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때 읽기 시작한 책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다. 한국에 번역 출간된 지 2년[footnote]이 글이 쓰여진 시점은 2017년입니다. (편집자) [/footnote]이 넘어가는 동안 모종의 반항심이 생겨서 안 읽다가, 주변 지인이 [호모 데우스]가 그렇게 재밌다고 해서 [사피엔스]도 읽어보기 시작했다. 왜 그런 하릴없는 반항심을 가졌는지 후회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다.
농업이라는 ‘선악과’
아직 책을 다 읽진 않았기 때문에 [사피엔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대신 [사피엔스]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내용으로 시작해보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 역사의 허구성을 준엄히 고발한다. 여기서 역사는 선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역사, 그러니까 농업이 만들어지고 인류가 정착한 뒤에 일어난 일을 뜻한다. 이 과정 자체가, “최초의 풍요 사회”였던 수렵채집사회라는 에덴 동산에서 고된 노동과 치주질환, 전염병, 기근이 지배하는 농업 사회로 인간을 몰아넣은 ‘선악과’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수렵채집사회는 성을 억압하지도 않았고, 다양한 식단을 먹을 수 있었으며, 그래서 기근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전염병도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조금 더 안정적인 삶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밀을 지배하면서, 아니 반대로 밀에 지배당하면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활방식에 맞지 않은 농업문명으로 넘어가야 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있다. 수렵채집사회는 농업 사회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기에, 일을 덜 하고 전염병과 치주질환에 시달리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해 두개골이 전시될 확률은 더 높았다. 또한 일단 농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되돌리기란 힘든 일이 되었다.
하라리 본인도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인구가 100명에서 110명으로 증가하여 사회에 부담이 더 늘었다고 10명을 굶어죽일 것인가? 농업이 인류 역사의 사기였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그것은 우리 조상이 택한 최적의 사기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농업이 낳은 또 다른 자식, ‘불평등과 계급’
그러나 이런 식으로 우리 문명의 기반이 되어준 농부들에게 허겁지겁 경의를 표해주어도, 하라리가 지적한 농경의 달갑지 않은 결과는 하나가 더 있다. 바로 불평등과 계급의 출현이다. 인간은 더 안정적으로 식량을 수급하고 식량이 모자랄 때에 대비하고자 농업이라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막상 농업을 지속하고 보니 식량을 비축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농부의 허리가 휘는 노동의 산물은 귀족이니 왕이니 하는 사람들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은 따지고보면 모두 평등했던 수렵채집민들의 후손이었는데 말이다. 왜 인간은 이런 불평등을 용인하고 또 믿게 되었을까?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그것은 잉여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한 농업사회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식량생산이 늘어나면 인구가 더 늘어난다. 더 많은 인구는 더 많은 식량을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가 더 큰 단위로 협동해야하고, 사회가 더 고도의 정치 조직으로 발전해야한다. 그래야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 데 도움을 줄 공공사업, 예컨대 관개수로를 파는 인부들을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 조직이 인부들을 조직해 공공사업을 추진하면 이 인프라가 식량생산을 자극하여 인구는 더 늘어난다. 이 과정이 수십번 수백번 반복되다보면 마을 원로들이 부족의 대소사를 논하던 150명의 공동체는 왕이나 황제의 지배를 받는 수천만명의 대제국으로 커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굉장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그림은 확실히 다이아몬드가 제시하는 방향이 타당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중간에 이야기가 너무 빈다. 그 왕이라는 자가 사회를 조직하는 구심점이 되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받는 대우는 그 역할을 넘어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생존에 필요로 하지 않은 화려한 장신구를 수입해오느라 몇 백 km 바깥까지 교역을 해야하는 이유, 식량 생산과 전혀 상관 없는 왕비의 거대한 무덤을 지어야 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단 말이다. 그가 왕이 되기 위해서 기울인 노력은 고작 왕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것밖에는 없다. 귀족도 마찬가지다.
