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곽재우 장군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있는 자료 없는 자료 모두 구해 읽게 되었다. 여태 곽재우 장군의 일대기를 밝혀 적은 책이 없다 보니 옛 기록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또 그렇게 하다 보니 곽재우 장군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겨레의 성웅 이순신 장군과 비교·대조해 볼 생각을 ‘감히’ 먹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것은 곽재우 장군과 달리 무척 쉬웠다. 인터넷에서 뚝딱 두드리면 모든 것이 금세 검색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알고 있는 것도 제법 많았다. 이순신 장군을 향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광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되고 재확인되었다.
이렇듯 이순신 장군은 우리 역사에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 구현된 완벽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곽재우와 이순신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한 번 알아볼까?” 하면 “감히 어따 대고 비교질이야?” 하는 나무람이 돌아오기 십상인 것이다. 이런 단순한 비교조차 다들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터무니없는 처사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마지막까지 살펴보고 나면 생각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곽재우 장군이 더 낫나, 이순신 장군이 더 낫나 하는 키재기는 목적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과 견주어 보면 좀 더 손쉽고 일목요연하게 곽재우 장군의 인품과 재능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공통점부터
1. 백 번 싸워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7년 동안 첫 전투 옥포해전에서 마지막 싸움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23전 23승 전승 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말 그대로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며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도 이순신 장군과 마찬가지로 왜적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모두 열여섯 차례 전투를 치렀다.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치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결같이 적은 군사를 이끌고 굳센 적군에 맞서 크고 작은 수십 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고 적혀 있다.
물론 두 장군 사이에 다른 점도 있다. 백 번 싸워서 한 번도 지지 않은 것은 똑같지만 이순신 장군의 백전불패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반면 곽재우 장군의 백전불패는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2. 누구보다 앞장서 싸웠다
13척 대 133척으로 싸운 명량해전의 초기 장면은 너무나 유명하다. 조선 수군 13척 가운데 대장선을 뺀 나머지 12척은 왜적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질려 뒷전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차하면 달아날 기색이었다. 오히려 장군이 탄 대장선만 앞에 나서 적선을 맞아 고군분투했다.
이순신 장군은 다른 해전에서도 매번 앞장서 돌격하면서 부하 장수들을 독려했다. 그래서 대장선은 항상 왜적의 조총 유효 사거리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었고 노량해전에서 몸소 활을 쏘다가 적탄에 가슴을 맞고 순국했다.
곽재우 장군 또한 언제나 앞장서 싸웠다. 곽재우 부대는 훈련되지 않은 의병이어서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고 나아가 공격하기를 두려워했다. 때문에 지휘관의 솔선수범은 더욱 중요했다. 지휘관이 모범을 보이지 않거나 믿음직하지 못하면 금세 흩어져 버리는 오합지졸이었다.
장군은 왜적과 싸울 때 상대 군사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앞장서서 힘차게 돌격했다. 조총 유효 사거리 안에서 활동했지만 말을 타고 빠르게 오갔기 때문에 적들이 맞히지 못했다. 또 휘하가 적에게 몰리게 되면 장군은 반드시 구출하고 후방까지 막아주었다.
3. 부하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이순신 장군은 부하를 위하여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준 적이 있으며 이름 없는 말단 병사들의 전공까지 직접 챙겨준 것도 여러 차례다. 전사한 군졸의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 장사지내게 해주고 그 가족도 챙겼으며 그들을 위한 제문까지 손수 지었다.
또 병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의견을 높이 존중했다. 장군의 한산 진영 운주당(작전회의실)은 장수들뿐만 아니라 지위가 낮은 군졸에게도 늘 열려 있었다. 전쟁이나 군사에 관해 할 말이 있으면 누구든 찾아올 수 있게 하고 직접 그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군율은 분명했다. 훈련을 게을리하거나 군법을 어기면 매우 엄히 다스렸다. 조선 수군 장병들이 제일 무서워한 것은 왜군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이었다. 전투에 따른 사상자보다 군율 위반으로 말미암은 처형자가 더 많을 정도였다.
곽재우 장군도 장병들을 사랑하고 아꼈다. 일반 백성들로 구성된 의병들을 이끌었으므로 사랑을 베풀고 은혜로 감싸는 것은 더욱 필요한 덕목이었다. 장군 본인의 옷을 사졸들에게 벗어주는 것으로 모자라 아내와 자식의 의복까지 군졸의 아내들에게 주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군졸들을 집안 식구처럼 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견도 귀 기울여 들었다. 일이 있을 때마다 군중에 얘기하여 볼품없는 하졸들까지 제각기 생각을 펼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뛰어난 계책을 내면 반드시 채택하고 상금까지 주었다.
