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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1.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2.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3.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4.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5.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6.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7.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 혐오, 강간, 동성애
  8.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9.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10.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11.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12.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13.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14.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15.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16.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17.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18.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19.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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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개혁 요구를 무시하고 수 세기 동안 미적거리던 교황청은 결국 종교개혁이라는 강타를 맞고 비틀거리다 마침내 무릎을 꿇고 만다. 루터가 95조 반박문(1517)을 게시한 지 불과 17년 만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독일의 절반과 영국, 덴마크, 스코틀랜드, 스위스에서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가톨릭의 영향력을 눌러버린 것이다.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도 불만으로 들끓었다. 1545년 벌어진 로마 대약탈에서 제대로 회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가톨릭 자체가 사멸할 수 있다는 현실을 깨닫고 마침내 제정신을 차린 교황과 추기경들은 오랜 시간 회피해왔던 교회 개혁을 단행한다. 1563년 개최된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성직자들의 도덕적 청렴함을 강조하며 교회의 재산과 특권을 남용할 수 있는 성직자의 권한을 폐지한다.

종교개혁(개신교)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반격.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이단으로 정의하고, 공식적으로 규탄하였다. 위 그림은 당시 트렌토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 소집된 트렌토(=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묘사한 17세기 그림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예수회, 검소하고 엄격한 교황의 친위부대 

기울어가던 가톨릭의 부흥 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은 바로 스페인의 군사 장교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다. 열정적이고 진지하며 정치적인 수완까지 갖춘 그는 1540년 ‘예수회(Society of Jesus)’라는 수도회를 창립한다. 예수회는 윗사람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최우선 규율로 삼으며 군사조직처럼 움직였다.

예수회를 창립(1540)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 –1556)는 교황이 지시하면 무슨 일이든 실천하며, 어느 곳에도 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예수회는 당시 ‘군사조직’에 가까웠다. (출처: 갑옷을 입은 로욜라, 16세기 그림)

예수회는 우선,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은 지역을 파고들었다. 예수회 사제들은 아무 장식도 없는 검은 망토처럼 생긴 카속(cassock)을 입고 다녔는데, 이 의복은 기존의 가톨릭교회에도 영향을 미쳐 카속을 입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인쇄물을 활용하여 교세를 확장해나가는 것을 보고, 로욜라는 가톨릭도 인쇄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센 불은 불로 잡아야 하는 법이다. 이 개혁가는 1000년 동안 이어온 교회의 정책을 뒤집어, 가톨릭 신도들에게도 하루빨리 성서를 가르쳐야 한다고 교황을 설득한다.

예수회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유럽의 중심지마다 일류 교수진을 확보하여 학교와 대학을 세우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무료로 종교 교육을 실시한다. 물론 여자는 입학할 수 없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세운 세속적인 대학들과 맞서기 위해 그들이 가르치는 교과목도 모두 개설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와 맞서 논쟁할 때 반드시 필요한 지식으로,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들을 가르쳤다. 이 과정에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가톨릭의 강력한 한 축을 담당했던 신비주의 전통은 상당수 배제되었다. 루터나 칼뱅처럼 로욜라도 성서의 무오류성을 믿었고, 논리와 문자만으로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주요 지식인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 역시 예수회에서 설립한 대학의 탁월한 교육프로그램을 보고 부러운 듯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저런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Preserved Smith, ‘The Age of Reformation’, 666)

결국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는 다시 비슷해진다. 실제로 칼뱅은 가톨릭과 자신의 교리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그토록 치고받고 싸웠지만, 거리를 두고 보면 도대체 왜 싸우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슷했다.

그는 자신에겐 엄격했지만, 이웃에는 너그러웠다. 잠은 3시간만 잤고, 많이 기도했으며 소박한 음식에 만족했다. 그가 쓴 예수회 회칙은 1554년에 채택되었는데 군사체계와 비슷했다. 특히 교황과 수도회 총장(이냐시오는 1541년 초대 에수회 총장에 선출됨)에게 전적으로 복종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로마에서 유행했던 말라리아의 일종인 로마 열병에 걸쳐 1556년 7월 31일 선종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

종교개혁 지도자들이 내세운 명분은 ‘성서절대주의’였지만, 사실상 종교개혁을 지배한 것은 ‘원죄론’‘구원예정설’이었다. 사실 이는 성서와 무관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서의 정신과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에도 ‘운명’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신들의 변덕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었다. 유대교는 개인이 옳은 것과 그른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야훼의 계시에 따라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힌두교나 불교의 카르마 역시 현세에서 개개인의 선택과 행위가 축적되어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친다. 노자의 ‘도’의 세계에서는 예정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프로테스탄트의 창시자들은 한결같이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독려했지만, 프로테스탄트를 떠받치는 토대는 사실 고통스러울 만큼 치밀한 논리 구조물, 그림 하나 없이 글자만 빽빽하게 들어차있는 두툼하고 지루한 신학서적이었다.

