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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싸워야 할 이미지

[여왕에게 작별을] (Les Adieux à la Reine, 2012)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007 스펙터]에 나온 레아 세이두(Léa Seydoux)가 프랑스 혁명기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책을 읽어주는 하녀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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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양성애자였다는 가정 속에 진행된다. 프롱드의 난 이후 루이 14세는 언제나 귀족들을 무서워했고 제압하려 했다. 그래서 지은 것이 베르사유 궁.

베르사유 궁전

파리 외곽 거대한 베르사유 궁에 ‘짱 박힌’ 왕가와 귀족들은 스마트폰도 없이 인터넷도 없이 풍문으로 파리를 달구는 혁명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바스티유가 어떻다는 둥, 궁의 내실에서, 복도에서, 부엌에서 수군거린다.

이 와중에 궁의 사람들은 또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분에 대해서도 수군거린다. 영화는 혁명 시기의 궁의 사람들을 담고 있다.

레아 세이두가 연기한 영화 속 하녀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연모한다. 아름답고 호사스러우며 사람을 좌지우지할 정치적이며 인간적인 파워를 지닌 마리 앙투아네트를 선망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하녀를 유혹하다가도 (유희한다고 보는 편이 더 옳지만) 훨씬 요염한 연인(여성 귀족)과 정분을 주고받는다. 질투에 빠진 하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여성 애인의 벗은 몸을 훔쳐보기도 한다. 이만큼 노골적이다.

영화 속에서 마리 앙트와네트를 연모하는 하녀를 연기한 레아 세이두 © 2012 - GMT Productions
영화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연모하는 하녀를 연기한 레아 세이두 © 2012 – GMT Productions

여든이 넘은 시아버지가 우연히 이 영화를 보고 왔다. 한국 할아버지가 [국제시장] 보러 가듯, [명량] 보러 가듯, 역사물인 줄 알고 보러 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는 프랑스 작가 감독의 역사 아티 해석물이었던 것. 시아버지의 보수적인 정치적 감수성, 평범한 영화 취향, 직설적 독해방식을 알고 있는 나는 시아버지가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더랬다.

영화가 어떠셨나 등등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버님은 “대사를 못 알아듣겠어. 왜 그렇게 중얼거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아버님, 그녀는 레즈비언이잖아요. 놀라지 않으셨어요?”

“레즈비언? 왜 레즈비언이야? 둘이 키스를 했다고 레즈비언이라고? “

시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남편이 나를 옆에서 쿡쿡 찔렀다. 동성애라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담론이 되기 이전 세대인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은 동성 간의 다소 미묘한 관계를 굳이 동성애라고 규정하거나 의심하지 못한다고. 이건 아주 흔한 일이라고. 군대나 운동선수생활 등 동성만이 모인 곳에서는 많은 미묘하고 우애를 넘어서는 일들이 있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것을 동성애라고 ‘규정’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거나 비정상이라고 벌하였던 것이라고.

우정 여자 레즈비언 동성애

우리가 느꼈던 여고 시절의 막연한 애틋함은 동성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그러한 것처럼. 이것은 ‘동성애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동성애라는 관계에 대한 사회적 규정과 관념은 ‘역사적’으로 마련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동성애 혐오가 서구 사회에 유래가 깊었다고 하더라고 동성애라는 것이 일반의 사람들에게 특정한 관념을 형성한 역사는 또 다르다. 역사 속에서 어떤 현상은 명명되고, 현상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와 반대, 대충의 인상들이 부가된다.

오랫동안 동성애라는 것은 꽤 막연한 ㅡ 당연히 실재했으나 많은 이들은 뚜렷이 ‘인지’하지 못하는 무엇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미스터리 미지 손 억압 절규 분노 인간 절망 우울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겠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단어는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부자나라, 백인나라, 세계의 경찰, 깡패, 위선, 인종 문제, 페이스북…’

좋거나 나쁘거나 어떤 아이디어, 어떤 대략의 이미지를 준다. 우리나라에는 미국에 대해 어떤 꼭 하나가 아닌 인식이 있다. 2002년 프랑스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이 사람들에게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구나’라는 것이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아무런 이미지가 없다. 떠오르는 것은 북한 정도. 이것은 부정적 이미지나 무시와도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지.

