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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마을은 4만 개, 전등은 10개’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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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난 멘데레스(1899~1961). 대지주로 민주당을 창당했고, 수상을 역임했다.
아드난 멘데레스(Adnan Menderes. 1899~1961)

멘데레스 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터키에는 큰 고민이 하나 있었다.

1949년에 공산주의로부터 유럽을 구하겠다는 이유로 결성된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터키를 받아주지 않고 있었다. 몇몇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터키와 그리스가 북대서양에 있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다는 이유로 터키의 나토 가입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소련이라는 무서운 이웃을 둔 터키는 꼭 나토에 가입해서 안보를 확실히 하고 서방으로부터 절실한 경제원조를 받고 싶어했다.

한국전쟁: 터키의 월남전

터키는 한국 전쟁을 통해 교착상황을 뚫을 수 있었다. 인민군의 남침을 규탄하고 국제연합의 대한민국 지원을 결정한 안보리 결의 83호에 터키 정부는 신속하게 호응했다. 1950년 10월, 5천 명의 터키군이 부산항으로 입항했고 곧이어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병력 파견 규모로는 유엔군 중 4위였다. 미국은 자국과 관련이 없더라도 자본주의 진영 전체를 위해서라면 군사적 부담을 나눠줄 동맹국이 하나라도 절실했기 때문에 터키를 몹시 반겼다.

한국 전쟁이 위급한 순간을 마무리하고 지지부진한 고지전으로 접어든 1952년, 마침내 터키는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나토 가입을 터키가 완전히 ‘서구’에 속하게 되었다는 증거로 선전하면서 정치적 이득을 누렸다.

공화인민당은 처음에 중립을 지키라는 아타튀르크의 유지를 이유로 한국 전쟁 참전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세속주의 엘리트들은 그들이 서구로부터 그토록 염원하던 인정을 받게 되자 반대의 목소리를 접었다.

http://mpva.tistory.com/1158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훈터')는 터키의 한국전 참전에 관해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형제의 나라'라는 이유로 많은 인원이 지원하였고, 많은 인원이 희생되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터키의 한국전 참전은 나토 가입을 위한 '수단'이었다. 참고로 참전 터키군 공식 수치는 전사 741명, 실종 163명, 부상 2,068명, 포로 244명 등이다.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훈터’)는 터키의 한국전 참전에 관해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형제의 나라’라는 이유로 많은 인원이 지원하였고, 많은 인원이 희생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터키의 한국전 참전은 나토 가입을 위한 ‘수단’이었다. 참고로 터키군은 전사 741명, 실종 163명, 부상 2,068명, 포로 244명 등의 희생을 치렀다.

아나톨리아 내륙이 열리다

미국의 경제 원조는 안보만큼 중요했다. 이미 터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통해 많은 지원금을 받고 있었다.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보상으로 원조액은 훨씬 더 많은 액수로 늘어났다. 이제 멘데레스와 민주당 정부는 자신들이 원하는 경제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충분한 자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자본금으로 멘데레스는 수십년 동안 외면받아온 터키 농촌과 농업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농업 현대화와 기계화를 위해 트랙터를 수입했다. 또 미국의 지원으로 터키 내륙 구석구석을 이어주는 도로망이 대폭 확장되었고, 그 위로 미국에서 수입한 트럭들이 다니기 시작했다. 한참 미비했던 수리시설도 정비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터키 농민들은 이제 훨씬 넓은 세계시장과 연결되어 농작물을 팔 수 있게 되었다. 기후까지 멘데레스를 도와 1950년부터 1953년까진 기록적인 풍작도 이어졌다. 과거 식량을 수입하던 터키는 이제 세계적인 밀 수출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농업에서의 성공 덕분에 이 기간 터키는 연간 11%에서 13%의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게다가 과거처럼 소수 엘리트들에게만 파이가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터키 농민 다수가 성장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산업 투자 정책도 일정 효과를 보았다. 해외 투자는 비록 미비했고 국내의 가족기업들은 여전히 정부를 믿지 못해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말이다. 대신 국가의 투자가 도로망 건설과 농산물 가공 산업으로 유도되어 상당한 성과를 내었다.

