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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베이징의 중앙위원회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과 천윈은 그 유명한 개혁·개방을 선언하였다. 중국의 개방은 세계화의 가장 큰 상징이었으며, 태평양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보혁명과 함께 상호작용하며 현대 세계를 형성해갔다.

그 즈음 애플은 개인용 컴퓨터의 상업화에 성공(애플II와 애플II Plus)하고, 그로부터 10년 뒤 팀-버너스 리는 오늘날 인터넷의 대명사가 되는 ‘월드 와이드 웹'(WWW)을 제안한다(1989). 이렇게 컴퓨터와 인터넷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들이 세워지게 되고, IT의 발전은 기업과 정부의 관료조직부터 지식생산과 유통에 이르기까지 인간 세상 운영의 모든 면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이폰(2007)은 이 상호작용의 절정이었는데, 실리콘밸리에서 도쿄와 서울을 거쳐 타이베이와 광둥성 선전으로 이어지는 정보, 기술, 노동력, 생산의 거대한 흐름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복잡한 다국적 생산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중국의 값싼 노동력은 폭스콘 공장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부를 거머쥐었고 그 제조공정을 외주할 수 있던 애플은 가치사슬의 상위에 있는 R&D에 집중하면서 기술혁명을 가속화했다.

어느 미치광이의 ‘경고’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일찍이 경고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1978년에. 바로 대학과 공항에 사제 폭발물을 보내 3명의 사람을 죽이고 20여 명의 사람에게 부상을 입힌 미치광이 천재 수학자, 시어도어 카진스키였다.

FBI가 1987년에 작성한 유나바머의 몽타주
FBI가 1987년에 작성한 유나바머의 몽타주

사람들은 대학(University)과 공항(Airport)에 그의 테러가 집중되었다고 유나바머(Unabomber)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자신은 자유클럽(FC)라는 이름으로 테러 메시지를 보냈는데, 무려 17년 동안 FBI의 수사망을 피해 테러 행각을 벌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싸이코 테러리스트를 나는 굳이 다시 이곳저곳에서 들춰내는가? 그것은 그가 1995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발표한 ‘산업사회와 그 미래’(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 1995, 별칭 ‘유나바머 선언문’)의 통찰이 2018년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나바머는 기술 시스템이 자체 의제를 갖고 추진되며, 우리가 기술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절대로 구분해서 쓸 수 없기 때문에 기술은 일방향으로만 무한히 뻗어나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기술의 효용에 중독되면 기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들만 양산될 것이고, 실질적으로 기술은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박탈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25. 기술과 자유 사이의 지속적 타협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술이 훨씬 더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반복되는 타협을 통해 계속해서 자유를 침해한다. 처음엔 같은 크기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한 쪽이 다른 쪽보다 힘 센, 두 이웃을 떠올려 보자. 더 힘 센 쪽이 상대 땅의 일부를 요구하고, 약한 쪽은 이를 거절한다. 힘 센 쪽이 말한다:

“좋소, 타협합시다. 내가 요구한 것의 절반만 주시오.”

약한 쪽은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얼마 후, 힘 센 쪽이 땅의 다른 부분을 요구하고, 다시 타협이 이루어진다. 이런 식으로 계속 타협이 진행된다. 한 쪽에 대해 일련의 타협을 강요함으로써, 힘이 더 센 쪽은 결국 모든 땅을 얻는다. 기술과 자유 사이의 갈등에서도 그렇다. (시어도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1995. 중에서)  [footnote]125. It is not possible to make a LASTING compromise between technology and freedom, because technology is by far the more powerful social force and continually encroaches on freedom through REPEATED compromises. Imagine the case of two neighbors, each of whom at the outset owns the same amount of land, but one of whom is more powerful than the other. The powerful one demands a piece of the other’s land. The weak one refuses. The powerful one says, “OK, let’s compromise. Give me half of what I asked.” The weak one has little choice but to give in. Some time later the powerful neighbor demands another piece of land, again there is a compromise, and so forth. By forcing a long series of compromises on the weaker man, the powerful one eventually gets all of his land. So it goes in the conflict between technology and freedom. (Theodore Kaczynski, 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 1995. 중에서)[/footnote]

비관주의 몰아낸 새천년의 낙관주의 

1995년 그가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발표했을 때에는 이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들이 조금 있었다. 아마 유나바머의 연쇄 테러가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했을 것이고, 세기말이라는 말세적 분위기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새천년이 오자 사람들은 다시 테크노 유토피아에 연호하고 있었다.

