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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 역사의 목격자들

  1. 천국 문 앞에서도 AP 기자를 만날까 봐 무섭군
  2. AP 특파원의 일곱 가지 조건
  3. AP, 미국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결정한다
  4. AP 특파원의 ‘소름 끼치는 임무’
  5. ‘아랍의 봄’ 그 자리 남은 절망: 27살 아델 케드리가 분신한 이유
  6. 취재원의 여섯 가지 유형
  7. 언론의 권위는 현장에서 생긴다
  8. 현대전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 사라예보 포위전 (’92-’96)
  9. 멕시코 마약 전쟁: 마크 스티븐슨의 기록
  10. 팔레스타인 vs. 이스라엘 분쟁과 미디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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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할 예정이었던 팔레스타인 영토에 갑자기 유대인들이 들어와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렸다. 곳곳에 알박기를 하듯이 정착촌을 건설하여 팔레스타인을 동(웨스트 뱅크; 요르단강 서안 지구)서(가자 지구)로 갈라놓은 뒤 이 지역에도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여 팔레스타인 거주지를 이스라엘 영토로 바꾸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테러 위협을 이유로 이스라엘은 정착촌 주변을 높은 분리 장벽으로 둘러치고 있으며, 이로써 분리 장벽 안에 거주하는 50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구밀도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실업율은 40%가 넘고 경제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국제 사회는 1967년 국경을 인정하라고 이스라엘에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들(녹색). 반면 미국, 캐나다를 비롯한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와 한국, 일본, 호주 등(회색)은 팔레스타인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2012년 12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옵서버 국가(state)로 격상하는 안을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위 지도에서 초록색으로 표시된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들이다. 반면 여전히 회색으로 남겨진 미국, 캐나다를 비롯한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와 한국, 일본, 호주 등은 팔레스타인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PLO, 헤즈볼라, 하마스의 탄생

조국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조직하고 이스라엘에 무장테러를 지속적으로 감행했다. 1982년 이스라엘은 PLO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레바논을 침공하고, 이 전쟁을 계기로 레바논에서는 대이스라엘 테러단체 ‘헤즈볼라’가 탄생한다.

헤즈볼라 (신의 당, 정식 명칭은 "레바논 이슬람 저항을 위한 신의 당")
헤즈볼라 (신의 당, 정식 명칭은 “레바논 이슬람 저항을 위한 신의 당”)

헤즈볼라는 1983년 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폭파하고, 베이루트에 평화유지군으로 주둔하던 미군과 프랑스군 막사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여 미군 241명과 프랑스군 58명을 몰살시키면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는다. 2006년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또 다시 레바논을 다시 침공했다.

1987년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대규모 민중봉기(인티파다)가 발발하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하마스’라는 반이스라엘 무장단체가 결성된다. 하마스를 제거하겠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은 2003년, 2012년, 2014년 세 차례 가자 지구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으며 지금도 지속적으로 공습하고 있다.

한없는 절망을 보도해야 하는 괴로움

희망이라고는 전혀 꿈꿀 수 없는, 캄캄한 절망만이 펼쳐져있는 현실을 취재하는 것은 기자에게 정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AP특파원 캐린 라웁(Karin Laub)은 가자 지구에 위치한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서 진흙과 폐수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취재할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무언가를 계속 취재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누구든 행복한 결말을 쓰고 싶은 게 사실이잖아요.” (캐린 라웁)

그러한 감정은 그녀가 작성한 기사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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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군인들을 향해 겁도 없이 돌을 마구 던진다.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살아왔다는 이 비참한 환경을 보니 그들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Karin Laub, “Jabalia has become center of resistance to Israel,” The Associated Press, December 19,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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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식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 이러한 비극을 조금이라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서 AP 특파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찾아 나선다.

의사 결정의 자유가 지속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감정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제2차 인티파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들은 검문소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어떠한 계획도 세울 수 없었어요.

지금까지도 웨스트 뱅크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마다 이스라엘군의 검문을 받아야만 해요. 이처럼 늘 감시받는다는 느낌, 내 앞길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느낌, 정말 끔찍하잖아요.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것은, 이 문제의 시급성이에요. “중동? 걔네들은 원래 서로 싸우잖아. 맨날 그렇게 살았는데, 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겠지.” 그런 인식이 뿌리박혀있는 듯해요. 하지만 이건 정말 위험한 접근 방법이죠.

