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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제2공화국, 터키의 아나키’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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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월 12일,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들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하였다. 그 뒤 억압이 줄을 이었다. 모든 정당과 노동조합 활동을 금지시킨 뒤 중앙과 지방 가리지 않고 주요 정치인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치적 개혁을 진행한 뒤 다시 민정 이양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물론 그 전까지는 군인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국가안보위원회 의장이었던 케난 에브렌 장군이었다.

케난 에브란(Kenan Evren)
케난 에브렌(Kenan Evren)

쿠데타가 가져온 억압과 질서

억압은 이전의 쿠데타들보다 오래 갔다. 1981년, 정치적 문제에 대해 공공연히 논의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뷜렌트 에제비트와 쉴레이만 데미렐 같은 구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은 금지되었다. 몇몇 지도자들은 재판에 넘겨졌고 언론 폐간도 줄을 이었다. 체포와 투옥도 그칠 새가 없이 전국을 휩쓸었다. 9월에 일어난 쿠데타의 첫 6주 동안 11,500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1981년이 시작될 무렵에는 두배로 늘어 3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12만 명으로 늘어났다. 1982년에는 투옥된 사람이 8만 명에 이르렀다.

장점이 없지만은 않았다. 1970년대 급진주의자들이 주도한 혼란은 투옥으로 곧바로 정리되었고, 터키는 질서를 되찾았다. 국가 폭력에 힘입어 사적 테러 활동은 10%로 줄었다. 하지만 이는 전국적이고 광범위한 억압 하에서 얻어낸 ‘성과’였다. 쿠데타 이전에 좌파적 견해를 표명했던 노조 지도자, 정치인, 대학 교수, 교사, 언론인, 법조계 인사 등은 주시 대상에 올라 곤경에 처하게 됐다. 고문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앰네스티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인권 상황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고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일정부분 개선이 있긴 했지만 많은 것을 바꾸지는 못했다.

한편 국가안보위원회는 신헌법을 만들기 위해 제헌의회를 구성했고, 1982년 7월에 최초의 초안이 나오게 되었다. 이 헌법은 다시 권력을 행정부에 집중시키고,언론 및 노동조합의 권리를 대폭 제한하였다. 곧 헌법 동의 여부를 두고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는데, 만약 통과된다면 헌법에 명시된대로 국가안보위원회 의장인 케난 에브렌이 자동적으로 7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맡게 될 것이었다. 투표는 불참자에게 벌금을 물리고 향후 5년간 선거권을 박탈하는 등 강경한 수단을 동원해서 치러졌고, 헌법에 대한 비판조차도 금지해놓았기 때문에 에브렌은 91.4%의 찬성률과 함께 손쉽게 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다.

쿠데타를 이끈 케난 에브렌은 터키에 광범위한 억압을 초래했고, 결국 7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쿠데타 케난 에브렌은 터키에 광범위한 억압을 초래했고, 결국 7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3공화국이 출범한다.

제3공화국 출범과 외잘의 등장  

1983년, 본격적으로 터키의 제3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에브렌 정권은 새로운 출발을 강조했다. 1980년 이전에 활발히 활동했던 정치인들은 10년 간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대신 새 정당을 창당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단, 국가안보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예컨대 데미렐의 정의당을 계승한 대터키당과 정도당, 그리고 공화인민당을 계승한 사회민주당은 1983년 총선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오직 세 정당만 허가되었는데, 각각 다음과 같았다.

  1. 군부의 간접적 지원을 받고 있던 민족민주당
  2. 공화인민당의 전통적 케말주의 노선과 관련 있는 인민주의당
  3. 1979년에 시작된 시장자유화 개혁을 설계, 집행한 투르구트 외잘이 이끄는 조국당

군부는 자신들이 통제하는 민족민주당에 집중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인민주의당에도 어느 정도 지지를 보냈는데, 조국당은 그 덕에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군부에 불만을 품은 터키인들 사이에서 ‘유일한 야당’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당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안정성을 확보하려 했던 새 선거제도 덕분에, 외잘의 조국당은 45%를 득표하고 막강한 권한을 확보할 수 있었다(인민주의당은 30%, 민족민주당은 23%를 득표했다). 군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랐지만, 법적 절차에 따라 외잘이 총리 자리에 오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투르구트 외잘 (1986년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2.0)은 군부로부터 지원받지 않는 '유일한 야당'이라는 이유로 어부지리 혹은 반사을 얻어 총선에서 제1당이 되고, 투르구트 외잘은 총리에 오른다.
조국당은 군사 정권으로부터 지원받지 않는 ‘유일한 야당’이라는 이유로 일종의 ‘반사이익’을 얻어 총선에서 제1당(45% 득표)이 되고, 투르구트 외잘(사진, 1986년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2.0)은 총리에 오른다.

