인 크뤼멜과도 남다른 친분을 트고, 심지어 시식 여성들을 감시하고, 호송을 책임진 SS 요원들과도 조금씩 익숙해진다.
그러던 어느날 ‘지글러’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식 여성 책임자가 부임한다. 그와 함께 전장에 나간 남편 그레고르만을 기다리던 로자의 세계에도 극적인 변화가 초래된다. 로자뿐 아니라, 전쟁의 와중에 따로 남겨진 여성들은, 전장에서 생사를 오가는 남성들만큼의 절박성은 없을 망정,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심리적, 육체적 절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독일 시각에서 그려진 ‘미시역사’
[히틀러의 연회]는 여러 차원에서 퍽 흥미롭기도 하고, 독특한 의미도 가진 소설이다. 무엇보다 먼저 시각이 다르다. 세계 제2차 대전을 실제 전장이 아닌 후방의 시각에서, 그것도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연합국이 아닌 가해국 독일의 시각에서 그렸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그 정도는 다를지언정 모두 히틀러가 – 독일이 –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또 그렇기 기대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중에 누구를 택하겠어? 당연히 히틀러지”
이렇게 말하는 한 화자의 태도는, 독일 나치당에 대한 적극적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독일의 전반적인 여론이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가해국이든 피해국이든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시국에서는 모두가 불행하다. 로자와 그 주변인들로 대별되는 독일인들 또한 하루하루 죽음을 예감하는 비참한 삶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이 모든 물자가 전장으로 징집된 마당이어서 늘 굶주려 있다. 시식 요원들은, 독이 든 음식을 먹으면 언제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적어도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품질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처지다. 하지만 그 가족은, 어린 자녀들은 아니다. 시식 여성들은 집에 남아 굶주리는 가족에게 음식을 가져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요리사와 친분이 있는 로자에게, 다른 동료 시식 여성들이 음식을 밀반입하도록 압력을 넣는 장면은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은 20세기 역사의 중요한 굽이를 평범한 개인들의 삶으로 잘 치환한, 일종의 ‘미시 역사’(micro-history)로서 퍽 성공적이다. 시식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 그 몇몇 여성들의 비상한 개인사, 특히 주인공 로자가 독일 친위대 장교인 지글러와 불륜 관계를 맺게 되는 상황, 그리고 전쟁이 독일 패전으로 막을 내린 다음, 실종되어 죽은 줄 알았던 남편 그레고르와 재회하는 장면 등은, 세계 제2차 대전이 수많은 당대의 민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주 상징적으로, 그러나 매우 곡진하게 그려 보인다. 로자가 죽은 줄 알았던 그레고르와 극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은 롱펠로우의 아카디아 고난사 [에반젤린(Evangeline)]의 마지막 장면, 혹은 노르웨이의 서사극 [페르 귄트(Peer Gynt)]의 마지막 장면과 겹친다.
히틀러의 전속 요리사와 로자가 나누는 대화 몇 장면은 히틀러의 – 그리고 아마도 무솔리니나 다른 파시스트 독재자들의 – 지극한 위선과 인간적 모순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수백만 유태인을 가스실로 잔혹하게 내몰았던 장본인이, 정작 소를 잡는 도축장의 끔찍한 장면에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말한다거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음악에 심취하면서 ‘내 삶의 마지막에 내 귀로 듣는 마지막 음악이기를’ 바란다는 대목이 그런 사례다.
히틀러의 시식 요원이라는 독특한 소재, 제2차 세계 대전을 가해국인 독일인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참신함, 무엇보다 세계대전의 큰 그림을 힘없는 서민들의 이야기로, 그러나 그 사연의 극적 긴장과 절박함은 조금도 뒤지지 않는 사실적 필체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