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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1.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2.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3.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4.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5.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6.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7.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혐오, 강간, 동성애
  8.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9.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10.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11.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12.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13.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14.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15.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16.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17.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18.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19.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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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초승달 문화가 서쪽으로는 유럽,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퍼져나갔으나, 그 너머 중국에는 미치지 못했다. 인도 북동부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대규모 인구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히말라야 서쪽과 동쪽의 문화적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초승달 문화’는 서쪽으로는 유럽, 동쪽으론 인도까지 퍼졌지만, 중국에는 미치지 못했다.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이 그 이동을 막았기 때문이다. (출처: 구글지도)

한자 문화권의 기본적인 사상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은 바로 태극이다. 음양의 조화, 남자와 여자의 평등과 상보성을 상징한다. 두 개의 물방울이 머리에서 꼬리까지 서로 부드럽게 휘감으면서 상대편 영역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물방울 머리에는 상대영역의 정수를 담은 작은 원이 있다. 서로 상대 영역의 씨를 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문화 위에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가부장제 문화를 일궈냈다. 특히 최근 1,000년 동안 중국에서 여자의 지위는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일부다처제가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았으며, 여자들에게는 어릴적부터 남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낮은 지위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세뇌했다.

하지만 오늘날 쏟아지고 있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중국에도 기본적으로 평등한 문화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문자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 ‘가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가문을 상징하는 글자에 모두 ‘여자’가 들어있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생겨난 중국 최초의 8성. 모두 여자(女)를 포함하고 있다.

알파벳 문화 vs 한자 문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자 유물은 기원전 1,500년경 거북 등 껍질과 뼈에 새긴 것이다. 따라서 한자는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결국 한자가 등장한 시기와 지중해 연안에서 알파벳이 등장한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알파벳은 단순한 기호들을 일렬로 나열하는 데 반해, 한자는 기초 한자(부수)들을 결합하여 의미를 만들어낸다. 알파벳은 선형적인 분석 능력을 요구하는 반면, 한자는 통합적 종합 능력을 훨씬 많이 요구한다. 그래서 한자문화에서는 글자의 형태 자체를 그림처럼 음미하는 예술(서예; 캘리그라피)이 고대부터 발전했다. 이에 반해 알파벳 문화에서는 글자의 형태와 의미를 별개라고 여겼다.

중국 동진 시대의 서예가 왕희지(303-361)는 해서, 행서, 초서체를 완성하고, 서예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위 사진은 왕희지가 완성한 해서체를 보여주는 ‘악의론’ 중 일부)

알파벳 문화는 공격적으로 전쟁하고 정복하고 탐험하는 데 집중한 반면, 한자 문화는 자신의 영토를 높은 장벽으로 에워싸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는 데 집중했다.

알파벳 문화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이에게 주입하고자 열을 올렸고, 그로 인해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박해하고 살육하고 끝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반해 한자 문화권에서는 종교를 포용하는 전통이 강하다. 종교적 이유만으로 박해하거나 전쟁하는 일은 한자 문화 전통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알파벳 문화에서는 여자를 상징하는 뱀이 저주, 억압, 정복의 대상으로 전락한 반면, 한자 문화에서는 추앙받고 사랑받는 숭배의 상징이 되었다. 여신의 상징 뱀이 권력과 행운을 가져다주는 상서로운 ‘용’으로 승천한 것이다.

 

오늘날 서양 문명의 기틀이 된 다섯 가지 추상적인 개념―형상이 없는 신, 성문법, 사변철학, 수학, 이론과학―은 한자 문화에서 발전하지 못한다. 한자 문화에서는 기본적으로 ‘형상 없는 신’이라는 개념 자체에 관심이 없다. 보다는 관습에 의존해 살아가며, 사변철학보다 실용적인 문제에 집중한다. 그 결과 고등수학과 이론과학도 발전하지 못했다.

알파벳 문화는 기본적으로 통합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다. 낱낱이 흩어지는 알파벳이라는 문자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듯, 영토를 가르고, 까다롭게 따지고, 자신과 남을 구분하고 쪼개려고 노력한다. 자기만의 방언과 문자,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며 끝없이 갈등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서양의 역사이자 운명이었다.

