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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1.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2.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3.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4.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5.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6.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7.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 혐오, 강간, 동성애
  8.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9.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10.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11.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12.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13.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14.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15.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16.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17.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18.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19.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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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31일 정오, 무명의 수도사이자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 사제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95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의 한 교회 문에 게시한다. 이 사소한 행동이 역사를 바꾸는 종교 분열의 출발점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르틴 루터(1483-1546) 의 초상(루카스 크라나흐 작, 1528년)과 95개조 반박문의 일부

이 시기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오늘날 ‘신교’ 혹은 ‘개신교’를 의미하는 프로테스탄트는 저항하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저항’은 루터가 황제와 교황 등 가톨릭 권력자들 앞에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당당히 자신을 입장을 항변한 그 ‘저항’을 의미한다. – 편집자) 운동이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유럽에 새롭게 보급된 인쇄 기술이었다. 프로테스탄트는 팸플릿, 설교문을 빠르게 인쇄하여 곳곳에 퍼뜨렸는데, 그 속도를 가톨릭 교회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실제로 프로테스탄트 혁명의 핵심에는 바로 알파벳이 있었다. 신성한 책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누구에게 주어야 할까? 가톨릭 교회는 라틴어를 아는 소수의 고위 성직자들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황의 말은 곧 최종적인 선고였다. 중세 교회는 신약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고 해도 성경을 주지 않았다. 성서 필사본은 수도사의 책상에 쇠사슬로 묶어놓거나 캐비닛 안에 넣고 잠갔다.

중세 교회도서관에 쇠사슬로 묶여있는 책들의 모습. (소재지: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주 쥣펀)

성서를 이처럼 관리하다보니 서품을 받은 성직자만이 하늘나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교회의 주장이 통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여전히 진리였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가 주창한 프로테스탄트의 핵심 교리는, 개인과 하느님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복음중심주의’‘교황중심주의’, 편집자). 기독교도라면 누구나 성서를 직접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 고독한 행위가 그 자체로 하느님과 직접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모든 사람이 성직자”라고 선언한다. 누구나 자산의 판단에 따라 성서를 읽고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더 나아가 무수한 이미지로 채워진 교회와 화려한 의례를 반대한다. 수천 년 간 이어져 내려온 ‘문자 대 이미지’ 갈등이 다시 종교개혁의 핵심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사실 종교개혁이 내건 핵심 모토는 ‘성경으로 돌아가자’였지만, 실질적으로 그 운동의 본질은 ‘이미지 대 문자’가 되어버렸다.

루터, 준비되지 않은 혁명가

루터는 ‘교황의 무오류성’을,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문자의 무오류성’으로 대체한다. 형식적으로는 개개인에게 해석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그가 늘 좋아하고 강조했던 성경 구절은 대부분 자비롭고 애정어린 하느님이 아니라 복수심에 불타는 야훼였다. 신약의 복음서보다 분노에 찬 구약의 문장들을 중시했다.

루터가 신약에서 특히 좋아하던 구절은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였다(로마서1:17). 그는 이 짧은 구절을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소용이 없고, 오로지 믿음만이 구원을 안겨준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마르틴 루터 가족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있다. 아래 초상화는 루터의 부인 카테리네 폰 보라(Catherine von Bora)의 초상

루터는 마리아 신앙, 면죄부, 연옥, 성인, 교회법, 교황에의 권위, 제례를 집전하는 사제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성서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받들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 역시 성경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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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예정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대다수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지옥에 떨어질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중에서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받는데, 이러한 선택 역시 천지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착한 일을 한들 악한 일을 한들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천국 갈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의 원죄론과 구원예정설은 개신교의 핵심 교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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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인간 내면에 고유한 악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아무리 고귀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악이 언제나 선을 능가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이성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매도했다.

