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이 글은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를 고려해 스포일러를 최소화했습니다. 더불어 영화 속 시대 배경을 설명하고, 감독의 전작들과의 관계를 풀어냄으로써, 좀 더 풍부한 영화적 맥락을 전달해 독자의 관극 행위에 도움이 되고자 한 글입니다. 그럼에도 스포일러의 불안이 염려되는 독자께서는 글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box]
박열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갔다. 박열의 사상적 기반은 아나키즘이었다. 박열은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흑도회·흑우회·흑로회 등 단체에서 활동했고, 1923년에는 연인 가네코 후미코와 ‘불령사’를 조직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대에 반일운동을 활발히 했던 조선인 청년의 전형적인 자화상일 것 같다. 하지만 박열의 비범한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후 치안 불안이 이어지자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를 하는 등 테러를 일삼고 있다’는 조직적인 선동에 이어 ‘조선인 학살’을 부추긴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은 물론, 조선인으로 오해받은 일부 일본인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박열은 이때 ‘보호 검속’이라는 이유로 체포됐다가, 폭탄 구입 계획이 적발되는 일을 겪는다. 이는 일본 정부에 ‘호재’로 작용했다. 박열과 가네코는 “천황 암살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떠들썩한 화제의 대상이 된다.
내각 총사퇴의 시발점: 박열과 가네코의 ‘데이트’
박열과 가네코의 신화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재판이 진행되자, 박열은 사모관대를, 후미코는 조선식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재판정에 등장했다. 아울러, 박열은 “조선말로 재판을 받을 것이니 통역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5개월여가 지난 1926년 8월에는 일본의 정계까지 발칵 뒤집는 사건이 발생한다. 박열과 가네코가 세련된 옷을 입고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놀랍게도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당시 판사였던 다테마스 가이세이였다.
1926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다테마스 가이세이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그 사진은 1925년 4월 9일에 촬영한 것이다. 취조는 4월 7일 끝났지만, 그로부터 2일 후 박열이 ‘우리 형에게 보내겠다’고 해서 촬영한 것이다. ‘모리 대역범이라고 해도 형제 간까지 죄가 있겠느냐’ 싶어서, 나는 다만 인간애로 사진을 촬영했을 뿐이고, 결코 다른 사람에게 그 사진을 준 일이 없다.“
일본 정계까지 발칵 뒤집힌 이유는, 그들이 명목상 ‘천황 암살 기도범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적들’이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겼고, 판사가 그 상황을 사진으로 촬영하기까지 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은 이 사건에 이어 와타나베은행의 파산 이후 불어 닥친 금융위기까지 맞물려 1927년 4월 내각 총사퇴를 결행한다.
▲재판정에서 조선식 혼인 복장을 착용했고 ▲’역적들’임에도 데이트를 즐긴 것으로도 모자라 ▲ 판사가 사진까지 찍어주는 등 박열과 가네코의 당시 행위는 ‘기행’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기행’으로 보기는 어렵다. 박열과 가네코의 사상적 기반은 아나키즘이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폭력과 차별은 권위와 이념으로부터 비롯되므로, 모든 권위와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의 사상이다. 따라서 박열과 가네코로서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조작된 ‘천황 암살 사건’과 그에 따른 일본의 재판 절차를 따라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박열과 가네코, 그 이후의 삶과 죽음
열성적인 아나키즘 활동을 했던 박열과 가네코는 부당한 권위를 전복하거나 조롱하는 일이 신념화돼 있던 사람들이었다. 훗날 가네코는 형무소에서 옥사해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에 안장됐으며, 박열은 무려 22년 2개월을 복역하다가 해방 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됐다.
이후 박열은 반공주의 노선을 취했으며 ▲일본 내 민단의 창설 개입 후 초대 단장으로서 활동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 유해의 한국 송환을 추진했다. 6·25 전쟁 중 납북돼 북한에서 거주하다가 1974년 평양에서 사망한 것이 그의 일대기였다.
박열이 해방 후 반공주의 노선을 취한 것이 의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독재가 시작된 이후에는 말로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자주 눈에 띄었다.
아나키즘 성향의 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의 단장 약산 김원봉도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연행돼 따귀를 맞는 등 굴욕을 겪은 뒤 월북해 북한 초기 내각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친위 쿠데타 ‘8월 종파 사건’에 휘말려 1956년 이후 숙청당한다.