수렵채집 사회가 농경 사회보다 일은 덜하고 폭력은 더 심했던 것처럼, 이러한 불평등도 농경 사회의 고유한 특징이다.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마을 원로들이 존경을 받긴 했지만, 이는 그들이 오랜 세월을 살면서 축적해온 지혜와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존경을 받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히 원로의 아들이 원로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그에 걸맞는 능력을 입증해보여야만 했다. 심지어 능력을 입증해보여도 부족 구성원들은 그가 다른 구성원들을 억지로 통제하려 드는 권력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공개적 망신을 주곤 했다.
그런데 왜 우리 조상들은 농경과 함께 이런 세습적 불평등을 용인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날 때부터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이야기가 말이 안 된다고 고개를 젓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그런 믿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런 불평등에 저항한 사람들은 과연 없었을까?
세습적 불평등, 왜 언제부터 받아들였을까?
켄트 플래너리와 조이스 마커스의 900쪽짜리 책 [불평등의 창조]는 이런 빈자리를 채워주는 책이다. 모두 미시간 대학교 교수인 저자들은 사회인류학과 고고학이라는 도구로 지구 위에 존재했던 수많은 인간 사회의 모습과 다채로운 불평등의 모습들을 그려서 보여준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 두 학문은 그동안 충실히 협력한 적은 없지만, 제대로 협력만 된다면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메워줄 수 있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2″]사회인류학[/dropcap]은 멀게는 16세기 예수회 선교사의 기록부터 가깝게는 20세기 뉴기니 사회의 기록까지 문자를 가진 문명들이 관찰한 다종다양한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 기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째는 농경민과 그들이 세운 제국이 너무 효과적으로 수렵채집민을 몰아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은 수렵채집 사회의 상당수가 인류의 보편적 경험과는 거리가 있는 사막이나 극지의 척박한 환경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이미 그런 얼마 안 남은 수렵채집사회들조차도 문명 사회와 접촉되어서 받은 영향 때문에 전통적 사회논리에 얼마간 변형이 생겼다는 점이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2″]고고학[/dropcap]은 대신에 수렵채집 사회 혹은 초기 농경 사회의 원래 모습들을 충실히 보여준다. 그러니까, 문자를 갖고 무장한 군대를 끌고 들어온 농경민들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모습들 말이다. 1만년 전에 북미 초원에서 번성하다가 사라진 인디언의 유적지는 그런 영향과 확실히 동떨어져 있는 곳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으니, 유형의 증거만 제한적으로 남기는 고고학은 사회와 문화의 내용물을 재구성해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몇몇 증거로 불평등의 단계를 칼로 자르듯 구분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러기엔 힘든 복잡미묘한 문제가 있다. 어떤 고대 도시에서 화려한 무덤이 여러 개가 발견되었다면 이는 왕과 그 친족들의 무덤인가? 아니면 도시를 공동통치하는, 서로 다른 씨족의 과두제 공동통치자들의 무덤인가?
따라서 사회인류학과 고고학의 자료들의 장점을 합치면 그 약점을 상쇄할 수 있다. 고고학에서 모자란, 그 사회의 소프트웨어들을 사회인류학으로 채워넣고 사회인류학에서 모자란 엄청나게 방대한 각양각색 인간 사회의 데이터베이스를 고고학으로 채워넣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8천년 전 고고학 자료와 200년 전 인류학 기록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경험적 법칙으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저자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작업이 바로 이것이었다.
최초의 사회, 모두가 평등한 ‘자연상태’
그렇게 저자들은 최초의 인류들이 살았을 법한 자연상태의 사회를 재구성해낸다. 이는 가장 평등한 사회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쪽 끝에는 아스텍이나 아카드의 제국처럼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놓여있다. 그리고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이 이런 불평등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해내는 사회논리의 변화를 추적하면서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최초의 사회 형태, 즉 루소가 말한 “자연상태”는 모두가 평등했다. 다만 힘과 민첩성, 지능 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고, 여기서 약간의 불평등이 발생했다. 누군가는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사냥을 잘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최초 평등사회의 사회 논리는 능력의 차이에 따라 발생한 불평등마저도 효과적으로 억제했다. 왜냐면 끊임없이 이동하는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재산 축적이 힘들었고, 모든 식량은 후일을 위해 자신만의 것으로 남겨두기보다는 모두를 위해 베푸는 것이 훨씬 유리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두에게 베풀어두면 내가 어려울 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좋았다.
