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하얀 튀르크와 검은 튀르크의 탄생’에서 이어집니다.
[divide style=”3″]
1960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 장교 조직인 국민통일위원회(Milli Birlik Komitesi)는 일군의 대학 교수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립하고 신헌법 작성을 주문하였다.
이들은 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키고, 그에 따라 선거를 치른 뒤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계획이었다. 군부가 계속 정권을 장악하고 있어야 하는지에 관한 내부 논쟁이 있긴 했지만, 민정이양에 반대하는 장교 그룹이 숙청되면서 터키는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로 돌아가다
신헌법을 기초한 학자들이 보기에 구헌법의 문제는 특정 정당의 과도한 권력 독점을 용인하는 데 있었다. 아타튀르크의 공화인민당이나 멘데레스의 민주당 양측 모두 집권기에 권력을 민주적으로 공유하지 않았다.
그래서 1961년 헌법에는 다수당의 횡포를 막기 위한 견제 수단들이 대거 등장했다. 먼저 상원과 헌법재판소가 등장해 하원을 견제했다. 또 선거에서는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 소수당의 진출을 원활하게 하였다. 또한, 파업권을 포함한 각종 권리가 새롭게 헌법에 명기되었다.
물론 군부가 조건 없이 뒤로 물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총참모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안보위원회도 헌법기관으로 설립되었다. 기본적으로 이 위원회는 내각의 대내외 정책에 ‘자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자문을 단순한 자문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군부가 민정이양을 공식화하면서 정지되었던 정당 활동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먼저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된 공화인민당이 복귀했다. 그리고 공화인민당의 라이벌이던 민주당은 새롭게 다시 부활해야했다. 쿠데타로 숙청되지 않은 이전 민주당 정치인들은 새로 정의당(Adalet Partisi)을 세워 복귀했다.
비록 이전 정권이 쿠데타로 제거되었다고 해도 이들의 세력은 여전히 전국적으로 강력했다. 7월의 신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나온 반대표 38%는 곧 멘데레스 지지세로도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쿠데타로 핵심 당조직이 제거당한 상황에서 이런 결과를 얻은 건 정의당이 앞으로도 상당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였다.
1961년 10월 15일에 실시된 터키 제2공화국의 첫번째 총선에서 대략적인 구도는 이미 나왔다. 물론 쿠데타의 여파로 집권당은 공화인민당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득표율은 36.7%에 불과했다. 정의당은 34.7%를 득표해 턱밑까지 쫓아왔다. 게다가 나머지 27%의 표도 구 민주당에서 떨어져나온 정당들이 차지했다. 즉, 정당체제가 다시 양당제로 정비되면 정의당은 얼마든지 과반을 회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1963년에 있던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은 바로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 승리로 공화인민당과 연정을 구성했던 소수당들이 흔들리면서 다시 정국은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결국 1965년, 80세의 이스멧 이뇌뉘는 예산 승인을 받아내지 못해 사임하고, 내각은 붕괴해 새 총선이 열리게 되었다.
‘서민 총리’ 쉴레이만 데미렐
한편 정의당에서는 멘데레스를 이을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고 있었다. 멘데레스 정부 당시 댐 건설을 지휘한 토목 엔지니어 쉴레이만 데미렐(Suleyman Demirel)이 그 주인공이었다. 데미렐 그 자신은 결코 카리스마적인 리더가 아니었지만, 서민적 면모로 인해 터키 정치사에서 시대 전환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 이전 멘데레스는 아나톨리아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삼았지만, 본질에서는 서해안에 근거를 둔 대지주였다. 민주당도 본래 공화인민당 소속 정치인들의 분당으로 만들어진 정당이었다. 다시말해 민주당과 멘데레스는 본래 엘리트 지향적인 케말리즘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데미렐은 중서부 내륙의 평범한 가정 출신으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이는 민주당 시대에 기회를 얻은, 농촌 출신으로 기회를 잡은 새로운 엘리트들이 정의당의 주류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확실히 데미렐은 ‘민중의 언어’로 소통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는 이스멧 이뇌뉘 같은 케말주의 엘리트들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자질이었다. 1965년 선거에서 데미렐의 정의당은 52.9%로 단독 과반을 달성해 과거 민주당 시절의 동맹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반면 공화인민당은 겨우 28.7%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거뒀다.
