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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 혐오, 강간, 동성애
-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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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cap font=”arial” fontsize=”33″]로마제국 이후 스페인[/dropcap]은 학구적이고 문명화된 가톨릭 사회를 유지했다. 피레네 산맥으로 유럽 대륙과 분리되어있는 덕분에 다른 나라의 영향은 적게 받았으며, 기후 역시 따듯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혜택을 누렸다. 르네상스 시대 스페인의 해군은 유럽에서 최강 전력을 자랑했으며, 육군 역시 막강하여 유럽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끊임없이 개입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중세 스페인의 풍경
아프리카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던 탓에 스페인에는 근면한 무슬림이 많이 이주하여 살았으며 유대인도 상당수 정착해 살았다. 가톨릭을 믿는 귀족이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지만, 종교적으로 상당히 관대했기에 여러 종교가 어울리며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특히 스페인의 유대인은 ‘세파르디 유대인’(Sephardi Jews)’라고 불리며, 다른 지역의 디아스포라(유랑) 유대인의 영적, 지적 모범이 되었다.
종교적으로 관대한 문화 속에서 유대인도 상당히 많은 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콘베르소’(converso)라고 불린 이들은 고위관료, 성직자, 자본가, 의사로 성공을 하며 높은 명망을 누렸다.
종교재판의 기원
교황 식스토 4세(라틴어: Sixtus PP. IV, 이탈리아어: Papa Sisto IV, 1414-1484, 제212대 교황, 재위: 1471-1484) 는 1476년 스페인의 왕 페르난도 2세와 여왕 이사벨 1세에게 종교재판소를 독자적으로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초창기에 종교재판소는 유명무실한 기관에 불과했다.
하지만 1483년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 토마스 데 토르퀘마다(Tomás de Torquemada; 1420-1498)가 종교재판소장으로 임명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토르퀘마다는 평화로운 스페인에 분열을 획책하며 콘베르소들이 왕권을 노리고 있다는 온갖 억측과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린다. 이들은 겉으로만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뿐 여전히 비밀리에 히브리 신앙을 유지하면서 권력을 찬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음해하였다.
평화, 안정, 번영을 한껏 누리던 왕실은 편집증적 발작을 앓듯이 한순간에 토르퀘마다의 꾐에 넘어간다. 왕과 여왕은 종교재판소 집행관들에게 가톨릭 신앙에서 벗어난 행위나 관습을 엄단하라고 명령한다. 토르퀘마다는 자신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저인망식 사상 검증에 착수하였고,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반항하는 사람은 누구든 잡아들였다. 본격적인 테러 정치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종교재판의 절차
종교재판소에는 온갖 밀고들이 쏟아져들어왔다. ‘이단’은 사실 어디든 갖다 붙일 수 있는 매우 편리한 혐의였다. 일단 이단이라고 고발된 사람은 납치하듯 끌려가 쥐가 우글거리는 독방에 갇힌다. 그리고 자신의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는다. 피고은 자신을 누가 고발했는지, 심지어 자신이 무슨 혐의로 잡혀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초현실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며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만 했다.
이단 혐의를 조사하는 방법은 거의 예외없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이었다. 권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고문을 할 때는 재판소가 지정한 의사 한 명, 공증인 한 명, 종교재판관들이 배석했다.
이단 혐의로 끌려가면 무조건 고문을 받았다. 이 과정을 피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13살 어린 소녀도, 80대 할머니도 밧줄에 매달았다. 그래도 임산부에게는 약간의 호의를 베풀었다. 출산할 때까지는 고문하지 않고 감옥에 가둬놓기만 하였다. 물론 출산하고 난 뒤 곧바로 고문실로 끌려갔다.
고문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단’이라고 자백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대부분 화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의 재산은 교회가 몰수했다. 몰수한 재산 중 20~50%는 익명의 고발자에게 주었으며, 나머지는 교회와 군주가 나눠가졌다.