이를 정당화한 것은 자연상태 사회의 사회논리였다. 우선 그들은 모든 인간 개체를 포함해서 만물에는 고유한 생명력이 깃들어있다고 보았다. 그중 몇몇은 특별한 생명력을 가졌다. 자신들을 창조한 천상의 영혼, 또 천상의 영혼들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들, 조상들이 그랬는데 이들은 알게 모르게 인간 집단을 도와주고 때로는 처벌하며 자연계의 질서를 구성했다.
한편 개인들은 덕의 차이가 있었는데, 이는 나이를 먹으면서 쌓을 수 있었고 젊은 남성은 통과의례(성인식)를 거치면서 마찬가지로 덕을 쌓았다. 그리고 넉넉한 인심을 베풀면 덕을 쌓을 수 있었다. 물론 호의를 받으면 그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했다. 갚지 않으면 집단에서 놀림 받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한편으로 이들에게는 영토에 대한 논리도 있었다. 먼저 온 사람이나 집단은 나중에 온 사람이나 집단보다 그 장소에 우선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자연상태의 집단들 중 몇몇은 조금 더 확대된 사회연결망 전략을 발전시켰다. 씨족이라고 불리는 친족 네트워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씨족들은 더 다양한 문화적 의식과 전례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었으며, 미술, 의식, 춤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고고학 증거들도 덩달아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씨족들은 각자의 통과의례가 있었고, 그 통과의례를 거쳐가야지만 부족의 비밀스러운 세계관을 알아내어 덕을 쌓을 수 있었다. 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동년의 미혼 남자들을 모아놓은 남자 숙소였다. 동시에 씨족의 등장은 “우리 대(vs.) 저들”이라는 논리에 무언가 실체를 부여해줬다. 씨족 간 자원이나 영토를 둘러싼 습격 또한 이전보다 흔해지게 된다.
불평등의 시작, 농경
빙하시대가 끝나자 이 두 가지 사회형태를 넘어선 또 다른 사회형태가 등장했다. 기후가 온화해지자 몇몇 유리한 위도대에 있던 집단들은 주변의 야생동식물을 길들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유발 하라리가 고발했던 그 농경이었다. 누차 강조했듯이 이렇게 농경이 시작되자 불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징검다리가 등장했다.
식량을 확보한 자리에서 즉시 소모해야 했던 수렵채집민의 즉시보상체계는 장기적인 시간대에 식량 확보를 계획하고 소비해야 했던 농경민의 후일보상체계로 대체되었다. 이런 사회들에서는 식량을 모두 공유하고 후일 다른 이들이 공유할 때 보답 받는 교환체계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노력이 곧 후일에 돌아올 자신의 식량으로 명확히 전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과 기반 사회”에서는 야망이 있는 개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관찰된다. 남들보다 훨씬 더 덕을 쌓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수렵채집 사회의 사회 논리를 비틀면 분출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은 습격을 조직해서 다른 씨족의 머리를 베어오는 일을 잘했다. 그러면 베어온 머리만큼 덕과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아니면 다른 부족과 교환 네트워크를 잘 조직해서 각종 신기한 사치품들을 씨족에 제공할 수 있었다. 이것도 덕을 높이는 활동이었다. 아니면 정말 큰 잔치를 베풀 수도 있었다(그러나 씨족 원로들의 회고로 미루어보아 이는 식민 정부가 전쟁과 습격을 억제해서 나타난 대안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명망을 획득한 “빅맨”들은 존경을 받았으며 발언권도 상당했다.
그리고 구성원들의 덕이 점차 차이를 보이게 된 성과 기반 사회에서는 미혼 남자 숙소의 모습도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사회에서는 규모가 커지고 포괄적인 남자 숙소가 등장했다. 또 다른 사회에서는 작고 배타적인 형태로, 씨족의 비밀을 자격을 갖춘 이에게만 은밀히 전승하는 남자 숙소가 등장했다. 후자의 사회일수록 불평등의 정도가 더 컸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한편 성과 기반 사회에서는 계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위에서뿐만 아니라 아래에서도 등장했다. 다른 이가 준 선물에 보답하지 못하면, 그는 그에 책임을 져 노예에 준하는 위치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노예 계급으로 굳어진 것까지는 아니었다.
