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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가을 스웨덴의 각종 신문과 잡지의 표지는 #MeToo(이하 ‘미투’)의 쓰나미였다. 온 나라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성범죄 피해 사실을 밝히는 캠페인인 미투 운동의 열기는 영하의 스웨덴을 몇 달째 달구고 있다. 스웨덴의 권위 있는 신문인 다겐스 뉘예테르(DN)에 따르면 스웨덴의 미투 운동은 이제 ‘혁명’이며 ‘1919년 여성 참정권 운동 이후 가장 큰 여성 운동’이라고 한다.

https://www.dn.se/nyheter/sa-rapporterar-andra-lander-om-uppropen/
기사 속 사진은 기자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하는 사라 다니우스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사진 왼쪽). (출처: 다겐스 뉘예테르의 기사(’17. 12. 2.))

미투 운동이 퍼지자 스웨덴의 수상은 국내외를 향해 스웨덴의 페미니스트 정책에 관해 발표했고, 스웨덴 왕족까지 나서 이것은 “거대한 힘”이며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 사회에 더 나은 변화가 올 것”이라고 격려에 나섰다.

의아했다. 스웨덴은 덴마크, 노르웨이 등 이웃 나라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성평등한 나라 중 하나가 아니던가? 내가 잘 못 알고 있었나?

안전지대는 없었다: W, 물꼬를 트다 

서른두 살의 스웨덴 여성 W[footnote]스웨덴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개인정보 보호를 인권의 일부로 보기 때문에 이름을 공개하는 일이 드물다. 스웨덴식으로 알파벳으로 표기했다. (필자) [/footnote]는 스무 살을 갓 넘겼을 무렵 성폭행을 당했다. 10여 년 전 일이다. 가해자 X는 스웨덴에서 가장 부수가 많은 신문의 유명 칼럼니스트였다. 몇 년을 속으로 삭이다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을 덮었다.

지난해 거물급 영화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에 대한 할리우드 배우들의 릴레이 고백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을 본 W는 이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다. 가해자의 이름 옆에 “X가 내게 약물을 먹이고 강간했다”라고 쓴 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피해자는 W만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X에게 당한 여러 명의 여성도 비슷한 내용의 고백을 올렸다.

나쁜 인간은 X만이 아니었다. 곧 스웨덴의 유명 예술가, 언론인 등을 가해자로 지목하는 글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 위원도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주로 일로 연관되어 있었다. 가해자는 주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 영향력을 이용해 여성을 희롱하고 폭행했다. 피해자들은 여러 방식으로 조직 내에 이를 알렸지만,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의 한 위원도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됐다.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의 한 위원도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됐다.

심지어 강간 가해자로 지목되었는데도 여전히 직장을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 ‘증거가 불충분하다’ 등의 이유로 윗사람은 가해자의 자리를 보존해 주었다. 하지만 다들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산업 곳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고, 말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W가 스웨덴의 미투 운동의 물꼬를 튼 후 피해 사실 고백이 막힌 둑이 터진 듯 전국적으로 쏟아졌다. 몇 주 만에 수만 명의 여성이 미투 행렬에 동참하고 나섰다. 직업군별로 서명운동과 가두 행진, 거리 연설도 시작됐다. 스웨덴의 여성 법조인 6천 명이 성폭력에 대해 한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청원을 들고 나왔다. 오스카상 수상자인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포함해 여성 연극인과 영화인도 성명을 발표했다. 스웨덴의 아카데미상 격인 굴드바게 시상식에 여배우들은 상징적 의미로 검은 옷에 손을 잡고 입장했다.

법률, 의료, 국방, 정치, 학계에 이르기까지 안전지대는 없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누구의 몫이어야 하는가 

스톡홀름 대학에서 형법을 가르치던 마델린 레이욘후프부드 교수는 스웨덴은 밖에서 볼 때 평등하고 개방된 사회처럼 보이지만, 전통적인 성 역할과 권력관계에서 아직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한다.