외잘은 그 자신의 독특한 이력으로 서슬퍼런 군부 권력 밑에서도 단단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외잘이 갖고 있던 최고의 장점은 터키 사회 각양각색의 분야에 우호적인 연을 맺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기 엔지니어로 경력을 시작했고, 민간 기업에서 성공적으로 관리자 역할을 수행한 경험 덕분에 재계 인사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수피즘(Sufism; 이슬람교 계열의 신비주의적 분파)의 낙쉬반디 교단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고, 어머니는 쿠르드인이었다. 그의 동생인 코르쿠트 외잘은 우익 행동주의자 조직이었던 민족구원당의 지도급 인사였다. 여기에 더해 외잘은 터키 동부의 낙후된 말라티야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는데, 그 덕분에 대중의 언어로 소통하여 그들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에 조국당은 구 정의당 인사, 우익 민족주의자들, 이스탄불의 민간 자본가들, 아나톨리아의 중소 자본가들, 평범한 농민들, 쿠르드인들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지연합을 구성할 수 있었다.

 

외잘 총리의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는 그의 큰 자산이 된다.
외잘 총리의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는 그와 조국당에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외잘의 ‘안정화 프로그램’ 

외잘이 권력기반을 갖춘 뒤 시작한 일은 광범위한 경제 구조 개혁이었다. 개혁의 내용물은 그가 1979년과 80년에 시도하려고 했던 시장자유화 조치들이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외잘에게 결정적으로 우호적인 변화가 하나 있었다. 노동조합과 좌익 정당들을 군부가 철저하게 탄압하고 있기에 의미 있는 반대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안정화 프로그램’이라고 명명된, 케말리즘 경제원칙과는 정반대의 정책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안정화 프로그램은 국제수지균형 개선, 플레이션 억제, 수출지향 자유시장 경제로의 전환이라는 세 가지 목표로 이루어졌다. 목표 달성을 위해 터키 리라화를 대거 평가절하하고 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하였으며, 임금 동결과 국내산업에 대한 국가보조금 철폐가 동시에 따라왔다. 대신 수출업자들에게 보조금이 지급되었으며, 수출에 관련된 규제가 바르게 제거되었고,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투입해야만 했던 수입품들에는 관세도 면제되었다.

경제 개혁의 영향력은 확실하고 광범위했다. 먼저, 기존 국가 정책에 의존하던 임금노동자 대부분은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리라화 평가절하와 임금동결이 맞물려 1989년까지 실질 구매력은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대신 그동안 활동이 억제되던 몇몇 대형 가족기업들이 수출지원책과 맞물려 거대한 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코츠, 에즈자즈바슈, 추쿠로바, 사반즈, STFA 등이 대표적인 기업들이었다. 아랍 산유국들의 건설붐과 같은 호재와 정부 정책이 맞물린 결과였다. 이 기업집단들은 각자 자기만의 제조기업, 보험업, 무역상사, 은행을 소유하며 규모를 불려갔다.

외잘의 '안정화 프로그램'으로 임금노동자는 직격탄을 맞았지만, 몇몇 대형 가족기업은 재벌로 성장했다.
외잘의 ‘안정화 프로그램’으로 그동안 케말리즘에 의해 보호받은 임금노동자는 직격탄을 맞았지만, 몇몇 대형 가족기업은 수출지원책에 힘입어 재벌로 성장했다.