항구적 불평등, ‘지위 사회’의 탄생
성과 기반 사회의 명망가는 아직 세습할 수 있는 지위를 갖추지는 못했다. 명망가의 자식은 명망가의 전략을 참고만 할 수 있었고, 그가 명망가로 대접 받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그의 능력과 덕을 입증해보여야만 했었다. 그러나 사회 논리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덕에 현저한 차이가 생길 수 있는 것을 용인하자 몇몇 사회에서는 다른 사회 논리도 연달아 바뀌었다. 명망가와 부채 노예가 있다면 항구적 귀족 계층과 항구적 노예 계층으로 이행할 재료가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세습 지위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었고, “지위 사회”가 나타나게 된다.
지위 사회가 이전의 사회들과 가장 다른 점은 지위 그 자체에 있지는 않았다. 침팬지 사이에서도 우두머리(알파 메일)가 존재하여 구성원들을 통제한다. 높은 지위는 그만큼 높은 책임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 질서 있는 행동을 위해선 권위가 필요하기도 한 법이다. 또 확실히 높은 성취를 이룬 사람이 높은 지위를 갖는 것은 타당해보인다.
그러나 세습으로 가면 다른 문제가 된다. 침팬지 집단은 구성원 대부분이 알파 메일을 자식일 경우는 있을지라도, 알파 메일의 자식만 알파 메일이 되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세습 지위는 확고하다. 아무리 못나도 귀족 자식은 귀족이고, 아무리 유능해도 노예의 자식은 노예다. 귀족의 자식은 태어나서 숨만 쉬어도 몸이 부서져라 노동한 평민보다 고결하다.
문제는 이런 불합리하고 불공정해보이는 관례가 정착했고 심지어 그 피해자들에게마저도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바로 전(이라기에는 좀 길긴 하지만)에는 유능한 사람이 높은 성취를 이루어도 지배자가 되지 못하도록 일부러 조롱하고 면박을 주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말이다.
엘리트 세습의 정당화 논리
지위 사회의 엘리트 세습이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사회논리가 어떻게 바뀌어야 했을까? 이를 위해선 최초 평등사회의 위계 구조를 손봐야만 했다. 부족을 수호해주는 정령과 신, 그리고 조상들은 구성원 모두를 연결해주는 매개물이었다. 사회 규범을 강제할 권위도 거기서 나왔다. 그리고 성과 기반 사회에서 누군가는 명망을 획득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정령의 뜻이었다. 정령이나 악마가 특정 명망가를 후원하고 있기에 그는 더 높은 덕을 쌓을 수 있었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지위 사회로 이행하게 되면, “애초에 그들은 정령이 만들어준 더 고결한 핏줄과 영험한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날 때부터 덕이 높다”로 바뀌게 된다. 구전 전통으로 전승되는 문자 이전 사회의 세계관은 이런 식으로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창조 설화부터 전설까지 모든 것을 유연하게 바꾸기 좋다. 그렇게 지위 사회는 족장 가문을 만들어내며, 남자 숙소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신전으로 점차 변모한다.
족장들은 세 가지 수단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했다. 하나는 그들의 타고난 생명력이었다. 전쟁을 지휘하고 큰 승리를 얻어서 이를 더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둘째는 군사지도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수공예품 같은 사치품 기술과 그에 대한 후원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족장들은 종교 차원에서 이 세 원천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고, 그들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런 족장들의 생명력은 너무나 엄청나서 그가 턱짓만 해도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또 죽을 때는 혼자 죽는 법이 없어 수십명, 때로는 수백명의 사람들을 무덤으로 같이 끌고 들어갔다.
