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1일 오전, 국회 교통위원회에서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말다툼의 와중에 박순자 자유한국당 의원은 상대 의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무슨 싸구려 노동판에서 왔나? 어디서 싸구려 말을 함부로 하고 있어!”
국회의원들 간의 고성과 막말이야 흔한 일이고, 노동자를 비하하는 발언도 으레 있어 왔다. 하지만 이번엔 왠지 눈에 걸렸다. 같은 날 새벽, 하청업체 “싸구려 노동판”에서 스물네 살 먹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끔찍한 사고로 숨졌기 때문이다.
나의 ‘싸구려 노동판’
나는 능력이 모자라고 배움이 짧아 “싸구려 노동판”을 전전했다. 이 바닥에서는 ‘안전’이라는 권리가 최소한으로 지켜진다. 고 김용균 씨처럼 기계에 끼이는 사고를 협착이라 하는데, 나도 한 공장에서 가벼운 협착 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 거대한 기계가 아닌데다 다행히 빠르게 손을 빼낼 수 있어서, 며칠 동안 손이 부어 오르는 정도에 그쳤었다. 웃기는 건, 기계를 고치러 온 외부 기술자도 수리 와중에 손이 끼는 부상을 당했었다. 기술자라고는 해도 거친 기름밥을 먹는 육체 노동자여서 그런 것인지, 작업 중 안전에 그리 예민하지 않았고, 다친 것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경험한 곳 중 가장 “싸구려 노동판”은 다들 친숙한 [다이소]의 물류센터였다. 그 곳은 정말 빠르게 사람들이 들락날락 한다. 나 역시 한 달을 채 채우지 않았다. 다이소의 제품 특성 상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고되지는 않았지만, 근무 방식이 나 자신을 너무나 기계 부속품처럼 여겨지게 했다.
중앙에는 15m 정도의 컨베이어가 있고 10명가량이 양 옆에 정렬한다. 사람 뒤에는 4m쯤 되는 책장 모양의 제품 보관대가 있다. 대기하다가 신호가 울리면 보관대에 있는 제품을 찾아다가 컨베이어 위 박스에 넣어야 한다. 이 동작을 수백 번 하루 종일 반복하는 데, 한 시간만 지나도 종이 울리면 자동으로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어서, 수개월 이상 장기적으로 다니는 사람도 없지 않은 듯했다. 급여야 뭐 당연히 최저시급 수준에 이따금 야간작업을 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가졌던 불만은 보관대의 상단에 있는 제품을 꺼내는 일이었다. 보관대의 높이가 있는 만큼 가볍고 안전한 사다리를 이용해 작업하는 것이, 내 생각엔, ‘상식’에 부합했다. 하지만 남성이 책장 형태의 보관대를 타고 올라가 상단 제품을 꺼내는 것이 그 “싸구려 노동판”의 ‘상식’이었다. 그들의 싸구려 상식에 따라 오르고 내릴 때 조심한다면, 다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자칫 삐끗하면 낙상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정말 재수 없어서 머리부터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크게 다칠 위험이 있었다. 설사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해도, 그렇게 일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적응의 동물이어서, 몇몇 젊은 남성들은 보관대를 빠르게 오르고 내리며 (어쩌면 주위의 여성을 향해) 자부심의 미소를 짓고는 했다.