이는 정의당이 구 민주당의 잔존세력을 모두 흡수해 다시금 전열을 정비했다는 의미기도 했다. 정의당에는 농민, 산업계, 소상공인, 대지주, 독실한 무슬림이 모두 살림을 차렸다. 거기에 일부 서구 지향적인 자유주의자들도 포함될 정도였다.
이 점은 정의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준 장점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취약점이기도 했다. 이 많은 세력을 모두 묶어줄만한 이념적 지향성도 구하기 어려웠고, 동맹 구성원들을 모두 만족시켜줄만한 이익을 제공해줄 수도 없었다. 사실 멘데레스에 비하면 카리스마가 부족했던 데미렐이 정의당의 당권을 장악할 수 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런 상이한 세력들을 조율하고 조정하는 탁월한 중재 능력에 기인했다.
공화인민당의 좌회전
선거에서 계속 패배를 겪던 공화인민당 입장에서는 무언가 대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부가 나서서 아예 독재할 게 아니라 결국 다수결의 선거전에서 싸우려면 공화인민당도 이제는 이스탄불 바깥으로 나와야만 했다. 공화인민당 당내에서 이 노선을 이끈 사람은 이후 총리로도 재직하게 되는 뷜렌트 에제비트(Bülent Ecevit)였다.
에제비트는 공화인민당이 이제는 다수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도 좌파 노선을 걸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당 지도자인 이뇌뉘를 설득했다. 중도 좌파 노선은 이제 도시 인구의 다수를 점하게 될 게제콘두(빈민가) 주민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65년 선거에서도, 1969년 선거에서도 공화인민당은 30%도 득표하지 못하고 계속 참패를 거듭했다. 먼저 게제콘두 주민들이 도시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농촌과 완전히 분리되기에는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게제콘두 주민들은 정기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친지들을 만났고, 또 배우자도 농촌에서 구했다. 거기에 아직도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게제콘두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도시적 가치를 흡수할 여력도, 시간도 없었다. 보수적 이슬람의 가치에 충성하는 이들은 대체로 정의당을 지지했다.
반면 터키의 제조업 발전은 여전히 지지부진해서 새롭게 끌어들일 노동계급이랄 것도 제대로 형성이 안 된 상황이었다. 1961년에는 유럽 사민주의를 지향하는 터키노동자당도 창당되었지만, 의회 진출도 제대로 못하는 군소정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한편 정의당은 공화인민당이 좌익으로 이동하는 걸 제대로 활용했다.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터키에서 반공주의 선전은 아주 효과가 좋았다. 그들은 ‘좌파의 길은 모스크바로 가는 길(Ortanın solu, Moskova yolu)’이라고 외치며 선거전을 전개했다. 터키에서 좌파 정치는 지식인들의 관념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공화인민당과 정의당은 양측 모두 제대로 된 민의를 반영하지 못했다. 정의당은 분명 이전의 민주당보다 더 대중지향적으로 변한 모습이 있었지만, 당내에 워낙 다양한 세력이 많아 응집력이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강한 조직력을 지닌 지주와 정의당에 우호적인 몇몇 자본가가 당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공화인민당도 좌경화 전략을 취하면서 빈민과 노동자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태생적인 엘리트(지식인) 지향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경제난
그렇게 변화하는 사회를 정치가 따라가지 못하는 와중에 경제난이 가중되었다. 경제정책을 둘러싼 논쟁 구도는 엇비슷했다. 민주당을 계승한 정의당은 경제계획으로 대표되는 통제경제 자체를 반대했다. 반면 공화인민당은 케말리즘의 유산인 국가개입주의를 적극 옹호했다.