아나톨리아 고원에 위치한 카파도캬(Kapadokya)에서 떠오르는 일출. 참고로 아나톨리아(Anatolia)는 오늘날 터키 영토에 해당하는 반도를 지칭한다.
아나톨리아 고원에 위치한 카파도캬(Kapadokya)에서 떠오르는 태양. 참고로 아나톨리아(Anatolia)는 오늘날 터키 영토에 해당하는 반도를 지칭한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역으로 수많은 문명의 터전 역할을 했으며, 대부분 고원 지대다.

경제 정책과 병행하여 민주당은 터키의 완고하던 세속주의도 손보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선거전에 승리하기 위해서 공화인민당 정부도 세속주의를 누그러뜨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만큼 다수 무슬림들은 케말리즘을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정부만큼 과감한 접근을 할 수는 없었다. 아잔(아랍어 أَذَان, 터키어로는 에잔(ezan); 하루 다섯 번 기도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외침)을 외치는 것이 다시 허용되었다. 종교 교육기관도 허가되었고, 모스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코란을 비롯한 종교 서적의 출판도 자유로워졌다. 터키 국민 다수는 그동안의 갈증을 마음껏 풀 수 있었다.

1954년, 내리막의 시작

경제 호황과 이슬람의 부활1954년에 있던 선거에서 멘데레스의 재선으로 바로 반영되었다. 1950년 선거와 비교해서, 공화인민당 득표율은 40%에서 35%로 떨어진 반면 민주당은 53%에서 58%로 올라갔다. 이번에도 의석 면에서 차이가 극적으로 났다. 민주당은 503석을 얻었고, 공화인민당엔 31석만 돌아갔다. 이제 민주당의 독주를 가로막을 것은 없어보였다. 멘데레스는 아타튀르크의 뒤를 잇는 터키 제2의 국부로 자리매김할 기세였다.

멘데레스는 선거에서 다시 승리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멘데레스는 1954년 선거에서 다시 승리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1954년 민주당 위세는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그 뒤는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민주당이 가장 열심히 자랑하던 경제가 역설적으로 약한 고리로 부상했다. 먼저 날씨가 안 좋았다. 1953년까지 이어지던 좋은 날씨는 1954년부터 가뭄으로 뒤집혔다. 그리고 터키 농업이 모래 위에 쌓은 성임이 드러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트랙터가 수입되고 도로망이 정비되었다고 해도, 실질적인 농업 생산성이 자동으로 향상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밀 수출국 대열에 당당히 입장했던 터키는 다시 밀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률도 13%에서 4%대로 주저 앉았다.

농업에 의지해서 국가 발전을 견인하고자 했던 멘데레스의 계획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한국 전쟁 참전으로 얻어낸 미국 원조는 마중물에 불과했다. 이제 터키 농업이 선전하며 흐름을 뚫어줘야했다. 그리고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농산품을 팔아 얻은 돈으로 기계류를 수입했고, 정부 투자도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외국시장에 농산품을 수출할 수 없게 된다면? 모든 수입, 지출 계획이 타격을 입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멘데레스는 후퇴를 선택하지 않았다. 수입액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대신 모자란 돈은 외자를 도입해서 해결했다.

터키의 재정과 부채는 점점 위험신호를 보이고 있었다. 리라화 가치도 계속 낮아져 수입은 더 힘들어졌다. 1950년 3%던 인플레이션은 1957년 20%로 뛰었다. 짧은 호황기는 끝나고 전후 시절의 악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필수품에 대한 가격통제가 부활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늘 그랬왔던 것처럼 암시장의 번창으로 끝났다. 터키 상점가에서 물건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 일부에서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지주들에게 세금을 걷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왔으나 당내 반발로 좌절되었다. 멘데레스 본인부터 대지주였고, 공화인민당의 토지개혁 계획을 좌절시킨 장본인이었다.

결국, 민주당은 다시 외채를 도입해 악순환을 계속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토지개혁의 실패는 또 연쇄적으로 다른 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우선 1950년부터 53년까지 있었던 농업발전이 오히려 사회불안을 증폭시켰다. 트랙터 도입, 도로망 확장은 농촌의 기계화, 세계시장과의 연결을 의미했다. 문제는 이 덕분에 지주들이 소작농들에게 덜 의존적으로 변한 데 있었다. 과거 기계화 이전에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을 때는 지주들이 소작농과 협력관계를 구축해야만 했다. 그래야 농번기에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써서 소출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토지는 트랙터로 경작하면 그만이었고, 지역에서의 자급자족적 소비는 상업적 수출로 전환되었다.