하지만 기자로서 우리는 적정선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5일 동안 웨스트 뱅크 검문소를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8시 5분, 500명의 사람들이 줄 서있다. 대기시간은… ” 이런 식으로 뭐든 적었죠.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어요. 사람들의 목소리와 풍경을 가장 가까이서 전해주면서 전반적인 맥락도 설명해줄 수 있었죠. 물론 정치적인 이슈도 빠뜨려서는 안되죠. 모든 범위를 포괄하면서 가능한 한 공평하게 전달하고, 설명하고, 보통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담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거예요. 이건 우리 자신을 위한 노력이기도 하죠.” (벤 허버드)

이렇게 시작된 취재는 기사 속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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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여정은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는 격납고에서 시작된다. 수만 명이 매일 아침 방탄유리 뒤에 서있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새장처럼 만들어진 통로를 지나 2미터 높이의 개찰구를 차례대로 통과한다. 군인들은 이따금씩 시끄러운 확성기로 소리를 지르고 겁을 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칼란디아 검문소를 어느 순간 테러리스트로 돌변할 수 있는 사람을 걸러내는 관문이라고 말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직장을 가기 위해, 학교에 가기 위해, 가족을 만나기 위해, 병원에 가기 위해 이러한 굴욕을 매일 견디며 살아야만 한다. AP 기자는 5일 동안 이 검문소를 관찰했다. (Ben Hubbard, “Checkpoint misery epitomizes a Mideast divide,” The Associated Press, February 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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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란디아 검문소 (출처: Matthew Yalesias, "Kalandia Checkpoint", CC-BY-SA, 2010년 10월 촬영)
칼란디아 검문소 (출처: Matthew Yalesias, “Kalandia Checkpoint”, CC-BY-SA, 2010년 10월 촬영)

웨스트 뱅크(서안지구) 정착촌 건설

2006년 웨스트 뱅크 안에 아모나라는 지역을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점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AP 특파원 마커스 엘리아슨(Marcus Eliason)은 이곳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달려갔다. 엘리아슨은 이곳에서 27살 유대인 여성을 만나 인터뷰했다. 매우 전통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던 그녀는 한 달 동안 휴가를 내어 이곳에 살러 왔다고 하다고 했다. 이곳에 온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 이곳이 실제로 등장합니다. “네가 그 땅을 직접 밟지 않는 한 얻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 쓰여있지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 인터뷰는 다음과 같이 기사 속에 삽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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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릿 카스피에게 이 곳의 소유권을 입증하는 초월적인 증명서는 바로 여호수아 18장 24절이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백성에게 이렇게 일렀다. 언제까지 너희 조상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겠느냐?” 성경에 등장하는 ‘그발암모니’라는 지명에서 지금의 ‘아모나’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Marcus Eliason, “Olmert’s tough line heightens settlers’ fears that Israel is leaving them behind,” The Associated Press, January 2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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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특파원 댄 페리(Dan Perry)는 팔레스타인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던 아메드 쿠레이를 찾아가 정착촌을 계속 건설하는 이스라엘정부에 맞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었다. 너무나 뻔하고 식상한 질문에도 가끔 신선한 대답이 나올 때가 있다.

““흠, 이대로 계속 가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이었기에 그냥 이렇게 물었죠. 그런데 쿠레이는 질문의 요지를 알아듣고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이 계속 우리땅을 점령해나겠다고 고집한다면, 우리는 두 개의 국가 논의를 바로 접고, 하나의 국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는 좋습니다.” 그때까지 누구도 그런 식으로는 접근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누구도 생각 못했던 해법이었죠.” (댄 페이, 인터뷰이: 아메드 쿠레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통합은 사실 이스라엘에서 원하지 않는 해법이다. 이스라엘 인구는 900만 명으로 팔레스타인 인구보다 많긴 하지만, 50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과 통합하는 순간 유대교 국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독립 정부를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통합도 원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접근 방식은 국제적 지지를 받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기자는 균형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스라엘은 웨스트 뱅크를 점령함으로써 ‘복잡한 인구학적 구성’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다”고 진술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괜찮다.