이렇게 이단을 고발하면 경제적 이익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온갖 ‘창의적인’ 이단 고발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이미 죽은 사람들이 이단이었다는 고발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피고가 이미 죽고 없는 경우에는 재판 과정이 훨씬 짧게 끝났기 때문이다. 재판에 올라가면 대부분 이단이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고, 곧바로 유산을 빼앗을 수 있었다.
종교재판소는 스페인 전역을 순회하면서 재판을 진행했다. 종교재판이 휩쓸고 간 도시는 한 마디로 쑥대밭이 되었다. 실제로 종교재판관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저항하는 도시들도 있었지만, 종교재판을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았다.
자백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재판에서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마지막 운명을 기다려야 했다. 지역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종교재판소는 오토다페(auto-da-fé: 믿음의 행위)라고 하는 성대하고 요란스러운 피날레 의식을 펼쳤다. 이단들을 한 자리에 모아 화형시키는 것이다.
넓은 광장에 화형대를 설치하고, 화형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높은 단을 만들어 종교재판관과 귀빈들을 위한 관람석을 마련하였다. 시민들도 한명도 빠짐없이 광장에 나와 화형식을 지켜봐야 했다. 나오지 않은 사람은 죄인을 동정하는 이단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빠질 수 없었다.
오토다페가 시작되면 먼저, 무덤에서 파낸 이미 죽은 이들의 시신과 고문 과정에서 절단된 신체 토막들을 담은 무개차가 입장한다. 그 뒤로 이단으로 판결된 이들이 일렬로 사슬에 묶여 끌려 나온다. 말뚝에 이단들을 묶어 세우고, 장작더미 위에 시체토막들을 쏟아붓는다. 이 상태에서 복잡하고 정교한 미사를 거행한 다음,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다. 희생자들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울부짓음이 도시 전체를 뒤덮는다. 비명소리가 잦아들고 조용해지면, 깜빡이는 불씨를 재로 덮어 끈다. 이로써 모든 절차가 끝난다.
종교재판이 남긴 트라우마
자신의 이웃들, 또는 가족이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주민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라도 보였다간 이단으로 몰려 자신도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감정을 억누른 채 극심한 충격 속에서 집으로 돌아간다. 문을 잠그고 공포 속에서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자신이 혹시라도 부주의한 말 한 마디 던진 적 없는지 돌아보며 공포에 떤다.
아이들 앞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부모가 불경한 말을 내뱉으면 곧바로 신고하라고 아이들을 세뇌했기 때문이다. 하찮은 실수 하나로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을 눈앞에서 목격한 이들에게 심리적 공포와 억압은 말 그대로 목을 졸랐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재판관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일상적인 행사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며 하품을 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오토다페는 스페인 전역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이처럼 대규모로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의는 일어난 적이 없다.
1789년부터 1801년까지 종교재판소 총무를 지낸 성직자이자 역사가인 후안 안토니오 요렌테(Juan Antonio Llorente)에 따르면, 종교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480년부터 300년 동안 4만 명이 이단으로 화형에 처해졌으며 40만 명이 ‘중벌’로 다스려졌다.
유대인과 무슬림 추방
스페인 종교재판을 돌아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나는데, 기독교가 이단으로 속아내 가장 먼저 처벌한 이들은 바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유대교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던 유대인은 오히려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토르퀘마다는 종교재판을 진행하면서 유대인을 모조리 스페인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인종 청소’에 동의하였고, 결국 1492년 3월 30일 세례 받지 않은 모든 유대인들을 스페인에서 영구히 내쫓는다는 추방령을 선포한다. 유대인들은 90일 안에 떠나지 않으면 모조리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추방령이 선포되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사는 이웃이었던 유대인의 불행한 처지를 무수한 스페인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당나귀 한 마리를 주며 집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도 했고, 스페인에서 빠져나가는 유대인들이 탄 배를 습격하여, 이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유대인은 갈 곳이 없었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을 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유대인 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수한 유대인이 바다 위에서 질병, 기아로 죽었으며 난파되어 전부 수장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엑소더스는 유대인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이자, 스페인의 수치스러운 역사로 남았다.