인력이 남아돌게 된 농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자명했다. 그들은 땅이 없는 자에게는 희망도 없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다. 이번 이촌향도는 과거와는 성격과 규모 면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먼저 과거의 이촌향도는 계절성이 다분했다. 이주민들은 농촌과 연계를 항상 유지했고, 때가 되면 다시 고향인 농촌으로 돌아갔다. 반면 새로운 이주민들은 농촌에 돌아가도 할 일이 없었다. 점차 도시 이주민들과 농촌 사이의 연계는 희박해졌다.

터키 여자 할머니 농부 농촌

제조업의 실패와 ‘게제콘두’의 등장

그러나 도시도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이 새로운 도시민들을 수용할 산업 일자리가 충분히 창출되지 못한 까닭이다. 멘데레스 정부는 공화인민당의 국가개입주의를 증오했고 어떤 종류의 산업 계획도 반대했다. 대신 즉각적인 조치로 빠른 성과를 얻기를 원했다. 그 결과, 미국의 원조액과 차관은 단기적인 수입품을 구매하는 데 대부분 사용되었다. 장기적인 안목 대신 단기적인 성과만 좇은 결과 산업 분야에서의 발전은 지지부진했다. 또 정치적 논리에 투자가 휘둘려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산업에 자금이 흘러들어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 결과 터키의 특징적인 슬럼가, ‘게제콘두(Gecekondu; 빈민가)’가 각지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농촌 출신의 이주민이 대도시 주변에 세운 슬럼가를 뜻하는데, ‘하룻밤 사이에 세워진’ 동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게제콘두 주민들은 안정적인 제조업에 고용되지 못하고 도시 일용직 서비스업을 전전하거나 길거리 행상인으로 떠돌며 불안정한 삶을 감내해야 했다. 동네에 전기, 상하수도 같은 인프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터키 이스탄불의 빈민가('게제콘두') 모습 (1968)
터키 이스탄불의 빈민가(‘게제콘두’) 모습 (1968)

우리의 숙적은 그들의 영웅

1954년 이후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세속주의 엘리트가 강한 불만을 가지게 하는 동기가 됐다. 먼저 경제난은 수입품에 의존하는 대도시 중산층에 큰 타격이었다. 낮아진 통화가치는 물가 전반을 끌어올렸고 특히 수입품 가격을 올렸다.

또한, 게제콘두의 범람은 도시 생활을 혼란하게 했다. 문화적으로 사실상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두 집단이 대도시에서 만나게 되자 마찰도 점점 많아졌다. 농촌 출신의 보수적 무슬림들이 도시로 몰려들자 세속주의 엘리트들은 케말리즘의 기반이 잠식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게 되었다. 특히 아타튀르크의 후예를 자처하는 군부에서 이런 불만이 가장 극심했다. 지식인들, 관료, 군인, 언론인들은 이제 정부에 경제적 무능을 비판하고, 세속주의 수호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멘데레스는 결코 기존 엘리트, 그 중에서 군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에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국민의 전체 의지’를 대변하고 있으며 타락한 엘리트와는 대비되는 존재라고 선전했다. 1954년 선거에서의 승리는 아마 실제로 그에게 그런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기존 공화인민당의 기반을 허무러뜨리는 것은 민주주의, 자유주의와 어긋나더라도 민족의 대의를 위하여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민주당 정부는 비판에 대해 점점 관용을 잃어갔고, 이름과는 반대로 점점 민주주의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언론 통제, 관료와 군부가 주기적으로 숙청되었다. 학술 활동에 대한 자유도 억압되기 시작했다.

1957년 선거는 멘데레스 정부에게 불안한 신호를 주기 시작했다. 득표율은 10% 정도 떨어져 민주당은 오직 47%만을 득표했다. 공화인민당은 다시 40%의 득표율을 회복했고, 의석을 31석에서 178석으로 늘릴 수 있었다. 그나마 멘데레스가 이 정도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던 것도 이슬람이라는 상징에 기댄 감이 컸다. 민주당 선거본부는 공화인민당을 무신론자의 당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고, 민주당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수호자라고 열심히 선전했다. 경제가 조금 흔들리고 또 자유를 약간 제한하더라도 어쨌든 라디오로 코란을 들을 수 있게 해준 당은 민주당이었다.

