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 히틀러의 전격전
- 영국 항공전
- 북아프리카의 에르윈 롬멜
- 진주만 공습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이오지마의 깃발과 히로시마의 원자 폭탄
이런 이미지들은 서구 연합국 중심의 전쟁 경험을 반영한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면서 새로운 상징적 이미지들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추가되었다.
- 모스크바 전투
- 레닌그라드 포위전
- 스탈린그라드 전투
- 쿠르스크 전차전
- 베를린 함락과 만주 전략 공세.
이제는 어떠한 역사가도 소련의 전쟁 수행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서방 학자들이 소련의 문서고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소련 영토 안에서 벌어진 다양한 전쟁 경험을 살펴보는 연구, 동유럽과 태평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중국의 차례가 온 듯하다. 중국이 지구적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중국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러한 관심은 자연스레 현대 중국은 어떤 나라이며, 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가깝게는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개방,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멀리는 청제국의 황혼과 아편전쟁 같은 주제들은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된다.
잊혀진 전쟁 ‘중일전쟁’
[중일전쟁] (원제: Forgotten Ally: China’s World War II, 1937-1945)의 저자 래너 미터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상징하는 사건의 목록에 ‘중일전쟁’을 추가하면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이 겪은 엄청난 재난과 투쟁을 독자들에게 상세히 보여준다.
이 책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이미지에 이미 서구인들에게도 알려진 난징 대학살을 제외하고도, 상하이의 분투, 타이얼좡의 반격, 충칭 대공습, 실패한 버마 작전 그리고 일본군의 가공할 이치고 공세를 더한다. 물론 단순히 전쟁을 다루는 것을 넘어서, 전쟁의 배경과 유산을 포함하여 전쟁이 중국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재편했는지,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도 제시한다. 장제스, 마오쩌둥,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물들의 일대기도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이 책은 1927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에 존재하였던 중화민국 정부와 그 지도자 장제스에 주로 집중하며 중일전쟁을 풀어나간다. 책의 초점은 책의 제목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고, 수십만의 일본군을 붙잡고 있었던 중화민국을 그동안 서구와 중국 양쪽에서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그들을 망각한 이유는 단순했다. 중화민국이 중국공산당에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갔고, 중국 대륙의 역사 기억과 그 해석을 공산당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국민당의 기여를 평가절하했고, 자신들의 전과와 역할을 크게 과장했다.
미국에서 이 전쟁이 잊힌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랫동안 지원했던 중화민국이 한줌의 공산당에게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진 것을 둘러싸고, 미국에서는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에 대한 손쉬운 답은 중화민국은 너무나 부패하고 무능해서 패배가 당연했다는 것이었다. 미터는 그의 책에서 중화민국에 대한 서구의 부정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에는 진주만 공습(1941) 이후 장제스와 늘 갈등하였던 미국 지휘관 스틸웰의 편파적인 증언이 결정적이었다고 덧붙인다.
장제스와 중화민국에 ‘정당한 평가’를 돌려주는 것
그러나 실제 역사적 기록을 들여다보면 전쟁에서 장제스와 중화민국이 처한 고난과 노력을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었다. 그에 정당하고 마땅한 역사적 평가를 돌려주는 것이 래너 미터의 목표다. 장제스는 각자 외국 세력과 결탁하고 자신들끼리 싸워대던 군벌들로부터 간신히 협조를 받아가며 저항에 임했다. 10년 동안 그가 마련해놓은 산업적 기반은 일본군이 순식간에 투자가 집중된 양쯔 삼각주를 점령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공산군은 북중국에서 일본군을 억제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언제나 자신의 세력 확대를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면서 국민당을 견제했다.