“이성은 믿음의 가장 큰 적이다. 이성은 악마에게 기쁨을 주는 창녀다. 옴과 나병이 득시글거리는 이 창녀는 발로 밟아 죽여야 한다. 그녀와 그녀의 지혜는 그녀의 얼굴에 똥을 던지고 세례를 베푼다고 속여 익사시켜야 한다. “(Martin Luther, The Table Talk, item 353)

그래서 루터는 스콜라 철학도 경멸한다. “교활하고 독단에 차있는 저주받은 이교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너무나 많이 의존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루터는 성서와 모순된다는 이유만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에 마녀(witch)와 악령은 존재한다고 믿었다. 더 나아가 모든 자연 현상은 하느님과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마녀 화형식 (그림: 위키백과 공용)

부패한 바티칸을 개혁할 인물로 떠오른 루터를 향해 당시 많은 휴머니스트들은 처음에 상당한 갈채를 보냈지만 , 점차 드러나는 그의 반이성적 논리에 크게 충격을 받고 실망한다. 그의 납득하기 어려운 기이한 성서 해석과 신학적 관점이 상당히 조잡하고 허술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지식인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루터의 예정설은 실제로 심각한 사회현상을 초래했다. 어떤 젊은이는 자신의 형의 목을 베고는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는 하느님에 의해 예정되어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대학의 논리학교수는 사소한 집안문제로 다투다가 아내를 몽둥이로 때려죽인 다음 자랑스럽게 외쳤다.

“이제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도다.”

루터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에 부담을 느낄만큼 엄격한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빈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der)는 교회의 타락을 묵인하지 않는 강한 신념을 가진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루터는 성직자 계급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금지한 가톨릭 규범을 달리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선, 그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 전에 그 자신이 정결해야 합니다. 선량한 양심으로 미혼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를 그렇게 두십시오. 하지만 그가 정숙하게 살도록 자신을 자제할 수 없다면, 그에게 아내를 취할 수 있게 하세요. 신은 그 상처(성욕)을 위해 연고(결혼)를 만들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탁상담화, 715 중에서)

“first, to purify himself before he teaches others. Is he able, with a good conscience, to remain unmarried? let him so remain; but if he cannot abstain living chastely, then let him take a wife; God has made that plaster for that sore. (Martin Luther, The Table Talk, item 715)

루터는 자연을 극도로 싫어했다. 도시를 벗어나면 악마에게 홀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우박, 천둥, 홍수 같은 자연적 현상을 모두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숲, 물, 들판, 어두운 습지에는 무수한 악마들이 사람들을 해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짙은 먹구름 속에도 악마가 숨어있다.” (W.E.H.Lecky, *History of Rationalism in Europe*, 1:61-62)

교황청은 종교 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고 루터를 위협했지만,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전체주의적 관행을 비판하고 공격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말년에는 정작 자신이 성마르고 편협한 사람으로 변해 가톨릭 교회보다 훨씬 극단적이고 단호한 고집불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를 따르던 열성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은 커다란 망치, 곡괭이를 들고 다니며 수시로 성상을 부수고 성화를 난도질하고 제단 뒤의 벽장식을 훼손했다. 이런 것들을 지키려 하는 사제나 교구의 신도들은 돌팔매질을 당하고 두들겨맞았다. 화가나 조각가들은 마을에서 쫓겨났다.

초창기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대부분 가톨릭 교회를 개조하여 만들었다. 조각상, 십자가, 성화 등을 모두 없애고 그림이 그려진 천정과 벽에 온통 하얀 칠을 하여 마치 휑한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다채롭고 화려한 가톨릭 미사는 성서를 통독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루터가 살아있는 동안 그가 번역한 독일어 신약은 10만 부 이상 팔렸다. 당시 문맹이 상당히 많았던 것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놀라운 수치다. 95조 반박문을 붙여 놓은 지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에라스무스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루터의 책이 어디서나 어떤 언어로나 눈에 띄는군. 그에게 영향받지 않은 사람은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해.” (에라스무스)

루터가 번역해 출간한 1534년 성서

칼뱅, 염세적인 세상을 꿈꾼 원리주의자

1509년 프랑스 느아용의 독실한 가톨릭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법률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중 루터의 설교문을 읽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그는 성서를 면밀히 탐독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집안의 신앙을 버린다. 1535년 26살에 칼뱅은 [기독교 강요] (라틴어: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36-1560)를 집필한다. 칼뱅은 평생에 걸쳐 이 책을 개정하였고, 그 최종판은 오늘날 개신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으로 평가받는다.

장 칼뱅(1509 – 1564) 개신교의 아버지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예정론을 그대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루터보다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하느님의 정의에서 일찌기 벗어나버린 인간은, 사악하고 삐뚤어지고 비열하고 불순하고 부정한 것 외에는 상상할 수도 희망할 수도 계획할 수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이타주의, 공유, 우호적 협력처럼 가끔 선해 보이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인간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위선과 거짓과 사악함의 족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절대 속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나약한 피조물들은 두려움 속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바치는 것 외에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다.