지위 사회의 경쟁 그리고 ‘왕국’의 탄생
이런 족장이 한 지역에 하나씩만 있다면, 그 사회는 비교적 평화로울 것이었다. 강력한 족장의 권력이 구성원들을 통제하고 공공사업을 집행해 식량 생산을 촉진했으니 이전보다 더 번영할 수도 있었다. 이러면 세습 지위를 어느 정도 용납해주는 식으로 거래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런 지위 사회는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 지역에서는 복수의 지위 사회가 생겨나 서로 경합했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조직화된 전쟁 활동을 벌였다. 그런 경계지대는 아무리 풍요로운 곳이라도 잦은 습격 때문에 무인지대가 되곤 했는데, 기존 지위사회에서 쫓겨난 엘리트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공간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중 몇몇은 다른 지위사회를 압도할 혁신을 이루거나 놀라울 정도의 정치적, 군사적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이는 새로운 농경법이 될 수도 있었고, 외부와의 교역루트 개척일 수도 있었고, 새로운 전쟁 수단의 발명 혹은 확보가 될 수도 있었다. 여하튼 그렇게 주도권을 잡은 지위 사회의 엘리트는 계속된 전쟁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고 영토를 늘려나갔다. 그런데 어느 임계점을 넘자, 지위 사회의 관리원칙인 3단계 행정(족장-부족장-하급관리와 촌락)의 관리 역량은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해졌다.
다른 지위 사회를 제압한 승리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왕국은 3단계 행정을 넘어선 4단계 행정의 사다리를 만들었다.
- 우선 왕이 있고,
- 그 밑에 왕의 친족이나 신임하는 귀족으로 구성된 지방총독이 있으며,
- 그리고 그 밑에 부족장(sub-chief)이 있고,
- 마지막으로 하급관리와 촌락이 있다.
이 중 지방총독이 있던 2단계 행정 중심지에는 왕국의 모태가 된 지위 사회의 문화가 이질적으로 튀어나온 건물들이 있다. 표준화된 하향식 행정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국(혹은 과두제 국가)은 지위사회보다 더 큰 단위로 사람을 동원할 수 있었고, 주변 지위사회들을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잔인하게 흡수해갔다. 그런 과정이 계속 이어지자 다른 지위사회들은 주변 왕국에 맞서기 위해서 단합하게 되었고, 최초의 왕국이 생기면 주변에 연쇄적으로 다른 왕국들이 들어서게 된다.
‘제국’의 탄생과 불평등의 확장
그리고 이 왕국들 간의 경쟁마저도 승리하여 토너먼트의 정점에 오르는 이들마저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들은 아스텍, 잉카, 중국 등 숱한 제국의 황제들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왕국과 제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떤 한 개인이 폭발적 위업을 이루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위대한 이들은(또는 누군가에게 잔인한 압제자들은) 그 이전의 덜 위대한 이들이 만들어놓은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너면서 위업을 달성해나간다.
아카드의 사르곤은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사람으로 지목되지만, 그 전에 메소포타미아부터 지중해까지 지배했다고 하는 루갈자기시 왕이 존재한다. 하와이 최초의 왕 카메하메하도 그 선대 왕들에서 이어져오는 하와이 제도 통일의 역사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이지 진공에서 하와이를 통일하지 않았다.