IT 혁명과 생명공학 혁명은 독재를 몰아내고 질병을 퇴치하고 만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묘약으로 칭송받았다. 마침내 2011년,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결집한 아랍인들이 독재정권을 몰아내자 테크노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은 절정에 달했다. 이제 인터넷의 고고한 진군 앞에 어떤 독재정권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아랍의 봄(아랍어: الثورات العربية). 이집트 혁명 당시 부통령 우마르 술레이만이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임을 발표하자 타히르 광장에서 축하하는 시민들. (2011년 2월 11일,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2.0)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9E%8D%EC%9D%98_%EB%B4%84#/media/File:Tahrir_Square_on_February11.png
아랍의 봄(아랍어: الثورات العربية). 이집트 혁명 당시 부통령 우마르 술레이만이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임을 발표하자 타히르 광장에서 축하하는 시민들. (2011년 2월 11일,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2.0)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은 사뭇 달랐다. 오히려 러시아, 이란, 중국, 베트남에서는 독재 정권이 웹을 좌지우지하면서 용의주도하게 시민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참고: 에브게니 모로조포, ‘똑똑한 독재자들은 인터넷을 억누르지 않는다.’ 2011. 2. 19., 월스트리트저널, 한글 번역 링크). 모바일 사회에 연결되면서 얻게 된 편익이 너무 커지자, 사람들은 도저히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곧 삶의 편의를 위해 독재정권에 주요한 개인정보를 고스란히 넘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물론 이것은 독재 치하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벌어진 일이지만, 민주국가라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주역은 국가가 아니라 거대 공룡 같은 테크기업들이었다.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은 사람들의 취향과 이동장소 등을 실시간으로 수집하면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했다. 이 데이터를 가지고 활용할 수 있는 일은 아직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많아지면 많아졌지 적어질 일은 없을 것이 틀림 없었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더 많은 데이터가 더 많은 힘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람들은 심리적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유나바머는 그의 선언문에서 사람들이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권력 과정”이라는 핵심적인 심리 기제를 경험할 수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가 말하는 권력 과정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몰입하고 끝내 성취를 획득하는 과정 일반을 말한다. 유나바머에 따르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기술 시스템의 부속품으로서 인간은 제대로 된 권력과정을 통과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인간이 시스템에 ‘건강하게’ 녹아들어 활동할 수 있도록 기술시스템이 자체적인 대리만족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인간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별로 시덥잖은 일들이고, 안 해도 딱히 상관 없는 거지만, 무언가 그럴싸한 목표가 제공되며, 그럴싸한 몰입을 거친 뒤 그럴싸한 성취감을 얻으며 인간은 삶을 이어가고 시스템의 지속되는 진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시스템에 부적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다양한 정신과 약물을 통한 교정이 뒤따를 것이었다.

하지만 유나바머는 그럼에도 대리만족으로는 인간이 겪게 된 심원한 박탈감과 공허를 해소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시스템의 이와 같은 요구가 극대화되면서 인간의 박탈감은 심화된다면 시스템은 결국 자체적으로 붕괴하지 않을까? 그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그는 기술 시스템을 막을 수 없다면 종국에는 기술이 인간을 읽어내고 바꾸어낼 수 있는 역량을 극단적으로 활용하는 미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곧 아예 시스템의 확장에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인간을 만들어버린다는 의미다. 즉 생명공학의 전면적 발전으로 권력과정에 대한 갈구가 거세된 인간을 만드는 시도가 있을 것이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 객체는 자율성을 박탈당한 채 시스템을 위해 봉사하는 군체를 넘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국가 전략 

지나친 SF소설로 보이는가? 1995년에 이 글을 읽은 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2005년에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2018년이 끝나가는 지금, 상황은 사뭇 달라보인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인간을 활용하는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면서, 인간 사회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미래의 노동은 소수의 API 위 노동(노란색)와 인간을 대체하는 자동화(분홍색) 그리고 다수의 API 아래 노동(파란색)으로 재편한다. (참고: 강정수, 알고리즘 사회,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2015) https://slownews.kr/42874
이제 미래의 노동은 소수의 API 위 노동(노란색)와 인간을 대체하는 자동화(분홍색) 그리고 다수의 API 아래 노동(파란색)으로 재편한다. (참고: 강정수, ‘알고리즘 사회,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2015)