무엇보다 외부로부터 지원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서구가 식민주의적 시선으로 중국을 여전히 깔보는 가운데 장제스는 일본에 저항하기 위한 지원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자 소련, 영국, 미국과 외교적 협상을 계속해서 벌여야했다. 전쟁 초기에는 심지어 일본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과의 협조도 활용했다. 이런 암울하 상황 속에서 장제스의 군대와 그를 따르는 군벌들의 군대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다른 어떤 영웅적 연합군 부대만큼이나 처절하게 싸웠다. 그리고 그 싸움 덕택에 장제스의 중국은,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에서 ‘빅 4’로서 다른 강대국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세계 속 중국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터가 전쟁의 전반부를 통해 장제스가 중국의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나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후반부에는 장제스가 일본과의 투쟁을 통해 국제적 지도자로 자리 잡는 모습을 보여주다. 미국은 일본을 즉시 무찌르러 달려올 것이라는 장제스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했다. 미국은 오히려 그들이 유럽 전선을 먼저 처리하고 올 때까지 장제스가 일본과의 싸움을 맡아주기를 기대했다.
미국과의 공조를 위해 파견된 스틸웰은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제스는 미국과의 관계를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장개석(장세스)의 그런 고난은, 카이로 회담에서 20년 전만 해도 국제 회담에서 제대로 된 상대로 대접도 못 받던 중국 지도자가 루스벨트와 처칠이라는 초강대국 지도자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한 것을 통해 보상되었다.
아시아의 지도자들: 비폭력 투쟁의 간디, 부역자 왕징웨이의 고뇌
아마 인도계라는 저자의 정체성이 떠오르는 아시아의 민족 지도자로서 장제스의 새로운 위상에 특히 더 주목하게 한 것 같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장제스가 인도에 가서 또 다른 아시아의 민족주의 지도자인 네루와 간디와 대면했을 때다.
자유주의적 제국인 영국과 싸우며 비폭력 운동을 펼치는 이들 지도자들과 무질서와 혼란이 가득한 중국 대륙에서 피를 흘리는 군사 지도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합의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시아 제국이 영국을 아시아에서 축출하고, 그에 또 다른 아시아의 국가가 맞서고, 아시아 식민지가 제국을 위해 전쟁에 나설지를 둘러싸고 아시아 국가와 논쟁하는 장면은 기존의 상식이 완전히 깨졌음을 뜻했다.
일본에 부역하기로 결정한, 국민당의 혁명가 왕징웨이는 장제스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 또 다른 아시아인이었다. 그는 중국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일본과의 협력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일본의 범아시아주의를 받아들였다. 그의 길은 실패로 끝났지만 미터는 왕징웨이의 고뇌를 독자들에게 자세히 소개해준다. 그는 장제스, 마오쩌둥과 함께 ‘서구의 지배가 끝난 이후’ 중국의 새로운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지를 두고 모험을 했던 또 다른 지도자였다. 물론 승자가 전쟁의 가장 큰 당사자인 장제스나 왕징웨이가 아닌 마오쩌둥이었다는 것은 중일전쟁 역사의 가장 큰 역설일 것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중국도 장제스의 전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만 그런 주제가 이제야 탐구되기 시작되었을 뿐이다. 책의 시작과 끝에서 강조되는 것은 전쟁에 대한 후대인들의 기억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장제스와 중화민국은 오랜 기간 ‘잊힌 동맹’이었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항일 전쟁의 영웅들이 오히려 장제스 정권과 협력했음을 숨기기 위하여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만과의 체제 경쟁이 최종적으로 끝나게 된, 개혁개방 이후가 되어서야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전시 기억들을 다시 소생시키고 있다. 이렇게 높아진 관심은 전쟁 자체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토론을 자극할 것이지만, 동시에 일본, 중국, 대만 사이의 복잡한 역사 논쟁을 촉발시킬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표현대로 중일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는 전쟁’이다.
중일전쟁이 남긴 지리적 유산들
한편 전쟁은 아주 특징적인 지리적 유산들도 남겨두었다. 역사학자인 미터가 이러한 지리적, 공간적 관점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읽는다면 전쟁의 다양한 지리적 함의를 끌어낼 수 있다.
