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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혐오, 강간, 동성애
-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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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인도 북부(지금은 파키스탄)에서 이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고대 문명의 유적이 발굴된다. 도시 가운데 큰길을 중심으로 튼튼한 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으며, 도시를 두른 외벽 길이가 5km에 달하는 이곳에는 대략 3만 5,000여 명 정도가 거주할 수 있었다. 특히 인더스 강물을 끌어다 쓰기 위한 관개수로망까지 구축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유적이 모헨조다로(기원전 2,600년경 건설된 인더스 문명의 고대 도시, 현 소재지는 파키스탄 ‘신드 라르카나’)와 하라파(기원전 3,300년부터 기원전 1,600년까지 존재했던 당시 전 세계 최대인 4만 여명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도시. 현 소재지는 파키스탄 펀자브주)에서 똑같이 발굴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두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도시유적들을 통틀어 ‘인더스 문명’이라고 이름붙였다.
1차 아리안족의 이주
인더스 문명은 BC 2,500년부터 BC 1,500년까지 번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500년 뒤 꽃을 피운 인더스 문명은 공예와 야금기술이 뛰어났으며, 배를 타고 수메르와 이집트까지 오가며 교역했다.
인더스 계곡에 자리한 도시 문명에서 기이한 점은, 이들 도시 안에 거대한 궁전이나 사원 같은 건축물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은 벽돌로 지은 공중목욕탕이다. 하라파에서 발굴된 무덤을 보면 남자나 여자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라파에서 발굴된 눈에 띄는 유물로는, 인류 최초의 링감-요니 조각이 있다. 링감(lingam; 남근)과 요니(yoni; 자궁 또는 질, 음문)는 남녀의 성기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신성한 돌조각상으로 생식력과 번영을 상징한다. 또한, 인간을 닮은 무수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어머니 여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인더스 문명은 500개가 넘는 그림문자로 이루어진 고유한 형태의 문자체계를 발명하여 사용했다. 하지만 이들의 문자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을 만큼, 당시에도 글자를 배우고 사용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도시에 거주하는 고등한 문명인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산스크리트(sanskrit)라는 말은 ‘신성하고 순수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와 철학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은 이야기를 공유했는데, 이것이 바로 베다(Veda; 힌두교 지식의 원천이나 신앙의 전거로 여겨지는 경전이자 문헌)의 원작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명인들은 사실 처음부터 이곳에서 거주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1만년 전쯤(BC 8,000년) 메소포타미아에서 넘어온 아리아인 혈통의 이주민 또는 침략자였다. 원래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이들은 도시 밖 열등한 주거지역으로 쫓겨나 살거나 남쪽으로 밀려내려갔다.
인더스에서 도시 밖에서 살던 이들은 ‘나가’(Naga)라고 불렸는데, 나가는 ‘뱀’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뱀을 숭배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뒤엉켜 있는 코브라 형상의 공예품들이 다량 출토된다. 또한, 남쪽으로 밀려내려간 피부색이 검은 이들은 ‘드라비다’라고 불렸다. 드라비다사람들은 모계상속원칙을 따랐다. 드라비다의 문화는 인도의 토착신앙과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예컨대 나무에 대한 신앙, 더 넓게 모든 식물에 대한 깊은 신앙이 바로 드라비다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2차 아리안족의 이주
BC 1,500년 무렵 히타이트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통일하면서 이곳에서 밀려난 억센 전사들이 이란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 이후 200년 동안 새로운 아리아인들이 계속 밀고 들어왔고, 이전에 자리잡고 있던 이들(인더스 문명)은 모두 노예로 전락한다.
새로운 아리아인들은 당시 보급된 초보적인 형태의 알파벳도 가지고 들어온다. BC 18세기경 그리스로 알파벳이 전파되고 1,000년이 지난 뒤 [일리아스]가 등장했듯이, BC 15세기 인도로 알파벳이 전파되고, 1,000년이 지난 뒤 인도에서도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다.
새로운 정복자들은 산스크리트어에 맞게 알파벳을 변형했는데, 이것은 ‘브라흐미’ 문자라고 불린다. 그들은 기존에 전승되던 베다를 브라흐미 문자로 기록하였고, 동시에 자신들의 호전적인 가부장문화와 영웅서사를 곳곳에 삽입했다. 리그베다,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 등 인도의 고대 서사시들이 바로 이때 탄생한다.