이에 반해 한자 문화에서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하나의 통일 정부 아래 유지되어 왔다. 무수한 갈등이 존재함에도,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민족이 하나의 왕조 안에서 살았다. 물론 ‘한자’라는 고정된 문자의 존재 덕분에, 말이 다른 여러 민족이 어려움없이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제국주의가 도래하면서, 마침내 추상적이고 호전적인 알파벳 문화가 한자 문화를 침탈하고 식민화하는 데 성공한다. 알파벳 문화는 정복욕에 불타는 남자, 한자 문화는 박해받는 여자 역할을 했다.

동서양이 처음 맞부닥친 1회전에서 서양은 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태극음양처럼 알파벳과 한자는 상반되는 동시에 상보적인 인류의 고귀한 문화다. 이 두 문화는 우리 인류가 다음 단계로 진화해나가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다.

공자 vs. 노자 

중국를 대표하는 철학자 하면 당연히 공자와 노자를 떠올릴 것이다. 이들은 ‘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상정하지 않는 철저한 인본주의자들로, 삶에 대한 실용적 가르침을 제시한다.

공자는 위계 질서를 강조하는 남성적 권위와 문화를 옹호하는 반면, 노자는 평등을 강조하며 여성적인 관점과 자연을 추구한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 공자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고전을 공부하라고 처방하는 반면, 노자는 직관을 따르라고 처방한다.

공자보다 조금 먼저 등장한 노자는 신비에 싸여있는 인물이다. 심지어 그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인지 아닌지도 분명하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주나라의 왕실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고 한다. 나이가 들었을 때 그는 왕실의 아첨꾼들의 궤변에 환멸을 느끼며 책 속에서 지낸 세월이 덧없다고 결론내린다. 그는 존경받는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속에서 은거하며 살겠다고 마음먹는다.

노자(老子, Laozi, 기원전 604년~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 초, 추정),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 전설에 의하면 노자는 물소를 타고 주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노자의 도(道)는 기본적으로 ‘자연의 길’을 의미한다. 여름날 대지에 쏟아진 빗방울들이 흘러 웅덩이가 되고 개울이 되는 것이 바로 도(道)다. 또 이 물줄기들이 시내가 되어 강으로 모이고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도(道)다. 바다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구름을 만드는 것도 도(道)다. 그렇게 만들어진 적란운이 공기와 마찰하며 대지 위에 소중한 물을 다시 뿌려주는 것도 도(道)다. 한여름 쏟아지는 빗물이 우리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다시 개울이 되고 시내를 이루는 것도 도(道)다. 우리는 이처럼 도(道)에 깊이 젖어서 살아간다.

세상을 인위적인 범주로 구분하는 탓에 우리는 도(道)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문화적 관습의 베일을 벗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도(道)의 흐름 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와 섬유소도 道의 일부이기에, 우리는 해초처럼 그 흐름 속에서 부드럽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자연의 리듬 속에서, 이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간다면 정치, 제도, 남녀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도(道)라는 강물 속에서 평온하게 흘러갈 것이다.

노자는 이것이 너무도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인류가 그토록 공을 들여 고안해낸 온갖 책략들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인간의 책략은 ‘자연의 길’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책략 중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언어라고 말한다. 그래서 [도덕경]을 시작하는 첫 두 행은 다음과 같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

이에 반해 공자는 언어를 바로잡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다.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국가를 이끄는 중책을 맡으면 어떤 일을 먼저할 것인지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 그림: 송나라 마원 작)

이름을 바로잡겠다.
정명(正名)

언어와 이름에 현혹되지 말고 신경쓰지 말라는 노자의 가르침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름을 붙이는 것, 신분, 지위, 성씨를 쓰는 것은 모든 가부장문화의 기본 요소다.

유교는 가족, 하늘, 정부, 동료, 친구, 적, 조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윤리적인 지침을 꼼꼼하게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에 관한 내용은 단 한 줄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 한 줄도 아무 근거도 없는 여성혐오발언에 불과하다.