칼뱅은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이름으로 검소, 겸양, 근면, 자립, 도덕적 청렴을 강조하는 도덕적 기준을 만들어냈지만, 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탐구에서 나온 덕목이 아니었다. 1,400년 전 대부분 익명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문자 기록을 의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고 살아가기에 적합한 개인이 되기 위해서 갖춰야할 덕목에 불과했다.

장 칼뱅(1509 – 1564) 개신교의 아버지. 칼뱅은 근면, 자립, 검소, 청렴을 강조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서는 기쁨, 사랑, 자비, 웃음,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를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다. 8세기 기사도, 9세기 마리아 신앙, 10세기 신비주의, 11세기 넘치는 호기심, 12세기 열린 마음, 13세기 욕정, 14세기 개인들의 독창성, 15세기 휴머니즘이 있었다면, 16세기에는 비참한 무기력을 설파하는 우울한 교리만이 존재했다.

어쨌든 칼뱅의 비전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한 손에는 성서를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맹렬히 싸우다가 전사하겠다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이들을 죽인다. 인도에서 불교는 힌두교에 대항하여 일어났고, 중국에서 유교는 도교의 영향력을 물리쳤으며, 일본에서 선불교는 신도를 눌렀지만, 이러한 종교혁명 뒤에는 테러 정치가 등장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심각한 종교적 발작으로 깊은 몸살을 앓았으며, 이 트라우마는 오늘날 서양 문명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러한 병적인 유전자는 지금까지 살아남아, 아일랜드 같은 곳에서는 지금까지도 종교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농민전쟁 (1524-26) 

신약은 농민들에게 계시와도 같았다. 신약을 직접 읽게 되면서, 예수가 어떻게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는지 깨달았고, 그들이 땅의 주인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알게 되었다. 많은 독일인들이 가톨릭의 권위에 대한 루터의 저항을 사회개혁에 대한 요구라고 해석했다. 그들은 성서를 혁명 안내서로 둔갑시켰고, 루터를 자신들의 대의를 앞장서서 밀고나가는 혁명가로 인식했다.

종교개혁이 시작될 때 독일 땅의 3분의 1 이상을 가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귀족과 부유한 몇몇 가문이 가지고 있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결국 자신들을 계속 빈곤 속으로 밀어넣는 사회 구조에 맞서 일제히 봉기하는데, 이것이 바로 독일 농민전쟁(1524-26)이다. 독일 전역에서 곡괭이와 쇠스랑으로 무장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성당과 귀족의 성 앞으로 몰려들어 대치했다. 1524년 말에 이르렀을 때 세금 내기를 거부하는 농민이 3만 명에 육박했다.

독일 농민전쟁(1524-1526)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던 루트비히 폰 헬펜슈타인 백작(Count Ludwig von Helfenstein)은 당시 공공의 적이었다. 그는 곤봉과 단검으로 무장한 신하들의 보호를 받으며 농민들과 맞서다 결국 농민들에게 에워싸이고 만다. 농민들 무리 속을 빠져나가려 애썼지만 분노한 농민들은 그들을 마구 공격하며 욕을 쏟아냈다.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네 놈이 우리 형을 지하감옥에 쳐넣었지!”

“농장에 들어온 산토끼를 죽였다는 이유로 우리 아버지 양팔을 잘랐어.”

“네 놈의 말과 개와 사냥꾼이 우리 밭을 다 짓밟아놓았지.”

백작은 농민들 무리 속을 겨우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이 때 입은 부상으로 죽고 만다. 이러한 소요는 건초에 붙은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무수한 전제군주들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1525년 바인스베르크 성을 점령한 농민군 앞에 선 루트비히 폰 헬펜슈타인 백작의 모습. (출처: 프리츠 노이하우스; Fritz Neuhaus, 1879년 작)

루터는 이러한 무정부 사태에 경악했으며, 종교개혁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군주들을 지지하고 나선다. 1525년에는 [약탈과 살해를 일삼는 농민 무리들에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도 출간한다. 루터는 자신이 농부라고 했지만, 실제로 농민이 처한 곤경에 전혀 연민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농부를 개떼에 비유했다.

