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배우 혹은 매혹적인 그림으로 채워진 포스터는 대중들을 사로잡다 못해 누군가는 그걸 몰래 뜯어가려는 현상까지 벌어지게 마련이다. 1895년 1월 초 프랑스 파리의 어느 연극 공연 포스터도 그런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전설의 시작, ‘지스몬다’ 포스터
화제의 포스터는 그 이전 연극 [살로메]로 성공을 거두고 있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신작 [지스몬다]를 알리고자 갑작스럽게 의뢰를 맡긴 인쇄소가 시간에 쫓기며 만든 결과물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주문을 받았던 인쇄소는 간판급 화가가 연휴를 맞아 장기간 자리를 비운 상태라 의뢰를 받기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손 빠른 무명의 인쇄공이 나서 2주 동안 석판화를 만들어 내놓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아르누보’ 그래픽 디자인 열풍
그 포스터는 알폰스 무하라는 체코 출신의 디자이너가 평소 삽화와 목판화에 일가견을 보이던 중 재직 중이던 인쇄소의 다급한 상황을 만나 그 솜씨를 한껏 발휘한 것이었는데 그 작품은 향후 파리를 중심으로 두 가지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아르누보 미술 형식은 본래 특정한 이름이 없이 그저 ‘새로운 예술’(아르누보) 혹은 ‘젊은 양식’(유겐트 스타일)이라고 불리며 유럽 전반에서 동시대적으로 발생한 미술 양식이었는데,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당시 대중의 일상 속 미술이 더욱 실용성만을 우선 추구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젊은 화가들이 ‘자연’을 원안으로 현대인의 가구나 건축물 혹은 일상 소품에 나무나 수풀에서 온 듯한 유려한 선과 동식물의 자연적인 생태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알폰스 무하가 포스터를 통해서 선보인 미술은 아르누보 디자인의 모든 특징을 담고 있었기에 그의 이름이 마치 아르누보를 뜻하는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대중에게는 무하 스타일이 곧 아르누보 스타일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무하는 정통 화단의 화가들과 달리 포스터에서 두각을 드러낸 만큼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상업 디자인 분야에서 존재감을 더해갔다. 연극 포스터는 물론 담배나 샴페인 같은 기호 상품, 자전거나 과자 같은 제품에 이르기까지 무하의 손을 거쳐 아르누보는 대중의 삶으로 파고들었다.
알폰스 무하의 미학적 특징
알폰스 무하는 아르누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그만의 독특한 양식을 완성해가고 있었는데, 항상 단순하기보다 정교하고 유려한 곡선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생태를 표현하고 그 중심에 여인을 놓되 여인의 모습은 그가 갖춘 외양의 몸매나 얼굴보다 내면의 심리를 의상과 소품으로 발현시켰다.
무하가 그리는 작품 속 여성의 모습은 이처럼 성적 대상화와는 거리가 멀어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욱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여성의 의상은 항상 슬라브 민족의 전통의상과 유사한 것도 특징이었다.

체코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나 성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바로크 미술에 큰 영향을 받았던 무하는 처음부터 정통 회화보다는 건물 장식용 그림이나 연극 무대에 쓰일 디자인을 그리면서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던 것인데, 무하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디자인이 그저 아르누보로만 불리는데 반감을 표하기도 했다.
알폰스 무하가 생각하는 그의 디자인과 철학은 오로지 그가 살았던 체코의 문화와 슬라브 민족의 전통적인 예술 형식에서 온 것이었다.
남부 슬라브나 동부 슬라브가 미술 양식에 사람 표현보다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무하는 서부 슬라브의 종교와 문화의 영향으로 적극적으로 사람을 그리는 것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상업적인 성공 이후 오히려 무하는 그의 근원적인 미술과 철학에 대해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표현을 시도하려 했다. 무하의 뛰어난 미술은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부터 황제의 특별 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정작 무하는 번민에 휩싸였다.
체코와 슬라브 민족운동을 위한 헌신
무하가 지냈던 체코의 유년시절은 당시 그 지역의 민족 부흥 운동이 무척 열띠던 시기였다. 그랬던 그의 미술 활동이 체코를 억누르고 있던 제국으로부터 치하를 받게 되니 무하 자신에게는 큰 곤욕이었다.
그는 그렇게 남은 생애 동안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자신의 그림 양식으로서 표현하고 알리고자 했는데, 그의 그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1918년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벗어나 국가적인 민족 통합을 이루며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탄생시키자,
무하는 새롭게 탄생한 나라의 우표와 지폐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며 슬라브 민족의 자긍심을 표현하는 한편 복권 포스터까지 맡아 슬라브 민족을 위한 활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의 체코를 위한 활동은 거의 모두가 무보수로 이뤄졌지만 1939년 나치 독일에 의해 체코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해체되자 무하는 게슈타포에 의해 퇴폐주의를 지향하는 반국가적 화가라는 허울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안타까운 생을 마무리한다.
아르누보의 짧았던 전성기만큼 무하의 사후 곧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무하의 스타일은 1960년대 이후 오히려 재평가를 받으며 다시 새로운 모던 그래픽 디자인으로서 조명을 받게 된다.
![1926, [슬라브의 역사 신격화 - 인류를 위한 슬라브 민족] 무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출범 후에는 범인류애적인 경향을 보였다.](https://slownews.kr/wp-content/uploads/2016/11/9a2877f1ce654fe1baaf5d8ff0dca00d.jpg)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계승된 무하의 유산
그런 무하의 영향력은 대중들이 예상치 못하던 분야에서 드러나기도 했는데 1960년대 중반부터 만화 문화가 발달하고 있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시절 무하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들을 재조명하며 무하 스타일을 만화에서, 애니메이션에서 끊임없이 드러내고 영향받으며 상업 예술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와중에 무하의 변종 후예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순수 미술과 상업 미술의 경계를 아름다운 그림들로 허물며 당대의 대중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던 무하의 예술적 유산과 흔적이 오늘날 최첨단의 그래픽디자인과 상업미술의 결정체인 만화 분야에서 지속해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무하 자신이 인류가 소유하게 되는 문화의 속도보다 100년 정도를 앞서 살았던 예술가임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예술의 전당에서 2016년 12월 3일부터 2017년 3월 5일까지 개최되는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展]과 후원 관계는 없습니다. 별개로 같은 주제의 좋은 전시 행사가 있음을 위와 같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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