이준익의 ‘청년’ 3부작: 사도, 동주 그리고 박열
지난 6월 28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신작 [박열]은 박열과 가네코의 일대기를 묘사한다. 재일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폭력, 그리고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층 일본인이 당시 감내해야 했던 고단한 삶을 영화를 통해 드러낸다.
이준익 감독은 무리하지 않는다. 박열과 가네코의 이야기는 첫 만남부터 이런저런 사건을 겪기까지 역사적 흐름에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간다. 박열과 가네코의 ‘사모관대 착용’ 사건과 ‘데이트 사진 촬영’ 사건도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그리고 자극적 묘사보다는,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근본적 신념 ‘아나키즘’을 드러내는 것에 시선을 할애한다.
절망적 상황에 꺾이지 않고 시를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윤동주와 신념을 행동화하는 박열은 삶의 방식이 달랐던 사람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의 기존 작품들 속 인물들과 비교해볼 때, 이준익 감독은 상당히 긴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사도(2015)
사도세자는 편집증적 태도를 가진 아버지 영조와 끝내 화합하지 못한 채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등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다가 뒤주에 갇혀 굶어 죽었다. ‘사도’가 끊임없이 부각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대화와 소통에 실패해 비극을 맞이하는지에 대해서였다.
동주(2016)
윤동주와 송몽규는 ‘광기의 침략 권력’에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이었다. 차분하고 신중한 윤동주는 시를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끝내 최후의 순간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격정적인 성격의 송몽규는 임시정부가 관할하던 군관학교에 입학하는 등 무장투쟁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옥사하는 등 ‘행동’으로 신념을 드러내려고 했다.
사도세자·윤동주·송몽규가 맞이해야 했던 것은 결국 거대한 기성 권력이었다. 사도세자는 ‘왕이자 아버지’였던 영조와 끝내 화합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직접 죽음을 결정했다.
1917년생 동년배였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태어났을 때 이미 ‘일제 강점기’였다. 따라서 세상 그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었고, ‘시대’와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준익 감독이 주목했던 것은, 다른 방식을 취하되 본질에서 하나의 숭고함을 지향했던 사촌 형제의 삶 그 자체였다.
1902년생인 박열은 자라면서 일제 강점기를 맞이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창 후배였을 윤동주·송몽규와도, 이념적 지향과 행동의 방식은 달랐어도,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생각을 했을 것 같지 않다.
즉, ‘당대의 광기’를 마주한 청년들이 어떻게 세상을 극복하려고 하는지를 그려나가는 ‘연작 영화’로 볼 수도 있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아버지였지만, 한편으로 권력과 세상 그 자체였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하더라도 “아들을 손수 죽이겠다”는 결정에 그 어떤 대신들도 감히 이를 말리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영조가 행사했던 왕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권력 그 자체’였던 아버지와 불화를 극복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었으며, 윤동주·송몽규는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다가 목숨을 잃었다. 박열은 가네코를 잃는 비극에 이어 22년 2개월이나 옥살이를 했다.
‘당대의 광기’에 마주 선 청년을 조명하다
저마다의 시대에는 저마다의 아픔과 고난이 있다. ‘옛날에 비하면 너희가 겪는 고생이 무슨 고생이냐’고 말하는 건 그저 ‘꼰대 소리’에 불과하다. 이준익 감독은 ‘옛 청년들’의 다양한 모습을 부각하면서 끊임없이 청년들과의 대화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박열의 기행 아닌 기행도 청년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절대로 꺾여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윤동주·송몽규·박열은 ‘절대로 꺾여서는 안될 그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역사는 그들의 이름과 그 치열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재판 과정에 대한 묘사가 다소 교조적이고 딱딱하다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지만, ‘박열’의 부각은 그런 의미에서 인상적이다. 아울러 ‘대한민국 유일의 일본인 독립유공자’이자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변론을 도맡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에게 조금만 더 시선을 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아울러 남는다.
후세 다쓰지는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이자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전 세계의 문제”라며, 이미 100여 년 전 ‘한반도 문제’의 본질을 통찰했던 사람이었다. 그 신념을 바탕으로, 신념의 행동화와 실현을 위해 일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시대의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럽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죽어갈 것이다.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고, 평화가 있다. 참으로 선량하고 아름다운 허무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 박열의 선언[footnote]이호룡, 제45권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8, 99쪽[/foot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