수입 제한이 상당수 풀리면서 동시에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소비 붐도 일어났다. 과거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던 독일제와 일제 물품들이 상점을 빼곡히 채우기 시작했다. 특히 빠르게 성장하게 된 수출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매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근대화를 상징하는 물품들을 그 전에는 너무나 구하기 힘들었기에, 심지어 임금이 줄어들게 된 공공부문 종사자들도 사재기를 통해 소비욕을 해결했다.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투자도 재개되었다. 진입이 허용된 외국자본들은 이즈미르, 메르신, 아다나 같은 해안 자유무역지구의 수출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인프라 투자도 다시 시작되었고, 통신망과 도로 네트워크 등이 재정비되었으며 고속도로도 뚫리기 시작되었다. 드디어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가늘게 이어주던 2차선 도로의 부담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에너지도 다원화되었다. 소련으로부터 가스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천연가스를 공급하기 시작했는데, 천연가스가 대도시 난방에서 갈탄과 석탄을 대체한 덕분에 대기 질이 확연하게 개선되었다. 낙후된 남동부 지역을 부흥시키고자 ‘남동 아나톨리아 프로젝트’도 개시되었다. 외잘 정부는 거대한 아타튀르크 댐 건설을 통해 이 지역에 관개시설과 전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터키 관광업 붐도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평소부터 터키가 가진 역사, 자연 유산을 천혜의 자원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터키 정부가 재원이 워낙 없었기에 외잘은 BOT 방식[footnote]민자기업이 건설 후 일정기간 운영하며 수익을 내다가 정부로 소유권을 이전해주는 투자 방식[/footnote]으로 해외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관광지 개발을 시작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개발된 관광지들은 북유럽 관광객들을 빨아들이면서 막대한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90년대가 되었을 때 관광업은 터키가 획득하는 경화의 원천으로 탈바꿈했다.

오늘날 터키의 관광 사업은 안정화 프로그램이 그 기원이다. 사진은 터키의 인기 관광 상품인 카파도키야(Kapadokya)의 열기구 모습.
터키 여행을 상징하는 카파도키야(Kapadokya)의 열기구

1980년대가 끝나가자 누구도 외잘 개혁의 성과를 부정할 수 없었다. 1979년 23억 달러이던 수출액은 1988년에 117억으로 증가했는데, 연평균 22% 꼴로 늘어난 것이었다. 수출액의 60%를 차지하던 농산품의 비중은 20%까지 떨어진 반면, 제조업 생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40% 아래에서 72%까지 올라갔다. 터키의 낮은 임금을 활용한 섬유산업이 가장 큰 성장을 하며 수출의 25% 이상을 기여했다.

터키는 1979년의 2차 석유파동도 그 이전의 1차 석유파동보다 현명하게 넘어갈 수 있었는데, 국가가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프 지역을 겨냥해 수출지원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85년에 중동으로 가는 수출액이 유럽으로 가는 수출액을 넘게 되었다. GDP 성장률은 4.5%로 시작해 1987년에는 8%까지 이르렀다. 물론 여전히 성장은 불안정했고 수입액이 수출액을 상회하여 재정수지는 계속 위험했으나, 정국이 안정되면서 국외 터키 노동자들이 안심하고 터키 은행으로 돈을 송금해온 덕분에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머물렀다.

물론 여전히 지지부진한 부분도 있었다. 비효율적인 대형 공기업은 어느 외국 투자자도 투자하려고 하지 않았고, 민영화에 대한 저항도 상당했다. 국영기업 보조금은 80년대 내내 국가 재정의 가장 큰 위협요소로 남게 되었다. 세제도 여전히 미비한 점이 많고 비효율적이었다. 대신 몇 건의 진전은 있었는데, 항공사나 TV 방송국 같은 영역에서 국가 독점이 해제되어 복수의 기업이 들어와 경쟁 체제가 형성되었다. 80년대 안정화 프로그램을 통해 성장한 새로운 지주회사들은 곧바로 규제가 해제되는 영역에 진출하였고, 미디어 환경은 이 덕에 크게 다변화될 수 있었다.

개혁의 ‘그림자’… 그리고 이슬람주의의 등장 

하지만 이 모든 개혁에 어두운 면이 없을 리가 없었다. 이 시기 다른 국가들에서 진행된 수많은 시장자유화 개혁과 마찬가지로, 터키에서도 자연스레 세계화의 수혜자들과 피해자들이 나뉘기 시작했다. 사양산업과 공공부문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실직자가 되거나 구매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대신 새로이 뜨기 시작한 기업인들은 신흥 중산층을 구성하였고, 정부가 장려한 소비붐을 열렬히 즐겼다. 터키 노동력의 60%를 고용하고 있던 농업도 상대적으로 소외되었고, 농민의 불만도 가중되었다. 빈곤층도 대폭 늘어났고, 유연화된 노동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안겨주기 시작했다. 공공부문 민영화가 막대한 이권을 안겨주자 부정부패 문제도 대두되었다. 특히 외잘 본인의 친인척을 중심으로 한 족벌주의, 조국당 인사들과 관련한 재계 부패 스캔들이 임기 내내 끊이질 않았다.