그런데 심리적 이미지, 상투적 이미지가 있을 때에야 이미지와 싸울 수 있다. 그럴 때에야 바깥의 적 (“동성애는 악마”라고 외치는 교회목사님. 약물 투여하라는 전 시대의 법정. “사내새끼가 뭔 xx냐 라고 하는 호모포비아 등)과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 (이 사랑은 온전한 사랑일까. 나는 죄를 짖는 것일까. 나는 아픈 것일까. 내 사랑은 축복받을까. 나는 정말 사랑하는 걸까)와 싸울 수 있을 테다.

많은 이들은 싸움의 목표가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 싸움의 목표는 이미지 이전, 이미지 너머, 대략적 이미지로 축소될 수 없는 인간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일이 되어야겠다.

2. 캐롤에 대한 규정: 레즈비언 영화?

[캐롤]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발언을 둘러싸고 비난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지인에게 들었다. 여성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두 인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했는데, 이 말이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를 애써 부인하려는 남성 평론가의 무의식을 드러낸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나는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지인에게 발언의 맥락을 좀 더 살펴보겠다고 했다.

이 영화가 역경에 처한, 여성이기도 한,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인생에 대한 고민의 포인트가 상당히 다른 두 ‘존재’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과 두 여성의 사랑 영화라고 말하는 것, 꼭 여성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 두 존재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갖는 말이다.

이 영화는 스스로 ‘여성 영화’ ‘레즈비언 영화’로 자기 정체성을 선언하고자 했던 영화였는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실린 글에서 듀나는 [캐롤]과 관련된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번역서에서 캐롤이 성관계 이후 어린 테레사에게 반말을 사용하는 문제인데,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번역서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이동진의 발언(영화는 ‘동성애라기보다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다’라고 평한 것)에 대한 것이다.

듀나는 이렇게 썼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생각이라고 하면서 울타리를 쳐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하필이면 그 사람이 여자(또는 남자)더라”라는 말이 얼마나 그 사람의 욕망을 무력화시키는 발언인지 아직도 모른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무엇이 고정된 클리셰인지 먼저 알아야 하는데, 이건 정말 클리셰 중 클리셰다.

무엇보다 이것은 쓸데없는 해석이다.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하필이면 그 사람이 여자(또는 남자)더라”가 먹힌다면 그건 그냥 주인공이 양성애자라는 말이다. 재미없게 들리지만 그렇다. 양성애자라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캐롤]에선 테레즈가 양성애자라고 이야기가 더 깊어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소설과 영화에서는 모두 반대되는 단서들만 제공된다. 가장 노골적인 알리바이는 테레즈의 남자친구 리처드와 그냥 친구 남자인 대니이다. 동성애자 각본가, 동성애자 원작자, 동성애자 감독이 모여서 대놓고 “얘는 남자에게 그런 감정을 못 느껴!!!”라고 외치고 있는데, 굳이 불필요한 ‘양성애’ 해석을 내놓을 필요가 있을까?”

-허핑턴포스터코리아, 듀나, 제발 그러지 좀 말자 ㅣ ‘캐롤’에 대한 두 가지 지적 중에서

캐롤 토드 헤인즈 2015

토드 헤인즈 https://en.wikipedia.org/wiki/Todd_Haynes#/media/File:Todd_Haynes_at_the_2009_Tribeca_Film_Festival.jpg[캐롤]의 감독 토드 헤인즈(Todd Haynes, 사진)는 조금 다르게, 다른 뉘앙스로 이야기한다. 그가 칸 영화제에 이 영화를 들고 왔던 지난해 오월 프랑스 두 주요 영화전문잡지 포지티브와 까이에 뒤 시네마와 각각 나눈 장문의 인터뷰를 떠올려본다. 두 인터뷰에서 일관된 진술을 하는 것으로 보아 토드 헤인즈는 다른 전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도 여러 차례 같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처음 테레즈는 자신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단어나 문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요. 테레즈는 말 그대로 “이건 거의 사랑이야. 캐롤이 여자라는 점만 빼면.” 또는 “나는 저 짧은 머리의 넥타이를 매고 양복 입은 여자들을 벌써 봤어. 하지만 나와 캐롤은 그들을 닮지 않았어.” 같은 말을 하죠. 테레즈의 세계는 자신의 감정을 결부시킬 사례도 이미지도 일관된 정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사랑에 빠졌을 대 우리는 결국 다 그와 같죠. 표현할 언어를 찾을 수 없어요, 우리는 절대적으로 유례없는 무엇을 경험하죠. 그 시대는 레즈비언의 사랑에 대한 긍정적인 사례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시대였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악화되요. 그러니까 그 시대와 틀이 테레즈의 감정을 더 두드러지게 해요.”