이번 대립은 공화인민당 측에 유리한 면이 있었다. 신헌법에서 국가계획기구를 명시하고 경제 계획을 위한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국가계획기구는 이전에 추진하던 수입대체산업화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50년대 이룬 경제 발전과 확대된 국제 교류로 수입품에 대한 수요는 계속 높아지고 있던 차였다.
수입품에는 고관세를 물려 외화 유출을 막고, 국내 유치산업에 제도적 보호와 보조금을 주는 기존 정책이 다시 도입되었다. 이 정책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많은 문제를 양산했다. 정부 지원을 받는 터키 기업들은 국외 기업들과 경쟁할 필요도 없었고, 거의 독점적 지원을 보장받았기에 국내 기업들과의 경쟁도 사실상 거의 없었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투자도 거의 이스탄불이나 이즈미르 같은 대도시에 집중되었다. 그 과정에서 군부는 대규모 연기금을 활용해 투자계의 큰손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산업 생산의 약 40%를 차지하는 국영기업의 경영은 정치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고용도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게다가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한 것이 도리어 외국 수입품이 국가 경제를 더 의존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역설적인 결과까지 만들어냈다. 공장을 운영하기 위한 핵심 물품들을 자체 생산할 수 없어서 수입에 의존해야했기 때문이다. 만약 수출주도경제를 지향했다면 그 과정에서 외화를 획득해 수입대금으로 쓸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정책 방향성은 달랐지만, 결국 멘데레스 시절의 악몽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부족한 외화와 예산이 미국 원조로 지탱되었고 거기서 모자라면 차관을 받아썼다.
그러면 다 때려부수자: 급진주의의 성장
이 같은 경제난과 사회변동을 정치가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급진주의 세력이 자라날 토양이 마련된다는 뜻이었다. 먼저 미약하지만 좌파가 세력을 점점 키워나갔다. 터키 좌파는 지식인이 주도하는 도시 엘리트 운동 성향이 강했지만, 교육기반이 확대되면서 점차 광범위한 학생운동으로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이들 터키 좌파는 1968년에 시작된 서유럽의 급진 좌파운동, 그리고 마오이즘의 영향을 받으면서 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좌파 그룹은 무장봉기를 선동하고 테러활동을 시작했으며, 이스탄불의 노동조합으로 들어가 파업을 지도하고자 했다. 많은 터키 좌파에게 뷜렌트 에제비트와 공화인민당의 좌파 노선은 너무나 온건한, 억압적 국가의 눈속임에 불과했다.
반대편에서도 마찬가지로 극우 세력이 발전했다. 이들은 아주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터키 민족주의를 선동하며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은 1960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알프아르슬란 튀르케시(Alparslan Turkes)가 결성한 민족주의행동당이었다. 민족주의행동당도 자체 청년조직을 결성하여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할 정도로 과격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회색늑대단’이라고 칭하며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가와 지식인들을 위협했다.
이와 같은 우익 조직이 과거 케말리즘의 민족주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국가적 자긍심의 원천으로 이슬람을 끌어들인 데 있었다. 알프아르슬란 튀르케시 본인은 케말주의 군부에 가까웠지만 정략적 목적으로 이슬람을 포용했다. 또 다른 우파 인사였던 네즈메틴 에르바칸(Necmettin Erbakan)도 이슬람의 가치를 강조하고, 집권 정의당을 외국 세력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하며 자신만의 정치조직인 국민질서당을 창당했다.
극좌와 극우 세력은 모두 같은 편의 온건 정당인 공화인민당과 정의당을 비난했다. 하지만 진짜 갈등은 극좌와 극우 조직 간의 난투에서 발생했다. 특히 대학교 캠퍼스에서의 충돌은 유혈사태까지 빈번하게 생길만큼 극심했다.