선거 후 멘데레스는 “터키는 이슬람 국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이 같은 선거 전략은 군부와 세속주의 엘리트들이 품고 있던 불안감을 확증 수준으로 키웠다. 그들이 보기에 멘데레스와 민주당은 터키의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의 유지를 뒤엎고, 이슬람이 지배하던 야만의 시절로 터키를 다시 끌어내리려는 반역자들이었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파타 케말 아타튀르크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파타 케말 아타튀르크. 케말의 유지(세속주의)를 따르는 군부에게 민주당과 멘데레스는 ‘반역자’에 불과했다.

멘데레스의 반격?

이제 양측의 불신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국외에서 일어난 사건도 멘데레스 정부를 불안하게 했다. 1958년, 이라크에서 압둘카림 카심이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인 파이살 2세를 끌어내렸다. 이집트에서 카리스마적인 군인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로 왕정을 전복시킨 이래로 쿠데타는 아랍 지역에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터키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고 해도 결코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도 민주당 정부는 이 게임을 리드하고 있었다. 정부가 임명한 고위 지휘관들은 대체로 충성심을 지키고 있었다. 멘데레스는 그래서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 압박 수위를 높였다. 멘데레스는 ‘조국 전선’이라는 이름의 대중조직을 출범시켜 국민을 동원하고 통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또 자신의 지지기반인 농촌 지역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IMF로부터 추가로 3억 5,90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아 돈을 풀기 시작했다.

잠깐의 위기를 넘기고 멘데레스 정부는 다시 순항하기 시작했다. 1958년부터 작황이 다시 좋아져 숨을 고를 수 있었다. 1959년에는 기적적으로 항공기 사고에서 생존하여 지지자들에게 정말로 알라가 선택한 인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타임 표지를 장식한 멘데레스 (1958년 2월 3일 자)
타임 표지를 장식한 멘데레스 (1958년 2월 3일 자)
비행기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멘데레스.
비행기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멘데레스 (1959).

군부는 계속해서 얻어맞기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멘데레스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다. 군 대부분은 아타튀르크를 중심으로 결집했고, 멘데레스는 그런 상징을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 그의 숙적인 이스메트 이뇌뉘가 열차를 타고 카이세리로 향했을 때 불길한 느낌은 현실로 다가왔다. 멘데레스는 군에 이뇌뉘를 실은 열차가 카이세리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감을 잡은 이뇌뉘가 바깥으로 나오자, 이변이 일어났다. 열차를 막던 장교와 병사들은 모두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아타튀르크의 전우에게 경례를 한 것이었다. 카이세리로 당당히 입성한 이뇌뉘를 보며 멘데레스는 군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무스타파 케말(좌)과 이스메트 이뇌뉘 (우). 
무스타파 케말(좌)과 이스메트 이뇌뉘 (우).

1960. 5. 27. 공화국 최초의 쿠데타

사태는 점점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960년 4월, 사태는 다시 멘데레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앙카라와 이스탄불 같은 도시에서는 점차 시위가 늘어나 멘데레스를 압박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부는 당내 강경파들을 모아 특별 조사위원회를 꾸려 군부 숙청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3개월의 조사를 거친 뒤 정부에 반역을 획책하는 이들을 추려내 합당한 처벌이 가해질 것이었다. 이 소식에 시위는 더 격화되었다. 사관학교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제 정부가 통제하게 된 언론은 이런 시위 소식 대신 대륙 반대편 한국의 4.19 혁명 얘기만 줄창 보도하고 있었다.

5월 25일, 멘데레스는 갑자기 계획된 3개월의 조사를 중지하고 1개월만에 모든 반역자들을 파악했다고 선언했다. 군부, 공화인민당, 학자, 언론인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과 조사가 취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1960년 5월 27일, 마침내 터키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신속하게 앙카라와 이스탄불의 관공서와 방송국을 장악했다. 대통령 젤랄 바야르와 총리 아드난 멘데레스를 필두로 모든 민주당 핵심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1961년, 다수의 인사들이 다양한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그 중에는 멘데레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초로 터키에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민주당의 10년 역사는 그렇게 끝났다.