유대인을 추방한 뒤 다음 타겟은 무슬림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슬림을 모리스코(Morisco)라고 불렀는데, 사실상 당시 무슬림의 상당수가 모리스코였다. 모리스코는 자신들이 스페인을 통치하던 시절 기독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베풀었던 사실을 환기시키며 저항했지만,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막무가내로 모리스코들을 잡아 고문하고 불태워 죽였다.
결국, 1502년 2월 12일 무슬림 추방령이 선포된다. 4월 30일까지 스페인을 떠나지 않으면 300만 명에 달하는 무어인들은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스페인의 성직자 블레다(Friar Bleda)는 이 포고령을 일컬어 “사도의 시대 이후 스페인에서 벌어진 가장 영예로운 사건”이라고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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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의 발견
엑소더스의 행렬 와중에 스페인을 떠난 또 다른 배 한 척이 있었으니,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끄는 항해선이었다. 콜럼버스는 이 항해를 통해 장차 스페인에 어마어마한 신대륙의 부를 가져다준다. 여기에도 상당한 역설이 숨어있는데,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콜럼버스 역시 유대인 혈통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양쪽 두 대양으로 고립되어있던 신대륙은 다른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종교, 언어, 지혜를 축적해온 상태였다. 상당히 많은 부족들이 여전히 사냥·채집 단계에 머물러있었으나, 농경·가축 단계에 들어선 부족도 있었다.
특히 북아메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이로쿼이 연맹(Iroquois Confederacy)은 수백만km² 초원에 펼쳐져있는 수천 개의 작은 부족들로 이루어진 연맹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의 정치체제는 매우 효율적이면서도 세련된 것이었고, 이들의 많은 법규와 국가 운영 방식은 오늘날 미국 헌법의 뼈대가 되었다.
남아메리카에는 최고의 건축술을 통달한 잉카가 있었다. 그들은 현대의 전문가들도 풀지 못하는 복잡한 기술적 문제를 이미 푼 첨단 문명을 이룩하고 있었다. 마야의 웅장한 유적에 새겨진 그림 문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세련된 문화를 즐겼는지 보여준다. 별자리를 묘사한 아즈텍의 테이블을 보면 고도의 수학이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자가 있었던 아즈텍, 마야, 잉카는 가부장적인 질서가 지배했지만, 문자가 없는 문화들은 전반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남녀평등을 유지했다. 예컨대 북아메리카평원에 살던 원주민들 중에는 추장을 나이든 여자들끼리 모여 선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상 거의 모든 원주민이 여자를 존경했으며, 다양한 형태로 ‘위대한 어머니’를 섬겼다.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변함없는 믿음이 그들의 기본관념 속에 박혀있었다.
유럽인들이 처음 찾아왔을 때 원주민은 자신이 사는 땅을 찾아온 낯선 탐험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자신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미망과 일신교라는 광기에 홀려있던 유럽인은 그러한 호의를 받고도 수천 년 만에 재회한 자신들의 형제자매들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단정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을 아주 쉽게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 것은 바로 ‘그들이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작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는 그들은 바로 그 시간에도 자신들의 땅에서 사람의 사지를 찢고 불태워 죽이는 야만적인 행위를 하느라 모두 미쳐있었다.
성직자 눈에 비친 ‘백인 악마들’
곧이어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다. 1492년 남북아메리카 모두 합쳐 8,000만 명 이상 원주민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부터 300년 동안 ‘탐험’, ‘정복’, ‘식민지개간’, ‘정착’, ‘개척’ 등 온갖 명분으로 들이닥친 유럽인에 의해 원주민 대부분은 몰살당한다. 오늘날 원주민의 수는 대략 1,00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원주민 대다수는 홍역이나 천연두처럼 구세계가 몰고 온 낯선 질병으로 사망했지만, 많은 수가 농장에서 노예로 일하다 굶어죽거나 맞아죽었다. 또는 반짝이는 금속을 홀린 듯 쫓아다니다 총에 맞아죽기도 했다. 유럽인은 저항하는 원주민을 매우 가혹하게 처벌했다.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남자는 성기나 팔, 다리를 잘랐고, 여자는 가슴을 도려냈다.