“은밀하게든 공개적으로든 누구든 패고 찌르고 잘라 죽여야 한다. 폭도보다 해롭고 위험하고 사악한 것은 없다. 미친 개는 죽여야 한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당할 것이다.” (The Works of Martin Luther, 4: 248-54)

선동적인 이 소책자는, 교회와 세속 권력이 농민들의 갑작스런 봉기에 어쩔 줄 모르고 당하고만 있다가 정신을 차릴 때쯤 유포되었다. 이 팸플릿은,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했던 종교개혁세력이 자신들의 가장 악날한 적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루터에 대한 농민의 증오심은 하늘을 찔렀고, 루터는 비텐베르크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루터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농민이 모조리 없애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농민을 죽이는 것이 군주나 왕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다. 그 촌놈들은 신성한 권위도 없이 칼만 마구 휘둘러대기 때문이다.” (Preserved Smith, The Life and Letters of Martin Luther, 165)

“이러한 답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거친 언어 폭력이며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든다고 생각한다면, 제대로 생각한 것이다. 그 주둥아리에 돌려주고 싶은 대답은 코피가 나도록 주먹을 갈기는 것이다. 농민들은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귓구멍은 총알로 뚫어야 한다. 머리통이 몸뚱이에서 튕겨나가도 상관없다. 말 안 듣는 학생에게는 회초리가 답이다. 자상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줄 때 듣지 않으려는 자는 도끼를 든 망나니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자비에 대해 나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알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 속 의지에 귀 기울일 뿐이다. 하느님이 자비가 아닌 진노를 보이신다면, 자비는 어디다 쓰겠는가?” (The Works of Martin Luther, 4: 261-72)

농민전쟁의 피해는 엄청났다. 독일 전역에서 13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으며, 이 중에서 공개처형으로 죽은 사람만 1만 명에 달했다. 농민 반란을 진압한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보복은 한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 귀족은 이런 걱정을 하기도 했다.

“반란자들을 이렇게 죽이다간, 우리를 위해 일해 줄 농부는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Cambridge Modern History, 11: 191)

농민전쟁 기간 동안 무수한 수도원, 교회, 성들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수많은 예술작품이 망가지고 부서졌다. 농민들의 집도 모두 파괴되어 5만 명이 집을 잃고 숲과 산속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과부와 고아들이 길가에 늘어서 구걸을 했지만 누구도 자선을 베풀지 않았다. 신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도래한 세상은, 천국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제세례파(아나뱁티스트) 학살

종교개혁 이후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등장하는데, 그중에 재세례파(Anabaptist; 아나뱁티스트; ‘다시 세례를 주는 자’)가 있다. 독일어를 쓰는 지역 남부의 순박한 농민들 사이에서 시작된 이 교파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 교리의 핵심이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다시 세례를 주는 자’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유아 세례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른이 된 뒤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을 ‘재세례파’라고 부른다. 어린 아기에게 베푸는 세례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른이 된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주장이다. 그래서 이들 교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들은 종교적 관용, 비폭력, 평화를 옹호했다. 일부일처제를 유지했지만, 아이는 공동으로 길렀다. 정치, 금융, 상거래, 송사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족적인 농촌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서로 ‘형제의 지킴이(brother’s keeper)’이라고 불렀다. 자기 재산의 10분의 1을 공동재산으로 바쳤고, 농기구, 생필품, 노동력, 땅을 공유했다.

문제는, 이러한 행태가 그들에게 땅을 빌려준 부재 지주들(absentee landlords)의 눈에 거슬렸다는 것이다. 이들의 행태는 토지 소유권을 세습함으로써 구축한 기득권과 또 이에 기반한 사회구조 자체를 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그들은 이 온화하고 평화로운 개신교도를 진정한 기독교운동이라고 갈채를 보내는 대신,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 편에 서서 그들을 비난한다. 예컨대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Imperial Diet)에 참석한 성직자들은 재세례파를 발견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짐승처럼 잡아 죽여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재세례파는 이단이며, 이들의 교리는 너무나 극악하여 재판에 회부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슈파이어의회. 1592년 독일 슈파이어에서 개최된 제국의회. 거의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입법의회로 각 지역의 제후들이 참여했다. (출처: George Cattermole, The Diet of Spires, 19 April, 1529,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United Kingdom.)