가장 건강에 해로웠던 일은 각종 자동차 부품을 커다란 박스에 포장하는 일이었다. 박스로부터 나오는 가루와 먼지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싸구려 노동판”에서는 각자가 알아서 일반 마스크를 쓰던가 말던가 하는 것이 ‘안전’의 전부였다. 그래도 독성 물질을 다루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런 곳에서 산재로 죽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안전한 일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
고 김용균 님이 어찌하여 그리 끔찍한 사고를 당하게 되었는지, “싸구려 노동판”을 전전한 입장에서는 굳이 언론 보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냥 사람이 싸구려다. 싸구려는 싸구려답게 대하고 다루는 거다. “싸구려 노동판”에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자유한국당 박순자 의원이 잘하고 있듯, 천대와 경시의 대상이다. 안전하게 일 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단지 일상에 불과할 뿐이다. 압도적인 산재 사망률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평온하게 나오는 산업 재해 발생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싸구려 노동판”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고 사측의 책임을 강화하는 법을 개정 하는 등, 국회 차원의 대처가 이뤄져야 한다. 물론 이렇게 되면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주어 투자가 위축되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등 오히려 노동자에게 해가 될 것이라는 ‘선의’의 우려가 준동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의’에 심취한 이들이 즐겨 말해왔던 바와 같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 가에선 경제와 노동자를 걱정하는 ‘선의’ 때문에, 노동자가 죽고 다치는 지옥문이 열리고 있다. 노조의 역량이 미진한 한국에서는 법이라도 잘 만들어서 허술한 안전 관리를 반드시 보강해야 한다. 그래도 현실에서는 빈 틈이 많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노동계에서 주장해 온 ‘위험의 외주화’ 근절도 보완될 필요가 있다. 원청 정규직이라고 무사하고, 하청 비정규직이라고 무사하지 않은 그런 환경은, 지향할 만한 사회가 아니다. 소속과 지위와 무관하게 일터는 안전해야 한다. 원청에 소속되면 안전할 확률이 올라가는 것도 맞고 무분별한 외주화 속에 이 부문의 위험이 증가한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외주화나 하청이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근원은 아니다.
경쟁에서 탈락하면 별 도리 없이 “싸구려 노동판”에 가야 하고, “싸구려 노동판”에 속한 이상 비루하게 살아도 어쩔 수 없다는 우리 사회의 지배이념이 노동자가 안전할 토대를 근본에서부터 허물어뜨린다. 외주화를 금하여 위험을 해소하자는 주장은 결국 하청업체는 “싸구려 노동판”일 뿐이라는 고정관념에 전제해 있다. 이런 식으로는 수많은 작업장에서의 안전을 담보하는 데 한계가 분명하다.
‘우리 안’의 적폐
한국인들은 “싸구려 노동판”을 대함에 있어 차가운 무관심과 뜨거운 관심을 동시에 드러내는 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대다수는 “싸구려 노동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실 별로 관심이 없다. 구의역 사망 사고나 태안화력 사망 사고처럼 드라마틱하게 비통한 일이 터졌을 때 “싸구려” 동정이 잠시 일어날 뿐, 웬만해선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우리 대부분은 “싸구려 노동판”으로부터 멀어지는 데 뜨거운 관심을 보인다.
한번 그 곳에 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사생결단의 경쟁에 몰입한다. “싸구려 노동판”의 문제가 지속되는 것은 사람들이 여기에 무관심해서가 절대 아니다. 그 반대로 “싸구려 노동판”에 끼지 않으려는 관심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는 “싸구려 노동판”을 피하는 데만 온 힘을 쏟아붇는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러한 삶의 결과가 스물네 살 고 김동균이고, 열아홉 살 구의역 김 군이며, 세계에서 아이를 가장 적게 낳는 현실이다. 혹자는 “문평성대”라며 흡족해 했지만, 아래쪽 그늘진 곳에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비명 소리가 멈추지를 않아 왔다. 누굴 탓하려는 게 아니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니지 않냐는, 넋두리라도 해보는 거다.
맨 하는 소리들이 반복되는 것도 싫증이 난다. 먹고 살만한 노조가 자발적으로 임금을 깎는 등 연대심을 발휘해야 자본의 멱살을 잡을 수 있다는 “노조 역할론”도 언제부턴가 지겹기만 하다. 재정도 확대하고 세금도 인상해서 복지든, 사회인프라든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허무하기 짝이 없다. 박근혜도, 이명박도 감방에 넣었건만, 아래쪽의 어려움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강고한 적폐들이 방해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말 청산해야 할 적폐, 우리 모두의 삶의 방식은 아무도 몰아내야 한단 말을 안 한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어쩌면 아주 극소수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