체포되는 멘데레스
체포되는 멘데레스

민주당 10년의 유산

멘데레스와 10년의 민주당 집권기는 그렇지만 훨씬 더 깊은 유산을 터키에 남겼다. 먼저 민주적 선거에서 자본가, 이슬람, 농민의 동맹이 가진 잠재력이 마침내 확인되었다. 대도시 세속주의 관료들은 조직력이 더 강하고 무력을 지니고 있긴 했으나 선거전에서 결국 중요한 건 표의 숫자였다. 자본가들은 돈을 댔으며, 농민은 이슬람으로 결집했다. 투표만 허용되면 이들은 언제나 멘데레스의 노선을 표방한 정당을 찍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터키 민주당(터키어: Demokrat Parti, DP) 로고. 1946년 1월~1961년 9월까지 존속.
터키 민주당(터키어: Demokrat Parti, DP) 로고. 1946년 1월~1961년 9월까지 존속.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세속주의 엘리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터키는 민주주의를 해야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하면 ‘미개한 다수’에게 언제나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종교 밖에 모르는 무슬림들은 터키를 퇴보시킬 것이고 세속주의 원칙을 배반할 것이 분명했다.

반대에 직면한다면 그들은 언론의 자유, 집회 시위의 자유를 탄압하기 시작해 본색을 드러낼 것이었다. 그때는 군부가 어쩔 수 없이 ‘외과수술’을 해야만 했다. 시민 저항이 아닌 군부 쿠데타로 정부를 몰아내는 것은 민주주의에 다소 어긋나긴 했어도 그보다 나은 수는 없었다.

어쨌든 세속주의자는 소수였다.

흑과 백

이후 터키 학자들은 이 두 세력을 각각 ‘하얀 튀르크’‘검은 튀르크’라고 명명했다. 하얀 튀르크는 도시에 거주하는 세속주의적이고, 진보주의적이며, 서구지향적인 엘리트층이었다. 반면 검은 튀르크는 신실한 무슬림으로, 보수주의적이고 이슬람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다.

검은 튀르크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군부가 개입해 사태를 원상복귀시키려고 할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마땅한 근거가 있었다. 청년튀르크의 전통은 애초부터 쿠데타와 맥이 닿아있는 것이었다. 국부인 아타튀르크는 반대자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군부는 선출된 권력보다는 군부 자체의 논리에 더 깊게 충성하는 것 같았다.

멘데레스 처형검은 튀르크가 품은 이 모든 의심을 완벽히 사실로 만들어주는 마침표였다. 검은 튀르크들은 서구화되고 신앙심을 잃은 젠체하는 엘리트들이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민중의 의지를 무시한다고 분노했다.

멘데레스의 최후
멘데레스의 최후

역사는 반복되진 않지만 각운은 맞춘다

에르도안의 터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구도가 매우 익숙한 것을 금새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뒤에 더 설명하겠지만, 에르도안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집권했다. 멘데레스와 에르도안 모두 내륙의 검은 튀르크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멘데레스는 나토에 가입하면서 군부의 불안감을 불식시켰고 에르도안은 유럽연합을 활용했다. 모두 집권 초기에 경제 호황을 누렸고 대대적인 인프라 투자를 통해 전국적 발전을 유도했다.

그리고 두 지도자 모두 공적 생활에서 이슬람을 부활시켰다. 마지막으로, 반대파의 저항에 직면해 두 지도자는 자신들이 서구지향적 엘리트와 대비되는 ‘진짜 민중’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민중의 진정한 대변자는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망치는 일이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멘데레스는 쿠데타로 실각하고, 처형당했다. 에르도안은 반대로 터키 정치에서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군부 숙청을 실현시켰다. 이 차이를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멘데레스 사후의 터키를 또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터키판 '개발독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2017). 헌법 개정 후 현지 시각 2018년 6월 24일 함께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21세기 술탄'(중세 이슬람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대선에선 에르도안이 52.7% 득표했고, 총선에선 정의개발당 42.68% 득표했다.
터키판 ‘개발독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2017). 헌법 개정 후 현지 시각 2018년 6월 24일 함께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21세기 술탄’(중세 이슬람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대선에선 52.7%(에르도안), 총선에선 42.68%(정의개발당) 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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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Ata. A. Akiner, [Forgotten Consequences]
  • Erik Zurcher, [Turkey: A Moder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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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에르도안이었나 

  1.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근대화
  2. 케말이 쏘아 올린 6개의 화살
  3. 마을은 4만 개, 전등은 10개
  4. 하얀 튀르크와 검은 튀르크의 탄생
  5. 제2공화국, 터키의 아나키
  6. 제3공화국과 안정화 프로그램
  7. 타오르는 이슬람주의의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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