몇몇 성직자의 눈에도 백인은 악마의 현신으로 보였다. 어떤 성직자는 원주민에게, 아이를 낳는 것은 백인 악마들에게 새로운 노예를 선사하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 아기를 낳지 말라고 설교했다. 스페인사람들은 특히 혹독하게 원주민을 다루기로 유명했다. 이들이 부리는 노예 중에 자살한 원주민만 수천 명에 달했다.
유럽인들은 오염되지 않은 신대륙의 자연을 굴복시키고 정복해야 할 미개한 적으로 간주했을 뿐이다. 그들은 때묻지 않은 순결한 자연을, 그리고 원주민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했다.
원주민에게서는 배울 게 없다는 자만심에, 유럽인들은 이들 문화의 잔재를 모조리 파괴한다. 그리고 그들을 개종시킬 생각만 했다. 침략자들이 대대적으로 휩쓸고 간 뒤 곧바로 ‘선교사’라는 사람들이 들어와 원주민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면 ‘신성한 책’을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휴머니스트 몽테뉴는 신대륙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 [식인종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쓴다.
“그 나라(원주민의 아메리카)에 관한 글을 아무리 읽어봐도 거기서 야만적이거나 미개한 것을 나는 하나도 찾아낼 수 없었다. 우리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야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몽테뉴)
몽테뉴는 이 글에서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는 것과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고문하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야만적인 행위냐고 묻는다. 늘 유쾌하고 행복하게, 법 없이도 평화롭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인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냐고 지적하며 원주민을 학살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을 혹독하게 비난한다.
“아메리카의 무수히 아름다운 마을들이 약탈당하고 폐허가 되었다. 수많은 나라가 파괴되고 무너졌다. 셀 수 없이 많은 무고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성별, 지위, 나이와 무관하게 무참히 학살당하고 유린당했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롭고 아름답고 훌륭한 곳을 고작 진주와 후추를 거래하기 위해서 훼손하고 더럽히고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 피도 눈물도 없는 승리여, 아, 비열한 정복자들이여!” (Edward Dowden, Michel de Montaigne, 144)
인쇄 기술의 발명과 더불어 확산된 종교적 광풍에 휩싸인 15세기 유럽이 아닌 다른 시기 또는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다면 어떠했을까? 역사의 흐름은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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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니벌(Cannibal; 식인종/ 식인의)에 관하여
쿠바가 위치한 카리브(Carib; 캐러비안) 바다를 스페인 사람들은 ‘캐니벌스'(Canibales)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에 사는 부족들이 식인을 한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지면서 ‘캐니벌(cannibal)’이 식인종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식인 풍습은 대부분 극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만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다. 고기를 마음껏 먹는 축제(Carnival; 카니발, 여기서 ‘carn’은 고기를 뜻함)과는 어원이 다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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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대왕은 인도의 드라비다, 트라키아의 스키타이와도 만나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못지않게 매우 ‘이국적인’ 사람들이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은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더라도 그 지역의 종교를 말살하거나 원주민들을 붙잡아 노예로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면 어떠했을까? 그들을 몰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고 문화를 말살하기는커녕 그들을 예우하며 동맹을 맺고 무역을 활성화했을 것이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북유럽 오지에서 마주친 온통 시퍼런 물감을 뒤집어 쓴 켈트(Celts)와 픽트(Picts)라는 공포스러운 ‘야만족’에게 이런 정책을 취했다. 유럽에 날뛰던 야만인들에 비하면 아메리카원주민들은 그야말로 우아한 신사들이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는 탁월한 통찰력과 경계없는 호기심과 관대함으로 이민족의 문화를 탐구하고 기록한 헤로도토스 같은 위대한 인물이 존재했지만, 2000년 뒤 이들의 후손들이 신대륙을 발견한 시점에는 헤로도토스 같은 인물이 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을까?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코카서스인(소위 유럽의 ‘백인’ 민족이 주종을 이룸)이 저지른 인종 학살은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든 기독교 문화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성스러운 책’을 섬기는 이들의 행위가 이 책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과 정반대를 향했고, 그런 역사가 끝없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럽인은 최근까지도 이러한 괴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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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 크레센도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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