두 얼굴의 창조신화
베다 문학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이전의 평등한 문화의 흔적이 이야기 속에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예컨대 여자들이 상당한 권력과 재산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유롭게 축제나 종교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는데, 마하바라타의 여주인공 드라파우디(Drapaudi)는 오형제를 한꺼번에 남편으로 거느리기도 했다. 또한, 가장 뛰어난 현인으로 여성이 등장하기도 한다.
창조신화 역시 여러 가지 버전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폭풍과 비의 신 인드라(Indra)가 우주의 물을 다스리는 최초의 어머니 물뱀 브리트라(Vritra)를 죽인 다음 시체를 난도질하여 세상을 창조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누가 봐도 마르두크가 티아마트를 살해하는 바빌로니아의 창조신화를 그대로 가져와 이름만 바꾼 것이 명백하다.
이와는 정반대로 여성 중심 세계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매력적인 창조신화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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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생산자는 원래 남자와 여자가 꼭 껴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교합을 하기 위해 이 생산자는 둘로 갈라진다. 이로써 남편(pati)과 아내(patni)가 생겨났다. 따라서 한쪽 자아는 전체의 절반에 불과하다. 남편은 아내와 결합했고, 이로써 인간들이 태어났다. 아내는 곰곰이 생각한다.
‘서로 한 몸이었던 우리가 또 어떤 방법으로 결합할 수 있을까?’
아내는 암소로 변신했다. 남편도 황소로 변신하였고, 또 두 사람은 결합했다. 이로써 송아지들이 태어났다. 아내는 암말이 되었고 남편은 숫말이 되었다. 그러고나서 망아지들이 태어났다.
이들은 유혹의 춤을 계속 추면서 이 세상을 온갖 생명으로 채워놓았다. 우주를 창조하는 거대한 춤을 끝내고 생산자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세상을 창조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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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멋진 이야기 아닌가? 원죄도 없고, 누군가를 비난하지도 않고, 불복종도 없고, 치욕이나 타락도 없고, 처벌도 없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불안에 휩싸이는 아이들도 없을 것이다. 뱀도 저주를 받지 않고, 여자가 만악의 근원이 되지도 않는다. 누구도 낙원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살인이 없다. 또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 더 나아가 만물을 창조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주도하는 것은 여자다.
베다는 살아있는 만물이 신의 ‘피조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물은 그 자체로 신의 ‘현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세계관에는 이원론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인도에서 우주는 곧 신이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이에 비해 서양의 세계관에서 신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지극히 위대한 존재이며, 그가 빚어낸 피조물이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존재다. 신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 이유다. 유일신이라는 개념 역시 ‘나와 너’라는 이원론 위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가부장제의 정착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아인들의 사상과 문화는 인도의 전반적인 관습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예컨대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는 믿음에 기반하여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낸 ‘카스트’라는 개념은 개개인에게 완벽하게 주입되어, 지금까지도 완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함께 태워죽이는 사티(산스크리트어: सती, Sati), 남자의 눈에 띄지 않게 여자를 격리하는 푸르다(Purdah), 여아살해 같은 풍습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마침내 BC 300년경, 아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지배 규범을 정리한 마누 법전을 만들어낸다. 마누법전은 여러 측면에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를 기본원리로 삼고 있는 마누법전은, 함무라비법전과 마찬가지로 피지배계급과 여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목표로 한 법령을 담고 있다.
BC327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란 고원을 넘어 침공해오기도 했으나 인도 문명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1000년 뒤(AD 700) 아라비아에서 흥기한 무슬림 세력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를 점령한다. 이들은 인도를 500년 동안 통치했는 데 그 기간 동안 가부장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고대 인도의 여성친화적인 전통은 지금도 (특히 드라비다인들이 거주하는 남부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다.
‘베다 브라마니즘’에 도전한 사상과 종교
2차 아리아인들은 브라흐미 문자를 이용해 베다의 성스러운 이야기를 기록했지만, 실생활에서는 자신들의 방언을 사용하였다. 결국, 기원전 500년경 산스크리트어는 사멸한다.