군법 또한 엄격했던 것은 이순신 장군과 마찬가지였다. 가깝거나 멀거나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에 따른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했다. 명령을 위반하거나 대열에서 이탈하면 아무리 친한 족친이라 해도 가차 없이 목을 베었다.
4. 왜적의 수급을 베지 않았다
옛날에는 전공을 인정받으려면 왜적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죽인 왜적의 수급을 베어 바쳐 실제로 입증해야 했다. 그래야 승진도 할 수 있고 상금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순신·곽재우 두 장군은 부하들이 왜적의 수급을 베는 것을 금지했다.
까닭은 무엇일까? 죽어 쓰러진 왜적에게 다가가 수급을 베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왜적이 아직 죽지 않은 상태라 기습을 당할 수도 있고 다른 왜적이 숨어 있다가 공격을 가해 올 수도 있었다. 사랑하는 부하들이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죽은 왜적의 수급을 베려면 그만큼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곽재우 장군과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베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차라리 왜적을 하나라도 더 쓰러뜨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곽재우 장군은 매번 병사들에게 “머리를 베어 공훈을 요구해서 무엇하겠느냐. 오직 중요한 것은 왜적을 죽여야 한다는 것뿐이다”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 또한 마지막 결전 노량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수급을 베려고 앞을 다투다 보면 왜적을 많이 죽일 수 없으니 이를 경계하라”고 말했다.
5. 판세를 객관적으로 읽을 줄 알았다
백전불패라는 기적 같은 공적은 용감하게 잘 싸우고 전술을 훌륭하게 운용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판세와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서 이길 수 있을 때만 전투를 수행하고 질 자리에서는 싸우지 않는 현명한 선택 또한 필요하다.
전공에 대한 욕심이 앞서거나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의지가 크게 앞서면 보는 눈이 흐려진다. 그러면 정확한 판단과 현명한 선택이 어려워진다. 곽재우·이순신 두 분 장군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순신 장군이 1597년 2월 부산 앞바다로 나가 왜적과 싸우라는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왜 수군은 전선과 군사 등 물량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숨을 곳도 가릴 곳도 없이 탁 트인 바다에서 그런 왜적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곽재우 장군 또한 1593년 6월 진주성 2차 전투를 위해 진격해 오는 왜적을 막는 방어전에서 상관들의 명령을 거부했다. 당시 왜적은 일컫기는 30만이고 실제로는 7만여 명이 쳐들어오는 중이었으나 조선군은 모두 합해 1만이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중과부적이었다.
6월 16일 의령 작전회의에서 도원수와 순찰사 등은 부산~김해~창원을 거쳐 오는 왜적을 두고 남강을 건너 함안으로 나가 싸워야 한다고 했고 장군은 일개 조방장이지만 함안은 개활지인데다 성이 낮아 지키기 어렵고 천험의 요충인 정암진에서 막아야 한다고 반대했다.
상관들이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바람에 장군도 함께 함안으로 건너가야 했다. 다른 장수들은 실제 맞닥뜨린 왜적의 어마어마한 군세에 지레 질려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장군은 대오를 유지한 채 의령으로 돌아와 17~20일 나흘 동안 정암진에서 왜적을 막았다.
뒤이은 작전회의에서도 장군은 진주성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보니 누구도 못 당할 기세인데 3리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막겠는가. 차라리 밖에서 응원전은 해도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다. 이 몸이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백전 군졸들을 어찌 차마 버리겠는가.”
장군은 옆 고을 삼가로 물러나 진주를 바깥에서 응원했다.
6. 부상과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사천해전에서 왼쪽 어깨 관통상을 입었다. 바로 총알을 뽑아내고 치료했지만 1년 뒤에도 낫지 않아 고통스러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상한 구멍을 뽕나무 잿물이나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어깨뼈가 깊이 상한데다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늘 진물이 흐른다.”