재세례파가 처음 문제가 될 때 루터는 이들을 옹호했지만, 이들이 꾸준히 확산되어 자신의 교세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태도를 뒤집어 군주들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급작스러운 돌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루터는 유아 세례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루터의 정치적 계산이었을 뿐이다. 가톨릭 교회와 맞서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군주들이 돌아서면 자신이 위태로워질 수 있고, 또 자신의 교세도 크게 위축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루터의 주장은 자기모순적인 것이었다. 성서에 구체적으로 쓰여있지 않은 것은 모조리 폐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일어선 그였지만, 유아 세례는 신약에도 구약에도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칼뱅 역시 초기에는 재세례파운동에 연민을 가졌으나, 나중에는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의 행동대장 마르틴 부처(Martin Bucer)는, 재세례파들은 “살인자보다 사악한” 종자이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아이든 모조리 잡아죽이라고 교인들을 획책한다.

교황 역시 이들을 이단으로 여겼으며,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이들을 엄단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대다수 가톨릭 성직자들이나 에라스무스 같은 휴머니스트들은 이 근면한 농민들이 양 떼에서 벗어나 잠시 길을 잃은 것일 뿐이니, 영주들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귀족 중에도 재세례파들을 자신의 영지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누구보다도 양심적이고 근면하게 노동하는 선량한 농민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재세례파 신자가 추적자를 피해 도망가다가, 그 추적자가 얼음물에 빠지자 그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장면. 결국 그 신자는 자신이 구해준 추적자에 의해 아스페렌(네델란드 도시)에서 사형 당했다. 강 밖에 구경하는 사람들은 동료 추적자를 방관하는 교도관들. (1665년 발간된 ‘순교자 거울’ 중 쟝 루이켄의 에칭화)

하지만 1528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5세어른에게 세례를 주는 행위는 중범죄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결국 재세례파를 에워싼 사나운 사냥개들의 신경질적인 으르렁거림은 더 격렬하게 울려퍼져나갔다. 재세례파를 연구한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어떤 이들은 벽에 매달려 사지가 찢어지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불에 타 재가 되었고, 또 어떤 이들은 기둥에 묶여 구워졌다.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기도 했고, 칼로 머리통을 베기도 했다. 어두운 감옥에서 굶어죽어 시체로 썩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죽이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은 회초리로 매질을 한 뒤 몇 년 동안 지하 감옥에 가뒀다. 뜨거운 꼬챙이로 뺨에 구멍을 뚫었다. 또 많은 이들을 잡아서 낯선 곳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낮에는 날지 않는 올빼미나 까마귀처럼 그들은 바위 틈, 숲속, 동굴 같은 곳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다. (Karl Kautsky, Communism in Central Europe, 187)

이러한 끔찍한 박해 속에서도 네덜란드, 영국, 독일에서 끊임없이 재세례파 공동체가 생겨났다. 오늘날 퀘이커, 아미쉬, 메노나이트(Monnites)와 같은 교파들이 재세례파에서 유래한 교파들이다.

박해받는 제세례파 신자들. 위쪽부터 시계 방향 순으로. 1544년 네덜란드의 귀족여인 마리아 반 베쿰(Maria van Beckum)이 재세례파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화형당하는 모습. 1570년 네덜란드 마스트릭스에서 재세례파 성인 우르슐라(Ursula)를 고문하는 모습(장 루이켄의 에칭화). 157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재세례파 아네켄 헨드릭스(Anneken Hendriks)를 화형시키는 모습. 무수한 재세례파들이 ‘이단’이라는 명분으로 유럽 곳곳에서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이들 교파는 이후 박해를 피해 대부분 신대륙으로 이주하였다.

이 무의미한 살육의 시기를 거치면서 독일은 ‘누가 농사 지을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죽고, 경제적 기반은 완전히 망가진다. 하지만 농민전쟁과 재세례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인한 혼란은 얼마 뒤 루터 추종자들과 칼뱅 추종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 시작된 30년 전쟁(1618-48)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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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 크레센도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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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30년 전쟁은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전쟁인데, 루터측과 칼뱅측의 전쟁이라고 적었군요. 그뿐 아니라, 수많은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적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군요. 정직하게 적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책의 내용이라 하겠지요. 거짓말을 인용하면서 그게 거짓말이라고 밝히지 않는 자도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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