터키의 경제발전이 순탄하지 않게 되면서 기껏 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은 그들 눈높이에 맞는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좌절하고 분노한 청년들은 급진정당이 만든 청년조직에 들어가 폭력을 마음껏 분출했다. 1969년 미 해군 제6함대의 입항을 두고 격렬한 난투가 벌어졌고, 납치, 폭탄 테러, 살해, 린치가 끝없이 이어졌다. 중동 지역에 만연한 부족주의, 명예 문화 때문에 폭력은 갈수록 심해졌다.
1971년 긴급조치: 언 발에 오줌 누기
갈등이 격화되자 의회 안에서도 분열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급진성향의 소수당들이 약진하면서, 주류의 양대 정당이라고 해도 연정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집권할 수가 없었다. 이 말인즉슨 연정에 참여할 소수정당이 사실상 정부 구성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든 정의당이든 급진세력을 통솔하고 처벌할 여력은 사실상 없었다.
군부는 터키가 점차 무질서한 아나키 상태로 진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1971년 3월, 터키군 총참모장이 의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지금 당장 무정부 상태를 끝낼 강력한 정부를 구성하고 ‘케말주의 정신’에 맞는 개혁을 실시하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할 경우 군부는 헌법적 의무에 따라서 다시 정부를 제거할 수도 있다는 위협도 당연히 포함됐다. 양당은 군부의 위협에 빠르게 타협해 중도 성향의 인물을 총리로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공화인민당 우파이자 이뇌뉘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니하트 에림이 차기 정부를 이끌 총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혼란상은 당분간 멈출 기미가 없었다.
4월에 또 테러가 발생해 터키군은 11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주 터키 이스라엘 영사가 급진 좌파 조직에게 납치, 암살당하는 일이 있지 군은 5천 명을 체포하고 좌파 성향의 터키노동자당과 우파 성향의 국민질서당을 해산시켰다. 이는 군부가 좌우에 편향되지 않고 질서 회복에만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증거로 선전되었으나 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군부는 좌파를 더 강력히 찍어눌렀다. 많은 좌익 인사들이 ‘연구소’라는 고문실로 끌려들어가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해산된 국민질서당의 지도자 에르바칸은 법정에 가지도 않았다. 이 같은 군부의 편향은 이후 터키에서 이슬람주의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71년의 긴급조치는 그러나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난을 해결할 실질적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고, 양대 정당의 지배력은 계속 침식당했다. 이후에 치러진 선거들에서도 어느 정당도 단독 과반을 달성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연정과 내각 붕괴의 순환은 변함이 없었다.
뷜렌트 에제비트와 쉴레이만 데미렐의 관계는 이제 라이벌처럼 변해버렸다. 양대 정당은 상대편의 연정을 깨기 위해서 소수당을 계속 회유했고, 연정은 그야말로 밥먹듯이 붕괴했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7번의 내각이 들어섰는데 그 중 6번이 에제비트와 데미렐의 몫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터키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극우와 극좌 성향의 소수당들은 이 상황을 즐기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격화되는 위기
1970년대를 거쳐가며 위기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경제가 심각한 문제였다. 1960년대의 경제난은 1970년대에는 경제위기로 발전했다. 1973년에 시작된 석유파동은 터키가 수입하는 모든 물품의 가격을 올려버렸다. 늘 외화 부족, 인플레이션, 부채에 시달리는 터키에게 이는 치명타였다. 1979년에는 설상가상으로 2차 석유파동까지 왔다. 석유파동으로 터키 상품을 사주던 유럽 시장도 침체되었고, 독일 등지로 이주해 터키로 꾸준히 외화를 송금해주던 노동자들도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터키 정부의 대응은 돈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일단은 그게 제일 편한 대책이었다.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수입도 대폭 규제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값비쌌다. 9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이 찾아왔고, 에너지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가격통제 정책은 아니나 다를까 이전처럼 암시장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 같은 경제, 사회혼란이 정치 폭력을 더욱 부추겼다. 1977년에는 이미 정치적 폭력과 테러로 230명이 죽었다. 1970년이 되자 그 수는 무려 1,500명까지 늘어났다. 게제콘두와 대학가는 사실상 전쟁터나 다름 없어졌다.
