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만우절. 거짓말 혹은 진실과 거짓에 관한 다섯 가지 이야기.
잔돈과 선행
거짓에 관한 첫 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이나 3학년 때의 일인 것 같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담임선생님이 불우이웃돕기인 걸까, 어떤 아름다운 목적으로 돈을 걷었다. 나에겐 십원짜리 몇 개와 백원짜리 한두 개 그리고 천원짜리 지폐가 한두 장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마침 그 잔돈이 호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귀찮게 느껴지기도 해서 지폐를 남기고, 나머지 백원짜리 한두 개와 십원짜리 여러 개를 모두 모아서 성금으로 냈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이 나를 아이들 앞에서 다소 호들갑스럽게 칭찬했다. 담임은 나의 헌신적인 선행을, 그러니까 자신의 착각을 아이들 앞에서 아름답고 따뜻한 말로 이야기했다.
담임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첫 순간, 내 진짜 모습과 내 비춰진 모습이 다를 수도 있구나. 아주 묘한 느낌이었던 건 또렷하게 기억난다. 나는 차마 ‘선생님, 그건 그저 그 잔돈을 털어버리려고 했던 건데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가벼운 죄의식이 생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마치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바친 기독교 성경 속 과부가 되었던 거다:
“이들은 다 풍족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헌물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누가복음 21:4
도덕 시험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전까지 나는 교실에서 있는 줄 없는 줄 모르는 그런 조용한 아이였다. 나는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운동도 잘하지 못했다. 인기가 많거나 싸움을 잘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나는 존재감이 전혀 없는 아이였다.
그러던 나는 4학년 1학기 말 도덕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받은 성적은 아니고, 그냥 내가 아는 대로 답을 적었는데 100점을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들은 내가 도덕 시험에서 100점을 맞을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아이였으니까. 그때 나는 어린 나이에도 심한 모욕과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감정은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불쾌와 흥분도를 그 당대의 문화적 구조 속에서 재구성하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의 의심을 아주 부당하게 느꼈다.
그리고 4학년 2학기가 시작되는 첫날로 기억한다. 그 선생님 성함도 기억한다. 이명신 선생님.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담임 초등학교 선생님 성함이다. 선생님은 이런 취지로 말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오늘부터 첫날이야. 오늘부터 너희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날이다. 알았지?”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무시받는 나를 버리고 새로 태어났던 것 같다. 이를 악물고, 저 수치심, 저 부당한 의심으로부터 나를 구출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건 한편으로 안쓰럽고, 한편으론 대견하면서 대체로 씁쓸하다.
거짓말의 발명
리키 저베이스가 감독과 주연, 공동 각본(매튜 로빈슨)을 담당한 [거짓말의 발명] (2009)은 놀라운 걸작은 아니지만, 리키 저베이스 특유의 냉소적 유머 감각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 글을 읽고 이 작품을 볼 것 같지는 않아서 스포일러에 관한 불안 없이 쓴다면, 거짓말하지 못하는 세계가 실은 얼마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크 벨리슨(리키 저베이스)가 은행 직원을 상대로, 영화 속 세계를 기준으로 인류 최초의 거짓말을 시도하는 장면은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창조주이신 여호와와 최초의 피조물인 아담이 서로의 손가락으로 번개를 튀기는 그런 짜릿함마저 불러일으킨다. [거짓말의 발명]은 거짓말이 진실의 반대말이라기보다는 문명의 출발점이라는 걸 세련된 블랙 코미디의 감수성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 마크의 거짓말로 기록된 최초의 이야기가 사실은 기독교 성서라는 설정도 그 신랄한 풍자와 문화적 관용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신동엽이 [SNL]에서 저런 식으로 콩트했다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 영화에는 티나 페이, 루이스 C.K., 조나 힐, 제프리 탬버와 같은 ‘어벤져스급’ 코미디 배우들도 조연과 단역으로 다수 출연한다.
토끼와 여우: 지능, 시뮬레이션, 붉은 여왕 가설
뉴스페퍼민트의 이효석 대표와 비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인터뷰가 있다(‘슬로우민트’). 두 번째 책으로 [아름다움의 진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지능은 결국 속이는 능력” 혹은 “속지 않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여러 진화에 관한 책에 그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대니얼 데닛의 [마음의 진화] (원제: Kinds of Minds, 2008)에 나오는 토끼와 여우의 예가 잘 알려져 있고요. 여우는 포식자고 토끼는 피식자죠. 토끼는 여우로부터 잘 도망쳐야 생존에 유리하고, 여우는 토끼를 잘 잡아먹어야 생존에 유리하죠.