이런 왕국과 제국들에서는 불평등이 더욱더 다채로운 층위로 확장되었다. 평민 사이에도 숱한 위계들이 설정되었고, 남녀의 차이도 부각되었으며, 계급에 따른 수많은 금기가 도입되었다. 루소가 지적했듯이 평등하게 태어난 인간이 어디를 가나 예속된 상태에 메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모두 이를 자연의 섭리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귀족들의 견제에 신물이 난 왕들은 몇몇 유능한 평민을 기용해서 심복으로 활용하였고, 이는 계층 상승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유능한 평민들은 종종 군사적 모험에서 자신의 독보적 기량을 입증하며 왕의 눈에 들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왜냐면 그 승리한 군사적 모험에서 적국의 많은 엘리트는 하층민으로 전락했을 것이며 포로들은 노예가 되는 하향이동 또한 광범위하게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질문, 어떻게 불평등에 대처할 것인가
이것이 두 고고학자와 인류학자가 900페이지에 걸쳐 수많은 사회인류학과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보여준 ‘불평등의 창조’ 과정이다. 책의 말미에 저자들은 불평등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고 하면 두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말했다. 첫째, 인간 사회가 어떻게 불평등해졌느냐는 문제다. 그것이 내가 요약한 이야기다. 둘째, 그 불평등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사실 나는 앞의 방대한 설명에는 감탄했어도 여기서는 별다른 깊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저자들은 다른 불평등한 사회의 논리들은 모두 용인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세습만큼은 사실 용인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유명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그들의 생명력과 기량을 입증해서 엄청난 돈을 긁어모은다. 문제는 그것이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렵채집민이었으면 이들의 성취가 사실은 별 것 아닌 것이라고 조롱하고, 그들의 재산을 사회를 위해 탈탈 털어놓도록 압박을 가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확실히 이는 타당한 설명일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여간 무언가를 남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했고, 다른 사회구성원들로부터 납득 가는 위업을 쌓아야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고 단지 태어나서 숨만 좀 쉬었다는 이유로 그런 존경을 받는 것은 확실히 불합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구미에 당기는 흥미로운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해법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세습이 더 은밀해졌기 때문이다.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조상과 정령이 보살펴줘서 더 고결한 혈통을 타고났다는 식의 어설픈 논리는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대신 대부분 높은 성취를 이뤘다는 “부잣집 아이들”은 스스로 ‘나름의 노력’했다고 주장한다(사실 나도 마찬가지긴 하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더 좋은 대학교 학위는 입시 경쟁에서 능력을 입증한 결과이고, 더 좋은 경제적 지위는 경제 전선에서 무공을 입증한 증표다. 과거 성과 기반 사회에서 두개골 사냥으로 얻어낸 생명력은 이제 통장 잔고로 표시된다.
그러나 노력이 상당 부분 개입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세습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또 힘들다. 집안 소득과 자산이 많을수록 그 자녀가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유리하다면, 그 치열한 경쟁이라는 것은 귀족들끼리 왕위를 노리고자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경쟁과 같은 것이 아닐까. 바로 이 애매함이 정치적인 해법을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자신의 노력은 들어갔지만, 전적으로 노력만 가지고 되는 것은 없으며 또 좋은 조건이 세습되었지만, 세습만 가지고 그런 지위를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 현대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능력 본위 사회)의 모순이다.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해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부유한 이들이 과학의 힘을 빌려 정말로 평범한 이들과 다른 어떤 존재로 거듭난다면 고귀한 피의 허구성은 정말 실체를 갖게 되는 셈이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vs. 믿음은 그 시대가 조정한다
먼 미래의 역사학자는 그때가 되어서야 불평등이 진정으로 창조되었다면서 새로운 내용의 “불평등의 창조”를 탈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평범한 이의 후손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니면 이제 ‘호모 금수저쿠스’와 ‘호모 개돼지쿠스’는 너무나 다른 존재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평등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고, 대신 금수저끼리, 또 개돼지끼리는 완벽한 평등이 만들어졌으니 “평등의 회복”과 같은 책이 나오고 있을 수도 있다(아마 이건 부유한 이의 후손이 쓸 것이다).
물론 뭐가 어찌될지는 가 봐야 아는 일이긴 하다. 그리고 다시 유발 하라리로 돌아가보자. 그는 인간이 막대한 힘을 얻는 건 잘하지만, 그 힘을 행복으로 전환시키는 것에는 능숙하지 못하다고 했다. 따라서 이제 전례 없는 힘을 얻게 된 인간이 진정으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하지만 이언 모리스는 [가치관의 탄생]에서 이에 섬뜩하게 들릴 수 있는 말로 답한다. 사실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싶어하는지와 상관 없이, 그때가 되면 우리는 그에 맞춰서 우리의 믿음을 조정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농경이 시작되고 지위 사회가 만들어지자 세습의 불합리성에 저항했던 이들은 사라지고, 고결한 혈통의 존재를 믿는 이들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산업 사회가 밝아온 뒤에도 고결한 혈통을 믿는 이들은 사라졌다. 그 대신 평등한 인간의 권리를 믿는 이들이 살아남아 번성했다. 그 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지금 인간이 알 수 있는 건 그저 가능성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