“스웨덴은 제도를 통해 평등을 선언하고 있지만, 일터를 비롯한 직장과 가정에서 발생하는 성희롱과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여성의 책임인양 인식되어 왔다. 여성은 형법 제도 안에서 완벽하게 보호받지 못한다. 강간 사건이 발생하면 당시의 상황, 여성의 옷차림 등에 대한 문제가 항상 불거졌다. 다른 범죄에서는 없는 일이다.” (마델린 레이욘후프부드, 스톡홀름 대학 ‘형법’ 교수)

이번 미투 운동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성폭력의 수치와 책임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지워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박혀있던 성에 관한 불평등한 고정관념 때문에 여성은 피해를 입고도 피해사실을 공개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탓했다. ‘내가 잘못 행동한 것은 아닐까’, ‘내가 빌미를 준 것은 아닐까’ 하며 위축됐다.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은 지금까지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렸왔고, 사회는 이를 당연시하거나 모른 척 했다. 스웨덴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은 지금까지 그 수치감과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사회는 이를 당연시하거나 모른 척 했고, 스웨덴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스웨덴의 미투 운동은 그런 수치심와 책임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몫이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주변에서는 피해를 알고도 쉬쉬했고 넘어갔다. 가해자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계속 직책을 유지했다. 미투 운동은 이 죄책감과 수치심을 밖으로 끌어냈다. 피해자의 개인적 고발이나 투쟁을 넘어서 사회적 대화가 시작됐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수치며 사회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인식이 고개를 들고 있다.

완벽한 사회? 그런 건 없다, 변화는 지금부터다

다겐스 뉘예테르는 2017년 12월 중순에 미투 운동에 대한 여론조사를 벌었다. 여성 응답자의 30%가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한다. 응답자의 70%가 지난 한 주간 친구, 가족, 동료와 일터에서 성희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인상적인 부분은 남성들도 여성과 똑같이 대화에 참여했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스웨덴은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성평등 제도가 많이 도입된 나라다. 스웨덴에서 아빠와 엄마를 구분하는 차이는 모유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뿐이라는 우스개가 돌 정도다.

  • 90%의 아빠가 참여한다는 육아휴직
  • 남녀 모두 80%대인 경제활동 참여율
  • 10% 수준인 성별 임금격차
  • 절반에 가까운 여성 국회의원 비율

거기다 현재 스웨덴 총리인 스테판 뢰벤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히지 않았던가? 뢰벤은 2014년 선거에서 이긴 후 총리 포함 23개 부처 장관 총 24명을 여성과 남성이 동일하게 각 12명으로 구성하며 스웨덴은 페미니스트 내각이라고 천명했다. 그런 스웨덴에 성폭력이 이렇게나 많았다고? 그동안 우리는 스웨덴의 마케팅에 속은 걸까?

뢰벤이 내각을 구성한 뒤에 찍은 기념 사진(가운데 손을 모은 남성이 뢰벤 총리). 척 봐도 여성 장관의 수가 많다. (2014. 10. 3.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https://en.wikipedia.org/wiki/Stefan_L%C3%B6fven#/media/File:L%C3%B6fven_Cabinet_okt_2014.jpg
뢰벤이 내각을 구성한 뒤에 찍은 기념 사진(가운데 손 모은 파란색 넥타이 남성이 뢰벤 총리). 척 봐도 여성 장관의 수가 많다. (2014. 10. 3.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답은 제도가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도가 변화의 지렛대가 될지는 몰라도 어떤 가치를 실현할 수는 없다. 해당 사회 구성원의 생각과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 이번 미투 운동의 여파로 곳곳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열린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동의 없는 접촉은 물론 인식하지 못하고 던졌던 농담,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슬쩍 올렸던 손도 범죄라는 인식이 싹터야 한다. 미투와 #WithYou(위드유)가 함께 가야 하는 이유다.

스웨덴은 완벽한 사회가 아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씩씩해 보였던 스웨덴 여성 중 다수가 직장 내 성희롱과 폭력의 피해자였다. 변화는 지금부터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이가, 얼마나 강하고 집요하게 성평등을 위해 소리치고 나설 것이며 성평등 시소의 다른 한쪽 편에 있는 남성들은 얼마나 인정하고 공감하며 변할 것인가?

이 부분에 있어서라면 스웨덴은 분명 한 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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