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7명이나 되는 후보가 출사표를 던진 공화당에서 벌써 두 명의 탈락자가 나왔다. 릭 페리와 스캇 워커.
1. 릭 페리와 조롱의 정치학
텍사스 주지사였던 릭 페리(Rick Perry)는 9월 11일에 캠페인을 ‘중지'(suspend)한다고 발표했다. ‘서스펜드'(suspend)는 엄밀하게는 잠시 중단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대선 주자들이 도전을 포기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그 단어를 사용한다. 극적인 경선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 줄 모르니 문을 완전히 닫지 않는 것일 뿐, 사실상 포기한 거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페리의 캠페인은 두 달 전 트럼프의 막말 조롱 한 마디에 이미 끝났다.
트럼프: “페리가 똑똑해 보이려고 안경을 쓰고 나왔는데, 그런다고 달라지나요?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이렇게 트럼프는 페리를 놀렸고, 큰 화제가 되었다. 그 뒤로는 릭 페리가 다른 일로 언론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으니, 트럼프의 조롱은 효력이 지속되었다.
조롱은 듣는 사람들이 심적으로 동의할 때 효과가 있다. 트럼프가 조롱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지만(존 매케인, 메건 켈리의 경우에서 보듯), 듣는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으니 대개 효과가 없다. 하지만 페리는 달랐다. 그가 그다지 똑똑하지 않다는 이미지는 분명히 존재했다.
조지 부시 → 릭 페리로 이어지는 ‘무식한 텍사스 주지사’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2012년, 오바마 재선을 막으려는 공화당 대선후보들 사이의 토론회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폐지할 세 가지 정부기관이 있다고 말하면서 큰 실수를 했다.
“첫째, 상공부(Commerce).
둘째, 교육부 (Education).
그리고 셋째, 음… 세 번째는… 어… 뭐였더라?”
생중계 토론에서 당황하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자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는데도 여전히 기억해내지 못했고, 그걸 가볍게 넘기려고 “웁스(Oops)”하고 말해버리면서 유권자들에게 준비만 안 된 게 아니라 불성실한 후보로 비쳤다. 그 ‘웁스’는 페리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그 때까지 잘 나가던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결국 2012 캠페인을 “서스펜드”해야 했다.
그러던 릭 페리는 몇 년 후 다시 대망을 품고 언론에 등장하면서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나왔다. 잘생긴 얼굴에 뿔테를 쓰니 훨씬 지적인 인상이 된 건 사실이다. 누가 봐도 이미지 컨설팅을 받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컨설팅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 하나는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그의 “웁스” 동영상.
- 다른 하나는 트럼프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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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캇 워커와 코크 형제
두 번째로 “서스펜드”한 사람은 위스콘신 주지사 스캇 워커(Scott Walker). 1차 토론회에 이어 2차 토론회에서도 전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다. 미국 선거에서 토론실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2015년 여름 트럼프의 급상승으로 젭 부시와 함께 직격탄을 맞은 후보가 워커였다. 초반 지지율은 추락했고, 급기야 1차 후보 토론회에서 형편없는 토론실력으로 그나마 있던 지지율도 깎아 먹었다. 따라서 2차 토론회는 마지막 남은 생명줄이었다. 하지만 발언 기회를 가져오지 못했고, 30분 동안 딱 한 마디 밖에 못하고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문제는 워커가 원래 그렇게 빈약한 후보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런 후보였다면 별문제는 아니다. 2군 토론회는 그런 후보들로 채워져 있다). 워커는 위스콘신 주에서 기가 막힌 정치력을 발휘해서 노조를 억누르고, 공화당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정치인 중 하나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2015년 초에는 아이오와의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며 기염을 토한 상위권 후보가 스캇 워커다.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부자 순위 4, 5위의 코크 형제(Koch brothers; 형이 4위, 동생이 5위)가 지지하는 후보였다. 미국을 노조 없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정치헌금과 로비에 돈을 아끼지 않는 보수진영의 재정 창고 코크 형제는 스캇 워커야말로 자신의 이상을 대변하는 후보라고 생각했다.
워커가 말아먹은 2차 토론회 다음 주인 지난 월요일 아침, 워커의 아내가 캠페인 팀을 긴급 소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배우자가 이렇게 캠페인에 깊숙이 관여하는 일이 흔하고, 그 자체로 눈살을 찌푸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배우자가 그렇게 긴급 소집을 했다는 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다. 남편과 크게 다투었거나, 아니면 남편이 손을 놓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집의 목적은 핵심 스태프와 여론조사와 선거자금을 논의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회의 끝에 워커는 후보를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캠페인 스태프는 프로들이다. 오바마의 발레리 자렛(Valerie Jarett)처럼 철저하게 충성을 다하는 친구 같은 스태프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자신의 경력과 돈을 위해 후보를 돕는 것이지, 후보와 생사고락을 같이하기 위해 와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후보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다른 주군(?)을 찾아 떠난다.
워커가 토론회를 망치자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스태프와 후원자들의 일부가 이탈을 시작했고, 토론회에서 좋은 실력을 발휘한 마르코 루비오, 테드 크루즈와 연락하고 배를 갈아타기 시작했다. 토론회가 끝난 지 2, 3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나머지 스태프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미 선거자금이 바닥나고, 현장조직들이 와해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주지사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줄은 몰랐던 거다.
물론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를 밀던 갑부 지지자들일 것이다. 그런 돈 많은 후원자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 여야 정치인들에게 골고루 기부해서 소위 보험을 들어두는 경우
- 자신의 명확하고 특정한 의제 실현을 위해 정치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경우(주로 특정 법안의 통과 혹은 저지)
전자(1.)는 그냥 보험료를 낸 셈이지만, 후자(2.)는 투자금을 날린 거나 다름없다. 그런 후원자들이 분노할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캬..재밌네요. 후보별 리뷰도 해주세요!
아는 언니 추천으로 들어와서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