1. 하나의 중국
첫째, 중일전쟁은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하나의 실체로 통합했다. 전쟁이 시작된 1937년만 하더라도 중국을 통일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중국은 통합과 분열을 반복하는 왕조 순환 속에서 명백한 분열기를 지나고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민주공화정의 약속을 저버리고 중국을 산산조각 냈기 때문이다. 정통성 있는 정부로서 국민당이 온전히 통제하는 지역은 오직 광둥과 양쯔 삼각주였다.
그 영역 바깥에는 다양한 군벌들이 자신만의 권력을 거의 온전히 누리고 있었다. 만주, 신장, 티베트 같은 외곽 지역은 각각 일본, 소련, 영국의 영향권이었다. 전쟁은 중국의 이런 분열상에 격변을 가져왔다. 군벌들 중 일부는 일본과 협력하면서 생존했지만, 대다수 군벌들은 항일 전쟁의 구심점인 장제스 아래로 뭉쳤다. 전쟁 초기의 비참한 패배도 중국의 통일에 도움이 되었다.
중국의 가장 근대적인 인력과 기술이, 일본군을 피해서 그동안 닫혀 있었던 내륙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국민당 권력이 가장 닿지 않던 곳이었던 쓰촨과 충칭은 중국에서 가장 잘 조직된 정부를 갖춘 지역으로 변모했다. 난징과 상하이의 지식인들은 내륙 각지로 피난을 떠나며 거대한 중국의 내적 다양성과 통일성을 인식했다. 게다가, 일본을 몰아내며 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은 만주와 신장의 통제권도 되찾을 수 있었다.
2. 일상적 공간의 변화
전쟁이 중국인들의 일상적 공간을 바꾼 것은 전쟁의 두 번째 지리적 충격이었다. 전시 수도인 충칭에서 전쟁은 일본군의 끝없는 공습으로 받아들여졌다. 낮에 일을 하다가도 공습 경보가 울리면 언제든지 방공호로 들어가야 했다. 이는 수천명이 공습 한 번에 몰살당하는 비극으로 인해 형성된 전시의 새로운 생활 패턴이었다. 전쟁의 경험은 공산당 체제 하에서도 지속되어 도시 생활을 형성했다. 직장과 거주지를 일치시키는 단웨이(단위; 單位) 시스템은 공산주의적 방식임과 동시에 공습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고 생산에 차질을 빚지 않게끔 하려는 의도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도시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은 곳은 농촌이었다. 충칭의 중심지를 제외하고 국가의 시스템이 붕괴한 농촌에서는 엄청난 혼란이 찾아왔다. 그중 가장 심각한 두 사건은, 장제스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댐을 터트리면서 발생한 황허 대홍수와 전쟁 수행을 위해 곡물을 징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허난성의 대기근이었다. 기근은 전쟁 이전에 유지되던 지역 간 교역이 끊어지면서 북중국 곳곳에서 특히 자주 발생했다.
전쟁의 참화에 휘말린 곳에서 농촌 사회는 파괴되었고, 국민당 정부에 대한 불신도 널리 확산되었다. 전쟁의 고통은 농촌 지역, 특히 큰 고통을 겪은 북중국을 공산주의 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양쪽은 대중 동원을 일상화했는데, 이 경험은 마오쩌둥의 중국이 신속하게 공산주의 경제 정책들을 실시할 수 있게 해줬다. 국민당의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공산당의 신중국을 위한 새로운 지리를 도시와 농촌 양쪽에서 창출했다.
3. 고립된 ‘중국’이라는 ‘신화’: 전쟁 중 중국과 주변국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중일전쟁이 중국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국민당이 중국의 서남부에 근거지를 두었기 때문에,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졌다. 일본이 유럽 제국을 위협하기 전까지, 중국은 베트남과 버마를 통해서 저항을 위한 물자를 공급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와 버마를 점령한 것은 유럽 제국에 대한 공격임과 동시에 중국에 대한 공격이었다. 중국군은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버마 전선에 나가 싸웠고, 인도 또한 작전 영역에 포함되었다.