칼뱅이 제시한 교리에는 독창적인 내용은 거의 없다. 유대교와 가톨릭에서 가장 가혹한 개념만 가져다 교리를 만들었을 뿐이다. 유대교 예언자들이 지혜와 조화를 강조한 가르침은 대부분 배제하였고, 온유하고 여성적인 가톨릭의 이미지, 의례, 성찬 같은 것도 전부 부정했다. 칼뱅은 자신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가장 좋은 일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슬퍼서 울고 장례식 때는 기뻐서 운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 1, Book 3, Chap 9, 4:781)

1542년 칼뱅은 새로운 교회를 어떻게 조직하고 운영해야 하는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교회규율]을 발표한다. 이 책에서 그는 목사, 집사, 장로와 같은 위계질서를 설계하고 이러한 직위는 모두 남자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상은 장로교, 퓨리턴, 위그노, 필그림 등 개혁교회를 만드는 기본적인 청사진이 되었고, 오늘날 개신교회의 기본적인 구조가 되었다.

루터와 칼뱅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루터는 세례받은 기독교도는 누구나 성서를 해석해낼 수 있다고 믿었지만, 칼뱅은 그러한 능력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칼뱅은 성서의 ‘진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박식한 남자엘리트에게만 있다고 믿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은 현세의 법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부는 하늘의 법을 실행하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철저한 정교일치사회를 주창한 것이다.

칼뱅의 주장은 ‘왕권보다 교황권이 우위에 있다’는 기존 가톨릭의 주장에서 교황권을 장로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초기 칼뱅교회의 장로들은 신자들의 삶을 거의 절대적으로 통제했다.

지상 위의 하느님 나라, 천국일까 지옥일까

1520년대 칼뱅의 위세가 급격하게 뻗어나가자 가톨릭교회는 칼뱅과 그 신도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박해를 피해 칼뱅은 스위스로 피신하였고, 여기서 제네바의 원로(장로)들에게 신임을 얻는다.

원로들을 등에 업은 칼뱅은 자신의 신정국가 사상을 하나씩 현실속에서 구현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칼뱅에 대해 제네바 시민들의 불만이 폭주했고, 결국 주민투표를 통해 그들을 쫓아내버린다. 미치광이 원리주의자들이 쫓겨나자 제네바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축배를 터트리며 기뻐한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종교개혁’의 불길이 본격적으로 치솟자 제네바의 원로들은 칼뱅을 다시 불러들인다. 시민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이전처럼 칼뱅에게 전권을 주지는 않았지만, 칼뱅은 ‘종교적 열정’이라는 명분으로 야금야금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1541년부터 시작된 칼뱅의 ‘하느님의 나라’ 건설사업은 결국 역사상 가장 억압적이고 가혹한 경찰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칼뱅이 제네바에 다시 복귀하는 모습.

칼뱅은 가장 먼저 제네바의 원로이자 교회의 장로들에게 시민들의 집을 빠짐없이 방문하여 그들의 신앙, 행실, 사적인 생활을 낱낱이 탐문하고 기록하여 보관하라고 명령한다.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불경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지 늘 감시하고 보고하라고 세뇌한다.

예배는 제네바 시민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다. 예배에 늦는 것도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한 번만 지각해도 엄한 질책과 추궁을 받아야 했으며, 세 번 이상 지각하면 추방하거나 사형(!)시켰다. 칼뱅이 요구하는 신앙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제네바를 떠나야만 했다.

시민 생활에 대한 삼엄한 통제가 계속 강화되면서 신성모독은 물론 춤, 노래(찬송가는 예외), 카드놀이, 여흥, 음주 등이 모두 금지되었으며, 종을 치거나 향을 피우는 행위, 크게 웃거나 떠드는 행동도 모두 금지되었다.

밥을 먹을 때 식탁 위에 올릴 수 있는 접시의 수(불과 몇 개)와 입을 수 있는 옷색깔(황갈색)도 법으로 규정하여 이를 어기면 처벌했다. 도박을 하다 걸리면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 차꼬(public stocks)에 묶어 놓았다. 아이들 이름은 무조건 성서에 나오는 사람 이름으로 지어야 했다. 아들 이름을 ‘아브라함(Abraham)’으로 짓지 않고 ‘클로드Claud’라고 지었다는 이유로 어떤 부모는 4일 동안 감옥 신세를 졌다.