이순신,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밖에도 [난중일기]에는 여러 가지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장군의 모습이 종종 나온다. 복통과 토사곽란, 어깨·허리·무릎의 통증, 총상과 고문의 후유증 등이 있고 자고 나면 땀으로 이불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거나 식은땀과 몸살에 시달렸다는 표현도 나온다. 늘 긴장해 있어야 하고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격무에 시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곽재우 장군도 나이는 이순신 장군보다 일곱 살 아래지만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1593년 겨울에 상한병을 겪고 오른쪽 팔이 마비되었는데 이듬해 봄까지 차도가 없었으며 1595년 진주목사로 있을 때는 서너 달 휴가까지 냈을 정도로 심각했다. 왜적을 물리치느라 고심참담하고 전투 수행과 산성 수축으로 몸이 상했기 때문이다.
1600년 2월 경상좌병사로 있을 때는 가래병·천식·울화병이 지병이었다. 짙은 가래에 밤낮 헐떡거렸고 울화는 더욱 깊어졌으며 어지럼증까지 정신을 못 차릴 못할 정도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도 편두통이나 창증으로 고생하며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 적이 많았다.
7. 임금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선조 임금의 부산 앞바다 출전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함거에 실려 서울로 압송당했다. 장군은 투옥과 고문으로 일신이 크게 상했으며 대신들의 구명 운동이 없었다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결국 죽지 않고 옥문을 나섰지만 다시 여러 달을 백의종군해야 했다.
곽재우 장군도 임금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혀 제법 고생했다. 1596년 이몽학 반란 사건에 연루돼 김덕령 장군과 함께 체포·투옥당했다. 김덕령 장군은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했지만 다행히 장군은 불문에 부쳐져 풀려났다. 그러나 임금의 의심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은밀히 내시를 보내 집안 동정을 살피는 등 감시를 이어갔다.
8. 박정희 대통령이 유적지를 성역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본인이 군인 출신이라서 그랬는지 이순신 장군과 곽재우 장군의 유적지 두 군데 모두 정화하고 성역화했다. 이순신 장군의 사당 아산 현충사는 1706년 세워졌는데 1967년 3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고 1967~68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1969년 4월 28일 중건 준공식이 치러졌다.
곽재우 장군의 사당 의령 충익사는 1972년 6월 3일 의병기념사업회가 의병탑을 세우면서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7년 10월 5일 정화사업이 시작되어 1978년 12월 22일 준공식이 열렸다. 충익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고 장군과 함께한 장령을 모신 충의각 현판은 김종필 국무총리의 글씨이다. 또 유적 정화 기념비에 새겨진 문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문인 이은상이 지은 것이다.
9. 단군의 호명을 받고 불려나온 적이 있다
겨레를 나락에서 구한 구국영웅은 구성원들에게 그 자체로 무한한 자부심의 원천일 수밖에 없다. 민족의 운명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수록 더욱 그랬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는 시조 단군이 현생하여 이순신 장군과 곽재우 장군을 소집해 나라를 지키는 방침을 강구한다는 평론을 실었다.
목적은 당연히 일본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곽재우 장군에 대해서는 일본이라는 흉물을 쓸어 없앨 책임이 크다고 했으며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일본에 맡겨져 있는 국권을 되찾아올 책임이 크다고 일렀다.
두 분 장군은 일제강점기 항일의식을 드높이는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제목이 ‘영웅모범’인데 이순신 장군을 두고는 거북선을 타고 왜적 군함을 함몰시킨 도략(圖略)을 본받자고 했고 곽재우 장군을 두고는 쥐와 같은 왜적을 곳곳에서 싸워 죽인 그 용맹을 본받자고 했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일까?
1. 이순신은 관군이었고 곽재우는 의병이었다
‘선조실록’ 1591년 2월 13일 자를 보면 당시 진도군수로 있던 이순신 장군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전라도좌수사에 임명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전에 장군은 전라좌도 수군을 맡아 지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 의병 부대를 조직해 전투에 나섰다. 의병 활동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를 마련하기 위해 이웃 고을 관아를 털었고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가 왜적을 피해 도망다니자 이를 성토했다. 이 때문에 도적과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자신을 해명하는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는데 여기에 “만 번이라도 죽을 각오를 하고 4월 22일 의병을 모으고 일으켜 왜구를 막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전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좌수사가 된 이순신 장군과 왜적이 쳐들어온 이후에 급하게 의병을 꾸려야 했던 곽재우 장군 중에 어느 쪽이 더 힘들고 어려웠을까. 관군은 어느 정도의 강제력과 물질적인 보상이 뒷받침되었기에 조직과 유지가 쉬웠지만 의병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식량·군복·무기 조달에서 군사훈련까지 하나도 쉬운 것이 없었다.