“나는 항상 기자들에게 말하지. “양쪽의 주장을 인용할 때 가장 그럴듯한 것을 골라서 기사에 써라. 그들의 입장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위해 노력하라. 그들의 입장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는 즉흥적인 발언은 하지 마라. 각각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맥락을 공평하게 제시하라.” 어느 한 쪽은 그럴듯한 주장을 고르고, 반대쪽은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골라서 대비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편향된 기사를 쓰는 것이지.” (니콜라스 타트로, Nicolas Tatro)

팔레스타인 자치와 이스라엘과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상호 인준으로 구성된 오슬로 협정(1993). ,사진은 라빈 이스라엘 총리, 클린턴 미 대통령, 아라파트 PLO 의장.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2년 뒤인 1995년 11월 4일 협정을 반대한 극우파 유대인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듬해인 1996년 총선에서 극우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사실상 파국으로 향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기념비적인 저작을 남긴 에드워드 사이드는 당시 오슬로 협정에 대해 "오슬로 협정의 본질은 이스라엘의 점령 상황 지속을 팔레스타인이 공식적으로 동의해준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협정을 비판한 바 있다. (사진: 미국 백악관 제공, 퍼블릭 도메인)
팔레스타인 자치와 이스라엘과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상호 인준으로 구성된 오슬로 협정(1993). ,사진은 라빈 이스라엘 총리, 클린턴 미 대통령, 아라파트 PLO 의장.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2년 뒤인 1995년 11월 4일 협정을 반대한 극우파 유대인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듬해인 1996년 총선에서 극우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사실상 파국으로 향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기념비적인 저작을 남긴 에드워드 사이드는 당시 오슬로 협정에 대해 “오슬로 협정의 본질은 이스라엘의 점령 상황 지속을 팔레스타인이 공식적으로 동의해준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협정을 비판한 바 있다. (사진: 미국 백악관 제공, 퍼블릭 도메인)

치열한 갈등 속에서 벌어지는 미디어 전쟁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양쪽 진영이 구사하는 미디어 전략 역시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이 국제적으로 일방적인 지지를 받았다. 제1차 인티파다 때는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 앞에서 청바지를 입은 어린 아이들이 맞서는 사진’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차 인티파다 때에는 양 진영 모두, 어린이들까지 무참히 살상하는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로써 더 이상 ‘희생자의 지위를 두고 벌이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 못지않게 ‘영악한’ 미디어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기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기 위한 더듬이가 양쪽에서 끊임없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현장을 직접 취재하는 것이 중요해졌죠.” (캐린 라웁, Karin Laub)

이러한 치열한 미디어 전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보도할 때 사용하는 ‘단어’ 선택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동예루살렘에 건설한 이스라엘인 거주 지역을 ‘정착촌’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웃’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우리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정부가 일컫는 대로 ‘이웃(neighborhood)’라는 말을 사용했었죠. 하지만 팔레스타인 쪽에서 이의를 제기했어요. “잠깐, 이곳은 일방적으로 점령한 땅입니다. 영토 병합을 국제사회는 전혀 인정한 바 없습니다. 웨스트 뱅크에 건설된 무수한 정착촌(settlement)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정착촌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차이를 두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역을 정착촌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어요.” (캐린 라웁)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에 세운 분리장벽 아래를 걷고 있는 팔레스타인 소녀 (출처: Rain Rannu, "Wall between Israel & Palestine", CC BY, 2008. 3. 11.)
이스라엘이 웨스트 뱅크(서안 지구)에 세운 ‘분리장벽’ 아래를 걷고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 안의 소녀 (출처: Rain Rannu, “Wall between Israel & Palestine”, CC BY, 2008. 3. 11.)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계속 장벽을 세웠는데, 팔레스타인은 그것을 ‘인종분리벽(apartheid wall)’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안전펜스(security fence)’라고 불렀죠. 사실, 두 가지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건 벽이기도 하고 펜스이기도 하죠. 어쨌든 이스라엘과 웨스트 뱅크를, 이스라엘과 웨스트 뱅크의 일부를 분리해내는 역할을 하니까, 우리는 사람들을 분리하는 장벽이라는 뜻에서 ‘분리장벽(separation barrier)’이라고 부르기로 했죠. 물론 이러한 대안을 늘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는 다행이도 품위 있는 해법을 찾아낼 수 있었죠. 단어 하나까지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요.”  (캐린 라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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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AP, 역사의 목격자들] (지오바니 델오토, 신우열 옮김, 크레센도, 2020)에서 발췌한 내용을 출판사가 직접 각색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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