기술적으로 이 변화를 이끄는 곳은 실리콘밸리고, 정치적으로 이 변화를 실행하는 곳은 중국이다. 실리콘밸리 테크기업들은 온갖 혁신을 통해서 인간 영혼을 뉴런 간의 전기화학적 상호작용으로 재구성하고 인간의 결정을 알고리즘에 위임하는 놀라운 기술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혹자는 아무리 실리콘밸리가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기업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헌법과 기본권에 기초한 가치를 한계선으로 정한다면, 시민들이 올바른 정치적 결정을 통해 기술 시스템에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을 설정한다면, 아무리 거대한 플랫폼이라도 일개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헌법과 기본권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면 어떨까? 중국은 현재 21세기에 걸맞는 인간의 이해를 가장 적극적으로 국가 전략에 반영하고 있는 국가다. 국민의 위치는 전국적으로 깔린 CCTV 네트워크로 감시되고, 결제 네트워크를 통해서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할 수 있으며, 인터넷 사용 기록과 전화통화기록을 더해서 사회신용점수를 산출할 수 있다. 이제 정치적 저항을 별로 꿈꾸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당국이 부여한 ‘점수’를 높게 획득하기 위해서, 카진스키가 말한 일종의 ‘대리만족’ 행위에 몰입할지도 모른다.

동시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진행되는 DNA 데이터베이스 구축 시도,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는 유전자 편집 실험 등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유주의 규범이 확립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인데, 대부분은 중국 공산당 지배체제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맞춰 개인을 통제하려는 목적 하에 추진되고 있다.

다시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그것은 중국 이야기다.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해 그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독재체제가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다. 한편으로 중국의 기술력은 미국보다 낙후되어 있고 당분간 그 경향이 뒤집힐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기술표준이 중국에 의해 장악되고 디스토피아가 찾아올 우려를 진지하게 논할 필요는 없다.’

테크노 디스토피아 

하지만 우리가 사회신용제도를 편하다고 쓰는 중국인과 무엇이 다를까? 우리의 지문은 모두 국가에 의해 수집되어 개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 쓰인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지문을 제공해서 시스템에 반하는 범죄자들을 더욱 편하게 격리할 수 있다. 지하철 역 자판기에서조차 손쉽게 문서를 발급받는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지문을 넘길지 말지에 대한 자율성을 제공한 대신 더욱 편리하고 안전한 사회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안면인식 시스템과 다양한 결제정보와 이동자료를 통해서 최적의 산출값을 알려주는, 미래의 중국 빅브라더와 이것은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른가? 중국의 감시체제가 과거 소련 공산권 감시체제와 다른 이유는 여기에는 인센티브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전국을 휘감는 CCTV 네트워크 덕분에 실제로 장기간 수배되던 범죄자들을 잡는 것이 더 용이해졌다.

작업장에 도입한 뇌파 인식 모자 덕분에 노동자들의 작업효율은 훨씬 더 좋아졌다는 보고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율성을 희생한 대신 사회의 가독성과 편이를 극대화한 결과물인 것이다. 유나바머가 말했듯, 기술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은 절대 분리할 수 없으며, 한 번 기술에 의존하게 되면 그것을 끊어내는 것도 불가능해 결국 인간이 기술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술 시스템이 인간을 쓰게 되는 것이다.

기술 인간 소셜 인터넷 테크놀로지

 

미국의 기술우위는 이 관점에 있어서는 유나바머가 경고했던 바를 저지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가속화할 따름이다. 핵폭탄 제조 같은 거대 프로젝트에 미국은 처음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핵폭탄을 최초로 개발하게 된 것은 오직 독일이 대신 개발하여 미국을 제압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위협이었다. 당대 산업력에 있어서 미국이 압도적으로 우위였음에도, 전략적 경쟁 국면에서는 단 하나의 가능성도 용납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다가올 2019년에도 비슷한 일이 펼쳐지리라 보는 게 타당하다. 중국의 테크노 디스토피아(혹은 유토피아)를 향한 진군은 분명히 태평양 반대편, 실리콘밸리에 커다란 자극을 줄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거대 플랫폼들은 정보와 데이터에 대한 접근권에 제약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사업을 할 수가 없다고 정부를 끊임없이 로비한다. 그들은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여 첨단 알고리즘과 AI, 생명공학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다고 공포를 주입한다.

만약 이런 기술 경쟁이 향후 10년 간 더욱 가시화된다면, 미국에서도 중국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들, 즉 인간의 자율성을 희생하는 대신 편리를 높여주는 신기술들을 추가로 도입할 것이다. 미국의 놀라운 혁신능력과 기술력을 극대화한 더욱 강력한 형태로 말이다. 후대인들은 독일이 핵개발을 먼저 하고 미국이 완성했다고 배우는 것처럼 중국이 테크노 유토피아(디스토피아) 개발에 먼저 착수하고 미국이 끝내 완성했다고 배울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다면 사람들은 1978년을 이렇게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알고리즘화와 생명공학 발전의 거대한 파도가, 중국의 개방으로 시작된 경제의 전방위적 세계화와 맞물린 현대 세계의 원년. 그리고 그 흐름에 맞서려고 했던 러다이트 하나가 실패로 끝난 폭탄테러를 처음으로 시작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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