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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황산벌]은 당나라 고종과 무열왕, 연개소문, 의자왕 간의 4자대면으로 시작한다. 당 고종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려는 신라를 방해하지 말라고 주장하는데, 연개소문과 의자왕이 반발하자 고구려와 백제를 악의 축으로 선언한다. 4자대면의 와중에 정통성을 운운하며 대립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씁쓸한 역사의 단면이 그저 웃어넘기기에는 편치 않다.

https://youtu.be/Mfp_BIfp0TM

이준익은 그 당시 동북아의 ‘역사분쟁’에 주목했다.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한 고구려의 천리장성 축조, 딸과 사위가 백제군의 손에 죽자 복수를 다짐하며 삼한일통(三韓一統)을 강력히 추진한 김춘추(무열왕), 의자왕의 고조부인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패해 죽자 신라 왕궁의 계단에 묻힌 일이 그것이다.

역사분쟁,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프로파간다

이렇듯 역사분쟁은 실제 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당 태종의 경우 요동이 한때 중국 땅이었으므로 당나라가 요동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설파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역사분쟁을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강력한 프로파간다로 써먹은 것이다.

한중일 국기

광복 70년이 된 지금이라고 다를까.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과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며 우리나라와 분쟁의 씨앗을 만들더니, 일본·필리핀·베트남과는 영토·영해 분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일본은 미·일동맹 강화로 자위대의 행동반경을 전 세계로 넓히고, 전쟁금지를 선언한 헌법 제9조를 개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는데, 이러한 동북아의 역사분쟁이 언제 다시 전쟁으로 촉발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렇다면 역사분쟁, 더 나아가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의 저자 김종성은 조금 색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교과서에 각자 숨기는 역사가 있고, 그 숨겨진 역사의 이면을 잘 살피면 분쟁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동원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지운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런데 ‘숨겨진 역사’라니, 무얼 말하는 걸까. 김종성은 먼저 우리나라 교과서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국 역사 교과서에 숨겨진 역사

“예컨대,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자국의 화려했던 역사를 담기에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고려가 공식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했다는 점은 [고려사]만 뒤적여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중략) 한국 교과서는 한국을 대륙국가, 농경국가, 약소국의 틀 안에만 가두어두려 한다. 해양과 유목지대에서 강대국의 모습으로 살았던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든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이어 저자는 ‘조공’은 물물교환의 한 형태였고, 사대를 한 경우보다 받은 경우가 많았으며, 조선시대 세조-예종 부자의 분서갱유로 고조선의 역사가 부정됐다는 등, 우리 안에서 왜곡되거나 숨겨진 역사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한다.

중국은 또 어떨까. 저자는 중국을 일컬어 ‘세상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는 태도가 너무 심각’하다고 말한다. 자국이 외국한테서 받은 조공은 크게 강조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고, 또 유목민족에게 번번이 정복되었지만 ‘유목민들이 우리 땅에 와서 우리에게 동화됐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기 때문에 말이다.

일본의 경우는 한반도에서 문명을 전수받고, 백제 멸망 후에 백제 유민들과 더불어 새로운 일본을 건설했으며, 중국을 황제국으로 받든 사실들이 교과서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륙국가들과 자국의 역사적 관련성을 어떻게든 숨기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국의 역사적 독자성을 강조하려 하는 일본인들의 욕구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결과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마디로 중국과 일본은 저 잘난 맛에 교과서를 쓰고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는 마치 ‘자기비하의 악습을 가진 사람의 일기장’ 같다는 게다. 또한, 저자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지금의 이런 한국과 한민족을 모욕하고 훼손하고 공격하는 교과서를 청산하는 것이 역사 분쟁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점검하는 첫 출발점이라고 했는데,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하는 바다.

책

역사 분쟁 해결의 노력이 필요하다

끝으로 광복 70년을 맞아 평화와 공영의 새로운 70년을 만들어 가려면, 전성은 전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이 참여정부 대통령 주재회의 때 제시한 의견도 지금의 역사 분쟁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국사교육을 강화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강화하면 저쪽도 강화할 거다. 나는 기본적으로 역사교과서에서 국사가 아닌 동북아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역사를 함께 놓고 과거 언제,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났는지, 또 언제,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 한·중·일 삼국의 평화가 유지되었던가를 가르쳐야 한다. 이미 유럽은 그렇게 시도하고 있다. 삼국이 저마다 국사 교육을 강화하면 ‘우리나라 좋은 나라, 이웃 나라 나쁜 나라’ 식으로 편협한 애국심을 심는 교육이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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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예컨대,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자국의 화려했던 역사를 담기에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고려가 공식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했다는 점은 [고려사]만 뒤적여봐도 …(후략)

    진짜 슬로우뉴스 찌라시 다 됐네요. 고려의 칭제는 외왕내제에 불과했습니다. 분명 고려가 당시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대접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칭제 이야기를 하면서 고려가 황제국이라뇨 ㅋㅋ 예전에는 이런 주장을 인용할 정도로 찌라시는 아니었는데…

  2. 송은 고려사신을 조공사가 아닌 국신사로 하였고, 거란은 고려 군주의 생신에 최상의 예우를 갖추었다는 기록이 많이 나타나며, 금은 황제가 보낸 친서에 고려국 황제에게 보내는 것임이 명기되어 있는 등 고려의 칭제가 국제적으로 어느정도 인정받고 있었다는 근거는 꽤 있는걸로 아는데요. 외왕내제에 불과했다는 건 어떤 근거를 가지고 하시는 주장인가요?

  3. 분명 고려의 국력이 당시 중원의 캐스팅보드를 할 정도로 강력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려가 황제국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한 국가가 황제국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하는데, 고려는 광종때 독자적 연호를 쓰다가 얼마 못가 후주의 연호를 썼고, 후주의 세력이 약해지자 또 독자적인 연호를 쓰다가 이후 송나라가 강력해지자 이후 계속 송나라의 연호를 썼습니다. 국력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완전한 의미의 황제국이라고 볼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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