동남아시아만큼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만주도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일본이 이 지역에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고 막대한 산업화 투자를 단행하면서 만주는 전쟁 이후 중국이 얻을 최고의 전리품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만주에서 지정학적 이익을 취하려는 스탈린과, 만주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게 된 공산당은 장제스의 바람을 무너뜨렸다. 베트남, 버마, 인도,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와 극동, 몽골과 만주가 중일전쟁에서 관여한 모습을 보면 중국이 유라시아에서 고립되었다는 일반적 이미지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책에서 소외된 전쟁 당사자 일본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전쟁 당사자이자 가장 큰 외국 세력인 일본이 책에서 간략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아쉽다. 물론, 미터는 일본의 전쟁 동기와 그들의 군사적 행동, 그리고 그들이 중국에 저지른 만행을 상세히 소개한다. 하지만 서술의 초점이 중국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일본이 전쟁의 핵심 당사국으로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비인격적인 자연재해처럼 그려질 때가 많다.
중국군의 여러 야전 사령관과 맞섰던 일본군 사령관들, 혹은 중국의 혹독한 전장을 경험한 병사들이나 전황을 기록한 기자들, 도쿄의 전략가들의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은 중국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일본에 관한 서술이 부족함을 책의 결정적 단점으로 지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본의 전쟁 경험이 상세히 묘사되면서 그것이 중국의 항전과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종합적으로 다루어주었다면, 이 책은 동아시아 현대사를 다룬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들어가는 데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전쟁을 둘러싼 중일 양국의 첨예한 ‘기억 전쟁’을 고려하였을 때 일본을 비교적 단순하게 묘사한 것은 미터의 현명한 전략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남겨진 질문
종합하였을 때, 중일전쟁은 오늘날의 중국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전쟁의 주역이자 연합국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이 장엄한 승리와 끔찍한 비극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더 넓은 아시아의 맥락에서 위치시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중국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곧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독자에게 새로운 질문을 계속 던져준다는 것은 좋은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이 책이 명시적으로든, 혹은 암묵적으로든 던져주는 여러 질문들에 계속해서 답을 찾는 과정은 제2차 세계 대전과 현대 중국,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모두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주로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첫째는 지역 간에 차별화된 전쟁 경험이다.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와 점령 지역이었던 동부, 항전의 중심지였던 서남부와 공산당 세력의 근거지였던 서북부는 모두 전혀 다른 경험을 하였다. 이러한 경험, 특히 일본군의 점령이 만들어낸 유산과 그것을 다루는 전후 중국인들의 선택은 마오쩌둥 시대, 나아가 오늘날까지 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둘째는 중일전쟁을 넘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더욱 넓은 시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역시 소련의 후방 기지가 되면서 충칭, 쓰촨과 비슷한 종류의 경험을 했다. 영국군과 소련군이 점령한 이란은 테헤란 회담의 무대가 됨과 동시에 주둔군이 유발하는 사회적 불안정을 겪었다. 태평양 전쟁의 핵심 전장이었던 동남아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일본과 연합국 사이를 오가며 독립을 준비했다.
이제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서구 열강들의 총력전을 넘어, 비서구 세계에 막대한 충격을 주고 종국적으로 탈식민화 과정을 촉발시킨 사건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래너 미터의 『중일전쟁』(원제: 잊혀진 동맹; Forgotten Ally)는, 연합국의 가장 영웅적 아시아 동맹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새로운 이해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divide style=”2″]
[box type=”note”]
이 글은 필자의 양심과 자율성에 바탕한 서평으로 출판사와 관계 없습니다. 물론 출판사 서평이 잘못이라는 건 전혀 아닙니다. 슬로우뉴스는 널리 함께 읽을 가치가 있는 ‘좋은 글’이라면 그 작성자가 누구든 제약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글읽기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경우에는, 물론 기우겠습니다만, 이렇게 굳이 사족을 남깁니다. (편집자)
[/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