-토드 헤이즈, 까이에 뒤 시네마 편집진과 칸에서의 인터뷰 중에서

두 가지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는 1950년대 미국이라는 시대와 장소. 다른 하나는 헤인즈가 주목한 사랑의 속성.

헤인즈는 여러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분명 50년대 매카시즘의 시기, 시끄럽고 낡은 뉴욕[footnote]이를 표현하기 위해 헤인즈는 50년대 거리와 사람들을 찍은 여러 사진작가의 사진을 참조했다. Saul Leiter, Ruth Orkin 그리고 약간의 비비안 마이어. 화면 입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슈퍼 16mm로 촬영되었다.[/footnote]과 코네티컷이라는 시공간의 표현에 몰두했다는 점이 하나다. 이 시대와 장소는 아직 동성애라는 소수자가 공공연하게, 집단으로 정체성을 드러나거나 담론화하지 않았던 시기다.

© 2015 - StudioCanal
© 2015 – StudioCanal

그리하여 테레즈는 동성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매혹시키는 아름답고, 자기 확신에 가득차 있는 인간에게 매혹당한다. 물론 그녀는 동성애를 배제하는 것 역시 아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지어도 되겠습니까”라거나 “나는 반 시대의 길을 가겠어”처럼 선택이나 배제가 원리적 문제로 설정되지 않는다.

© 2015 The Weinstein Company
© 2015 The Weinstein Company

범죄 소설로 유명한 원작자 하이 스미스(여성이다)의 유일한 로맨스 소설을 읽고 토드 헤인즈는 사랑이 지닌 서스펜스, 추리와 추적의 성격에 매혹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헤인즈는 사랑과 범죄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사랑의 헌신성, 사랑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결단해야 하는 사랑의 공포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일이 일어날까?”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는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이 기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들뢰즈는 프루스트 소설 속 질투에 빠진 연인의 얼굴 기호를 풀어내며 프루스트의 세계를 독해했다. 내면성의 등장과 탐정 소설의 유행을 연관시켰던 벤야민이 착안했던 지점도 그리 멀지 않다.

토드 헤인즈는 “얘는 남자에게 그런 감정을 못 느껴!”라고 외치지않았다. 토드 헤인즈는 테레즈의 ‘각성’을 연출하기보다 ‘혼란’을 연출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그럴듯하다. 삶에서 각성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특히 각성의 운동을 이끌어야 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자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혼란은 더욱 ‘절실’하고 절박한 일이다. 혼란의 경험 없는 각성은 타자에 대한 배제로 이어지기 쉽고, 각성을 맹신했던 선한 자에게 치욕적 과오를 안기기도 한다.

“테레즈와 남자친구 리차드의 육체적인 접촉은 암시되고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들은 서툴다. 그러나 아마 테레즈는 당시의 윤리에 충실했던 모습이기도 하다. (…) 테레즈는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선택하는 인물이다.”

-토드 헤인즈, 포지티브와의 인터뷰 중에서

토드 헤인즈는 그리 다작의 감독이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보면 상당히 완벽주의자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수 영화팬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충 시류를 쫓아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아니다. 그의 인터뷰를 읽어도 그의 명민함과 집요함, 서사와 스타일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드 헤인즈는 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 원작의 영화화를 추진한 것은 아니다. 판권을 가진 제작사가 이미 다른 감독과 작업하고 있던 영화였다. 프로듀싱이 더디게 진행되던 어느 날 헤인즈가 프로젝트에 새로이 합류했다. 케이트 블랑켓은 이미 주연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원작에서 젊은 테레즈는 좀 더 야심이 많은 여성이었다. 남자 친구는 화가였고, 본인은 성공을 꿈꾸는 무대미술가였다. 영화에서 테레즈는 원작의 인물에 비해 자신의 꿈에 대한 강한 확신을 결여한다.