차꼬(public stocks)

여자들은 더욱 엄격하게 통제했다. 볼이나 입술에 연지를 바르거나, 보석을 치장하거나, 레이스가 달린 옷이나 화려한 색깔의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다. 머리를 너무 많이 올려 묶었다는 이유, 튀는 모자를 썼다는 이유로 감방에 간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사소한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

  • 결혼 전 섹스를 한 여자 → 사형(대개 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 간통 → 사형
  • 신성모독 → 사형
  • 우상숭배 → 사형
  • 항문 삽입 → 사형
  • 수간(동물과 섹스) → 사형
  • 이단 → 사형
  • 마술 → 사형

낙태는 뭐 고민할 필요도 없었는데, 결혼도 안한 여자가 임신한 것이 들키면 그 자리에서 물에 집어넣어 죽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들은 대부분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고문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사지를 찢는 기구(rack)를 이용해 고문하고 죽이는 제네바 칼뱅교도

신성 제네바에서 가톨릭은 이단이었기 때문에 묵주나 성모상을 지니고 있다가 잡히면, 장로들 앞에 끌려가 재판을 받았다. 악마와 정을 통하고 제네바에 역병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여자 14명은 모두 유죄로 확정되어 화형대에 묶어 불태워 죽였다. 심지어 칼뱅의 의붓아들과 며느리도 각각 간통혐의로 고소당했는데, 이들과 정을 통했다고 하는 상대까지 모두 잡아다가 가차없이 사형시켰다.

남자만으로 이루어진 무자비한 재판관들은 강박적일 만큼 꼼꼼하게 재판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을 보면 이토록 엄중한 상황에서도 수많은 사생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아기들은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들판에 버려졌다.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한 여자들은 임신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으며, 가끔은 목숨을 걸고 교회 앞 계단에 아기를 놓고 도망가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아이를 낙태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죽음에 이른 젊은 여자들이 꽤 많았을 여겨진다.

기독교도들은 잠들어 있는 여자와 섹스를 하여 임신시키는 악마 인큐버스(Incubus)가 자연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하느님 나라의 야만성은 극에 달해, 마침내 부모를 때렸다는 혐의로 아이를 잡아다 목을 자르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언론과 출판도 엄격히 통제했다. 칼뱅을 비판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형시켰다. 한번은 칼뱅이 설교할 연설대 앞에, ‘이전의 어떤 교황보다도 칼뱅이 저지른 죄는 훨씬 악랄하다’고 비난하는 게시물을 누군가가 붙여놓았다. 칼뱅은 범인으로 자크 그뤼에(Jacque Gruet)라는 휴머니스트를 지목하고 체포한다. 그뤼에는 혐의사실을 전면 부인했으며, 죄를 입증할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매일 두 차례씩 30일 동안 고문을 했고 마침내 미심쩍은 자백을 받아낸다. 곧바로 사형집행관들은 그를 광장으로 끌고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꼬에 발목을 묶고 못질한 뒤, 머리를 잘랐다.

1553년 지리학자·의사·생리학자·신학자였던 당대의 지성 미카엘 세르베투스도 칼뱅의 손에 화형당한다. 칼뱅 통치기간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처형당했으며, 화형당한 사람만 150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칼뱅은 일 중독자였다. 쉬는 날이 거의 없었고 휴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편하면 악마의 계략에 놀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적 감각이나 자연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에 대해 어떠한 연민도 관용도 보이지 않았다. 유머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칼뱅은 계급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떠한 야망도, 자긍심도 악이라고 규정했다. 구걸을 금지했으며, 지나치게 자선을 하는 것도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나쁘다고 말했다. 오늘날 개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이 인물에 대해서 [문명이야기]를 저술한 철학자 윌 듀란트는 이렇게 평가한다.

“이 남자를 좋아하고 싶어도, 좋아하기 힘들다는 사실만 거듭 확인할 수밖에 없다. 길고 찬란한 몰상식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부조리하고 신성모독에 가까운 하느님 개념으로 인간의 영혼을 암울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 사람이다.” (Will Durant, vol. 6, Reformation, 490)

루터와 칼뱅, 과연 이들의 종교개혁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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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 크레센도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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