투르구트 외잘과 ‘칠레식 해법’
결국 1978년 에제비트 정부는 IMF, 세계은행, OECD에 또 다시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무작정 빌려줄 수는 없었다. 1970년대는 경제고지를 둘러싼 국가와 시장의 싸움이 다시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터키 정부만이 아니었다. 영국, 미국, 한국, 일본 등 수많은 나라가 위기에 직면했었다. 그리고 이미 컨센서스는 점차 시장 자유화와 정부의 역할 축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1980년대가 되면 각국에는 로널드 레이건, 마거릿 대처, 키스 조셉, 김재익 등의 인물들이 나올 것이었다. 터키도 그 흐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1979년, 터키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 쓸 180억 달러의 새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전통적인 통제 경제는 점차 완화되어야 했다. 수출입 규제도 줄여야 했고 국영기업에 들어가는 보조금도 감축해야 했으며, 중앙은행은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했고, 정부지출도 대폭 줄여야 했다. 만약 이 ‘개혁’들이 실행된다면 아타튀르크가 쌓아놓은 국가개입주의 유산은 종식될 것이 틀림 없었다.
좌파 성향의 에제비트가 이 개혁을 주도해서 집행할 수는 없었다. 그의 라이벌인 데미렐이 다시 총리직에 복귀해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 과제를 맡게 된 사람은 쿠르드인의 피가 흐르는 경제관료 투르구트 외잘이었다. 리라화 가치가 48.6% 평가절하 되었고 구조조정 프로그램들이 뒤따랐다.
이 개혁은 당연히 좌익 내부에서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들은 외잘 개혁이 유혈 쿠데타로 좌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 시장 자유화 정책을 추진한 피노체트의 정책과 판박이라는 이유로 ‘칠레식 해법’이라고 비난했다. 노동조합과 좌익 성향 지식인, 청년 좌파 단체 등이 총파업을 벌이고 경찰 및 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다시 분열되었고 혼란에 직면해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이는 다시 군부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1979년 이미 인접한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대혼란이 펼쳐져 이슬람주의 혁명정부가 들어선 일이 있었다. 팔레비 왕조는 아타튀르크를 모방한 여러 개혁을 입안한 세속주의 정부였다.
터키 군부는 혼란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이란에서 벌어진 혼란이 터키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그것이 바로 군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말이기도 했다. 실제로 보수적 무슬림들 일부가 이란 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훨씬 더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이슬람주의 구호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1980년, 다시 총을 들다
군부가 보기에 의회는 이런 중차대한 국면에서 소모적 당쟁이나 벌이고 있었다.
마침 의회에서는 제7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표결이 있었다. 61년 헌법에 따르면 터키 대통령은 의회에서 3분의 2 이상을 득표해야 당선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표결을 해도 3분의 2 이상을 득표하는 사람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표결은 무려 100번이나 이어졌다.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1961년 헌법의 정신은 누구도 제대로 터키를 통치할 수 없게끔 만들어 수많은 부작용만 노출시켰다. 장군들은 이제 다시 행동을 해 케말주의적인 질서를 복원하기로 결심했다.
1980년 9월 12일, 터키 군부는 전격적인 행동을 개시한다.
(계속)
[divide style=”2″]
참고 문헌:
- Erik Zurcher, [Turkey: A Modern History]
[divide style=”2″]
[box type=”note”]
왜 에르도안이었나
-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근대화
- 케말이 쏘아 올린 6개의 화살
- 마을은 4만 개, 전등은 10개
- 하얀 튀르크와 검은 튀르크의 탄생
- 제2공화국, 터키의 아나키
- 제3공화국과 안정화 프로그램
- 타오르는 이슬람주의의 불길
[/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