데닛은 이런 예를 듭니다. 기본적으로 토끼와 여우는 먼저 발견하는 쪽이 먼저 도망치거나 상대를 쫓았을 겁니다. 어느날, 발이 빠른 토끼 중에는 자기가 먼저 여우를 발견했을 때 먼저 도망치지 않는 토끼가 나올겁니다. 여우가 자기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도망가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역시 도망갈 필요가 없으니 에너지를 절약했고 생존에 유리했으니까요.
그러면 여우 중에 자기를 봐도 도망치지 않는 토끼는 발이 빠른 토끼니 쫓지 않는 여우가 또 나오겠지요. 드디어 토끼 중에는 발이 느림에도 불구하고 여우가 자기를 쫓을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우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 토끼가 나올 거고요. 이렇게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하는 능력이 지능으로 진화했다고 데닛은 이야기합니다.
이는 세상을 내적으로 시뮬레이션하는 능력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진 지능은 결국 나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다른 개체를 조종하는, 곧 속이는 능력이라는 말도 되지요. 물론 이걸 뒤집으면, 지능은 속지 않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포장을 간파하는 능력이라 말할 수도 있고, 붉은 여왕 가설처럼, 속이려는 자와 속지 않으려는 자가 같이 진화한다고 볼 수도 있고요.
슬로우뉴스, 이효석, ‘질서에서 혼돈으로, 우열에서 우연으로: 별의별 아름다움에 관하여’ 중에서
삼체인이 거짓말하지 않는 이유
이하 드라마 [삼체] (2024)에 관한 약한 스포일러
“삼체인이 인간의 거짓말하는 습성을 몰랐다가 깨닫는 건 좀 억지스럽지 않나요?”
지난 주말, 벚꽃 없는 벚꽃 여행을 다녀왔다. 친한 친구 부부와 동행했다. SF 영화를 좋아하는 그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물었고,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삼체인은 공감 네트워크를 공유하잖아요. 거짓말할 필요가 없죠. 단 한 명이 살아남아도 전체가 사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죠.”
[삼체]는 오랜만에 만나는 흥미로운 SF 드라마다. 이토록 식상한 소재를 이렇게 흥미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원작 소설이 궁금할 지경이다.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신의 영역
인간은 끊임없이 거짓말한다. 우리는 삼체인처럼 공유 네트워크를 진화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삼체인처럼 감정과 인식을 공유한다면, 그런 공유 네트워크가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면, 행복할까. 잘 모르겠다.
언젠가 책인지 라디오인지, ‘약속은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신의 영역’이라는 말을 들었다. 너무 인상적이라 기억하고 있다. 누가의 말인지, 어떤 맥락에서 한 이야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소설인지, 비평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 거짓말한다. 심지어 스스로 희생하고 헌신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 시대의 거짓말은 생존과 이익을 위한 기만으로 사용된다. 그렇게 진실의 성채를 허무는 탐욕으로 무장한 거짓이 우리 시대를 지배한다.
그리하여 이제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산다. 그리고 그때, 그 진실과 거짓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누구의 진실 혹은 거짓인지가 중요하다. 캡콜드(김낙호 교수)는 그 이중적 태도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기본적인 인그룹과 아웃그룹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내부 집단(인그룹)에 대해서는, 모든 성원이 각자의 복잡한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가령 이재명이 위성정당 약속을 어겼다고 해도 이재명 지지자 입장에선 다 이유가 있는 거고, 여권 지지자 입장에서는 윤석열이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도 그걸 단순하게 바라볼 게 아니라 다 이유가 있고,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거죠. 그렇게 자기 내부 집단에 관해서는 아주 입체적으로 섬세하게 복합적인 변인들을 고려해서 바라봐요. 아주 섬세하죠.
그런데 아웃그룹, 외부 집단에 관해서는 인식을 아주 단순화하죠. 그저 무능하고, 무식하고,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이고, 거짓말쟁이죠. 그렇게 내가 속한 내부 집단과 내가 속하지 않은 외부 집단에 이중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그리고 외부 집단을 단순화하는 것과 유사하게 이슈에 관해서도 필요에 따라 단순화하는 거죠.”
캡콜드, ‘이강인 탁구 스캔들과 이슈 쏠림: 어젠다 세팅에서 어젠다 키핑으로’ 중에서
그래도 약속이라는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신의 땅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