물론 붓다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공자의 가르침 역시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쳐 전해지는 과정에서 가부장적 가치관에 의해 왜곡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이든 노자가 은거하고 있는 곳에 공자가 직접 찾아와 지혜를 구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정치적인 야심에 불타는 성실한 교사였던 공자는, 당시 여러나라를 옮겨다니며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받아들이도록 봉건 영주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노자는 공자의 논리적인 주장을 조용히 듣기만 할 뿐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맨 왼쪽)와 공자가 만나는 모습. 2000년 전 한나라 시대 고분벽화.

공자 철학의 출발점은 남녀 사이의 불균형한 관계에서 시작된다. 남자는 우선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그 다음 아내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그 다음 자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가족 안에 이러한 지배-종속관계가 확립되지 않으면, 그보다 큰 사회는 지탱될 수 없다고 믿었다.

공자 철학에서는 남자만이 재산을 관리할 수 있고, 여자는 어떠한 재산도 소유할 수 없다. 공자는 가족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다음 중요한 관계는 형과 아우의 관계다. 공자의 가르침에서도 도(道)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그가 말하는 도(道)는 노자와는 전혀 달리 가족의 수직계층화를 정당화하는 근원적 이유를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자 철학과 공자 철학은 두 개의 싸인 곡선처럼 중국의 긴 역사 속에서 서로 얽히며 경쟁했다. 이들은 도교와 유교라는 학파를 형성하며 서로 멸시하고 조롱했다. 노자가 도(道)를 따르는 것의 가장 큰 장애물로 ‘언어’를 꼽았던 것처럼, 중국에서 문자가 융성할 때마다 유교가 부흥하고 도교가 쇠퇴했다. 그리고 유교가 부흥할 때마다 여성의 지위는 추락했다.

10세기 중국에서 제지술과 인쇄술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문자가 급격히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 유교는 대대적인 부흥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기이한 풍습이라 할 수 있는 ‘전족’이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위기를 느낀 도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노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결정을 내린다.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모델로 삼아 도교를 개혁한 것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기존에 내려오던 다양한 경구와 책들을 수집하여 ‘도교 경전’을 만드는 것이다.

도장(道藏; Daozang; 도교의 경전). 최초의 도장은 1016년 완성되었다. 총 5,48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거대한 도교 사원 ‘도관'(道觀; daoguan)을 곳곳에 짓기 시작한다.

도교의 경전에 해당하는 ‘도장’은 1016년, 총 5,485권으로 처음으로 완성됐다. 더불어 곳곳에 도교 사원을 짓기 시작한다. 이런 일들이 노자의 가르침을 정면에서 반하는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도교는 불교 승려를 본따 사제단을 만든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사제는 대부분 남자로 채웠다. 그리고 불교 승려들처럼 도교 사제들에게 평생 독신으로 살며 수절하도록 한다. 그리고 마침내 노자를 신으로 받들기 시작한다. 인위적으로 꾸민 ‘도관’에서 ‘도사'(도교 사제; 道士; Daoshi)들이 ‘도장’을 낭송하며 정교하게 짠 의례를 거행하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도사의 모습(위). 그리고 광저우에 있는 노자 청동상

노자가 [도덕경]을 쓴 지 1600년이 지난 뒤, 자연의 흐름을 막지 말고 그 흐름 속에 몸을 맡기라는 가르침을, 사람들은 거꾸로 해석하여 제단을 쌓고, 사원을 짓고, 욕망을 꺾고, 이름을 붙이고, 문자로 진리를 고정하고, 율법을 만들고,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를 세운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한편으로 ‘문자’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문자를 거부하는 가르침이나 지혜는 대부분 인류 역사 속에서 흔적없이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엄격한 가부장을 내세우는 아버지 유교가 지배집단의 종교였던 반면, 도교는 (어쨌든)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민간신앙으로 자리잡는 데 성공한다. 중국의 도교는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지배층을 중심으로 전파되기도 하였지만, 민중 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우리 땅에는 ‘여신 붓다’가 먼저 들어와 민중들의 삶 속에 탄탄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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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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