아리아인이 지배한 지 1,000년이 지나고 사회 체제가 안정화되었을 때쯤, 힌두교는 온갖 토착신앙과 결합하며 신들도 무수히 늘어나고 브라민의 종교의례는 더더욱 은밀하고 복잡해졌다. 힌두교 교리도 다원화되면서 교리 자체가 모순되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대대적인 종교개혁이 필요한 상황이 도래했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베다를 숭배하는 신앙과 의례에 의문을 던지며 힌두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상가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논리적 사고가 융성하는 한편, 초인적인 수행관습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 사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과 합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예컨대 자이나(Jaina; ‘완전히 깨달은 자’)는 육체적 욕구를 모두 부정함으로써 영성의 지고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굶어 죽는 것을 위대한 승리라고 여길 정도로 극단적인 교리를 내세웠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다.
반대로 박티신앙(Bhakti cult)은 감각을 통해서만 신과 교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황홀경에 이름으로써 신과 교감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종교적 의례에서 원초적인 에너지를 마구 분출하는 춤, 노래, 고함지르기, 섹스를 행했다. 이들 역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붓다의 등장
기원전 563년 히말라야 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왕국의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자연의 고귀한 진리를 거부하는 ‘자아’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고통과 번민이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자아의 소멸’만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따라서 열반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열반(nirvana; 니르바나)’은 산스크리트어로 ‘소멸’이라는 뜻이다.
싯다르타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된다. 붓다(Buddha; 佛陀)는 ‘깨어난 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눈 앞에는 그에게 깨달음을 갈구하는 중생이 모여 있었다. 그는 결국 다시 보디사트바로 한 단계 내려와 이 땅에 머물며 중생을 가르치기로 마음먹는다. 보디사트바(Boddhisattva; 보리살타; 보살)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말로 ‘이제 곧 붓다가 될 사람’을 의미한다.
적막함 속에서 치열하게 자기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만이 얻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통찰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매달린다. 부모는 자식에 집착하고, 여자는 자신의 외모에 집착하고, 남자는 지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랑, 인기, 돈, 젊음, 건강, 재산, 명예, 궁극적으로 삶 자체도 시들고 변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통과 상실에 무심해질 수만 있다면 번뇌는 멈출 것이다. 욕망하지 않는 자만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관계와 열정이 주는 기쁨도 깨달음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하다.
이로써 붓다는 인류 최초로 무신론 종교를 세운다. 초자연적 영역에 사는 온갖 힌두의 신들을 모조리 내친다. 신이란 인간들이 거대한 망상 속에서 만들어낸 잡다한 요괴에 불과하다. 거룩한 의례, 사제, 기도, 악마, 천사, 신앙, 예배, 희생, 헌신, 기원, 정령, 화신 등 모든 것이 쓸데없는 헛것이다. 종교적 위계나 신분이나 의례는 모두 지배자들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승려들, 붓다를 신으로 만들다: 경전에 스며든 가부장제
왕궁에서 성장한 싯다르타는 당연히 문자라는 새로운 기술을 일찍이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탐구심이 대단했던 사람이었기에, 이른 나이에 읽고 쓰는 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붓다의 고차원적 깨달음 역시 글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훈련한 선형적 인지 방식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이나 설법을 절대 글로 남기지 않았다. 글자만으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로는 자신이 경험한 통찰의 진정한 모습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의 뛰어난 현자들이 모두 그랬듯, 붓다는 은유와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진리의 본질을 설명했다.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자신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정하고 관대하고 자비롭고 공손하고 용감했다.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라고 조언했다. 비폭력은 그가 주창한 교리의 초석이었다. 붓다는 평등의 원리를 설파했다. 한번은 매춘부와 함께 저녁을 먹어 제자들에게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붓다가 열반하자마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존하고 전파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르침은 대중이 따르고 실천하기 어려웠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 노력해야 한다면 누가 배우고 따르려고 하겠는가? 결국, 승려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간단하고 알기 쉽게 제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마는데, 그것은 바로 붓다를 신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이었다.
붓다의 말씀을 모은 최초의 팔리어 경전은 붓다가 죽은 지 500년이 지난 뒤 만들어진다. 500년은 정말 긴 시간이다. 팔리 경전이 만들어진 이후 2,000년 동안 불교는 무수한 종파로 갈라졌다. 문자로 기록된 뒤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이 말로만 전해지던 시간에는 어떠했을까?
무엇보다도 이 500년은, 인도 사회에 가혹한 가부장제가 뿌리내리는 기간이었다. 결국 경전을 작성하는 이들의 상당한 남성적 가치관과 편견이 교리 곳곳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컨대 승가 안에서 여자(비구니)를 제2계급으로 대하라고 했다는 붓다의 말씀도, 후대에 경전을 기록한 이들이 덧붙인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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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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