토드 헤인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을 강조했다. 특별한 기벽, 놀라운 선택을 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고, 폭력적일 만큼 몰아치는 정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통받는 이야기, 그 와중에 계속 성장하고 좌절하며 선택하는 이야기. 그래서 테레즈는 더 사소한 인물로 설정된다.

3. 헤인즈는 왜 동성애영화라는 ‘규정’을 완곡하게 거부하는가?

성적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헤인즈는 소수자의 사랑이 사회 속에 조금씩 용인되어 온 역사를 회고한다.

“(영화 속 배경인 1950년대 초 뉴욕에서) 사회는 결코 영웅적이지 않은 개개인에게 대단한 압박을 준다.

[캐롤]에서 나는 개인의 욕망과 욕망이 수반하는 장애물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는 모든 위대한 사랑 이야기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만남을 방해하는 이 두 가지 상반된 힘(욕망과 장애물)을 발견한다. 진보적인 오늘 우리 사회에서 거의 모든 이들은 커플이 될 수 있다. 나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금기를 지닌 설명하기 힘든 시대와 장소를 다시 발견해야 했다.

나는 동성애 이슈를 위해 행동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한 등장인물의 선택을 통해 참으로 흥미로운, 이 시대에 숨겨져 있던 서브컬처의 표현과 관련된 이 순간들을 탐색하고자 했다.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게이와 레즈비언의 창의성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배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지닐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사회 내 주변성을 상실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토드 헤인즈, 포지티브와의 인터뷰 중에서

그가 왜 50년대 일반적인 사랑의 ‘양태’와 다른 사랑의 양태를 발견하고, 두려움 없이 경험했던 두 존재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가 ‘동성애 이슈’를 부각하려는 영화가 아니라고 강조하는지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말은 더 많은 관객을 겨냥하는 말, 흥행을 위한 말이 아니다. “동성애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하나의 저항운동이었던 시대 ‘이후’의 세계에서 그는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를 획득한다.

캐롤

[캐롤]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캐롤]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금 세 가지의 시간과 장소가 있다.

우선 영화의 배경이 된 1950년대 초반 미국 뉴욕이라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 그리고 만개했던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시대, 하위문화로서 동성애 창작물의 에너지가 넘쳤던 시대 이후 동성애라는 사랑의 방식과 성적 정체성의 방식과 존재가 ‘좀 더’ 일상화되고, 동시에 덜 전투적인 무엇이 된 시대와 장소에 서 있는 영화감독의 시간이 있다. 마지막으로 아직 동성애라는 것이 격렬한 사회적 금기의 대상인 동시에 사회적 담론투쟁에 겨우 진입하는 한국이라는 시간과 장소 속 관객의 시간이 있다.

자신의 시간과 공간의 이슈 속에서 절박하게 세계-작품을 보는 것은 뜨거운 일이다. “크게 감동”받고 “내 삶을 돌이켜보는” 작품의 경험을 우리는 강조한다. 그러나 관객이 자리 잡고 있는 시공간의 컨텍스트와 (뜨거운) 시대의 창이 모든 시간 (영화의 시간, 감독의 시간)을 다 휩쓸어버려야 할 필요는 없다.

휩쓸지 않고 이 각각의 다른 시대들이 ‘착오’를 빚으며 조우하고 긍정적 오독을 낳는다면 새로운 감정과 감각이 피어날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부디 좀 더 풍요로운 영혼을.

4.

[캐롤]에서 ‘두 여성의 사랑’이라는 특수성을 ‘의도적으로’ 제거하여 해석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우스꽝스러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캐롤]을 꼭 ‘동성애 영화’로 규정하는 시도는 여러 시도 중 하나면 족하다.

모두가 [캐롤]을 동성애 영화라고 규정하며 응원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않더라도 우리는 ‘이것은 무엇입니다’, ‘이것은 단지 무엇입니다’라는 태그, 몇 점이라는 별점과 몇 줄의 감상평이 대세를 장악한 세계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단정된 해석, 축소된 해석의 세계에서 메말라가는 영혼을 거두어들이며 힘겹게 살고 있는 나는 ‘동성애 영화’라는 ‘딱지 붙이기’가 재미없다.

너무 뜨겁고 너무 빠른 ‘동시대’의 담론 속에서 영혼 지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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