외잘의 경제개혁으로 재벌집단은 성장했지만, 농민, 노동자, 빈민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외잘의 경제개혁으로 재벌집단은 성장했지만, 농민, 노동자, 빈민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거세져 조국당은 지지세를 가파르게 상실하기 시작했다. 조국당은 케난 에브렌의 7년 임기가 끝나가는 1989년에 열린 선거에서 참패를 해 21.9%만 득표한 제3당이 되었다. 비록 외잘이 에브렌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지만, 그는 더욱 더 많은 곤경에 직면해야 했다. 과거에 그가 진행한 정치 자유화 개혁 덕에 복귀한 구 야당 인사들은 반대 세력을 규합해 도전해오고 있었다. 터키가 대외 경제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되면서, 경제적 취약성도 올라갔고, 인플레이션과 재정, 무역적자 문제는 아직도 채 해결되지 않았다.

이 같은 곤경은 1989년 즈음부터 조국당이 겪게 된 당내 분열과 맞물려 조국당의 지도력을 손상시켰다. 당내에서, 또 사회적으로 가파르게 지지세를 확보해가던 이슬람주의자들이 분열을 부추긴 주인공들이었다. 1988년, 조국당 내의 민족주의 파벌과 이슬람주의 파벌이 ‘신성동맹’을 결성하였고 당내 주류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기업인을 중심으로 뭉친 종래의 자유주의 파벌과 충돌하면서 주도권을 쥐고자 노력했다. 이슬람주의 파벌은 국무장관 메흐메트 케체질레르를 중심으로 뭉쳤고 자유주의 파벌은 외무장관 메수트 이을마즈 아래로 모였다. 이제 대통령이 된 외잘은 두 파벌 사이에서 점차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새롭게 떠오른 두 파벌의 대립은 1980년대 내내 진행된 대내외적 변화가 집약된 것으로,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먼저, 1985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소련의 취약성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좌익의 영향력이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공동의 적이 없어지자 두 파벌은 이전에 비해 서로 싸우는 것에 거리낄 게 없게 되었다.

부상하는 이슬람주의가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멘데레스나 그 이후의 소박했던 ‘검은 튀르크’ 포퓰리즘과는 달랐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이미 인접국의 정권을 뒤집었고, 아랍 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풀뿌리 조직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정치 운동으로서 이슬람주의는 놀랍도록 강력했다. 그들의 행동은 지역적인 동시에 이념은 국제적이었다.

터키 이슬람 이스탄불

한편 탁월한 마키아밸리즘 전략과 기만전술을 사용해 필요할 땐 혁명을 가로채거나 선거에 참여하는 등 유연한 전략을 구사하여 경쟁자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당내의 가장 충성스러운 구성원들이 구축한 네트워크는 탁월한 조직력을 자랑했다. 이제 이슬람세계에서 권위주의 독재자, 전통 좌파, 세속주의자, 자유주의자 등등 어떤 정치세력도 이슬람주의자들을 다루지 않고는 정치와 권력을 논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들 모두 이슬람주의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두고 혼란해했고 내부에서 끝없이 논쟁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슬람주의를 만들어냈는가? 아니, 그 전에 이슬람주의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은 결국 ‘왜 에르도안이었는가?’라는 질문과도 얽힐 수밖에 없다. 그 자신이 터키의,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이슬람주의 지도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잘의 경제 개혁이 끼친 사회문화적 파급효과, 그리고 80년대 터키에서 변화하기 시작한 정치, 종교, 사회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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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Erik Zurcher, [Turkey: A Moder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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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에르도안이었나 

  1.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근대화
  2. 케말이 쏘아 올린 6개의 화살
  3. 마을은 4만 개, 전등은 10개
  4. 하얀 튀르크와 검은 튀르크의 탄생
  5. 제2공화국, 터키의 아나키
  6. 제3공화국과 안정화 프로그램
  7. 타오르는 이슬람주의의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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