또 관군은 많든 적든 군사훈련을 받았으므로 당장 전투 수행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의병은 일반 백성으로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의병을 조직하고 통솔하는 것은 관군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장군은 의병을 모으고 훈련하여 전투를 치르기 위해 몇 만 금이나 되던 재산을 모두 흩어야 했다.
한편 왜적의 관점에서 볼 때 전란 1년 전에 임명된 조선 수군의 이순신 장군은 나름 정탐하고 파악하여 어느 정도 대비책을 세운 상태였다. 그러나 전란이 터진 이후에 조직된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의병 부대들은 왜적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걸림돌이었다. 왜적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타격을 가한 주체는 바로 의병이었다.
2. 이순신은 주장이었고 곽재우는 부장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을 겪은 7년 내내 시종일관 군대 전체를 통솔하는 주장(主將)이었다.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고부터는 경상·전라·충청 등 조선의 수군을 모두 총괄했으며 이전에도 전라좌수영의 모든 장졸을 지휘하는 주장이었다.
반면 곽재우 장군은 5월 26일 정암진승첩과 7월 초·중순의 현풍·영산전투에 이르기까지 초기 의병 활동에서만 주장으로 활약했다. 이후에는 임금의 명령으로 경상우도 초유사와 순찰사로 임명된 김성일의 통제를 받았다.
이때 의병장들은 곧바로 공식 관직으로 편입되었는데 1592년 10월의 진주성 1차 전투 당시 장군의 지위는 조방장이었다. 주장을 도와 왜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부장(副將) 지위였는데 이는 1595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주장은 본인의 뜻대로 작전을 펼칠 수 있었지만 부장은 좋은 계책을 내놓아도 주장이 채택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1593년 6월 진주성 2차 전투 당시 남강 건너 함안에 가는 대신 정암진을 지켜야 한다거나 진주성에 들어가면 안 된다거나 하는 장군의 계책은 주장들에게 배척당했고 그 결과는 익히 아는 그대로 조선의 패전이었다.
3. 전공에 대한 조정의 예우가 달랐다
1604년 6월 선조 임금은 선무공신 18명의 명단을 확정지었다. 이순신 장군은 1등공신 세 명 가운데서도 가장 앞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임진왜란 7년 동안 한결같이 바다를 지키고 굳건하게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데 따른 합당한 예우였다.
곽재우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반열인 1등공신은 아니더라도 2등공신에 오를 자격은 충분하다는 것이 당시 조정 대신들의 공론이었다. 실제로 조정에서 올린 선무공신 명단에 장군이 포함된 적도 있었지만 선조 임금은 결국 이를 무산시켰다.
대신 선조는 1605년에 곽재우 장군을 선무원종1등공신에 올렸다. 선무공신은 정식 공신이고 선무원종공신은 준공신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선무원종공신은 1·2·3등 합하면 9060명이나 되었다. 선조는 “공훈이 적지만 그래도 갚아야 하기에 은혜를 베푼다”고 말했다.
선조는 이렇게 저평가했지만 장군에 대한 조정의 예우는 후대로 갈수록 더욱 높아졌다. 임진사충신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고 충익공 시호가 내려졌으며 첫 번째 전승지인 기강나루 어귀에는 보덕불망비까지 세워졌다.
4. 이순신은 기록을 남겼고 곽재우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기록으로 남긴 [난중일기]는 너무 유명해서 따로 설명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난중일기]는 편지 모음인 ‘서간첩’ 그리고 1592년의 전투와 군무 등에 대한 보고서인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이밖에 1592~1594년 임금에게 올린 전황 보고서 68편을 필사한 ‘충민공계초’도 있다.
반면 곽재우 장군은 자신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공식 문서인 장계(보고서)와 상소문·격문을 제외하고는 일절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때그때 작성하게 마련인 전투일지는 고사하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20년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회고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후손이 편찬한 [망우선생문집]을 보면 사적인 기록은 논문 1편, 사위·아들 등에게 보낸 편지 6통, 자손에게 남긴 유훈 1편, 유묵·잠언 3편과 한시 27편 37수가 전부다. 그나마 논문을 뺀 나머지는 토막글이라 해도 될 정도로 짧디짧다.
장군은 왜 이렇게 기록에 인색했을까? 짐작 가능한 첫째 이유는 자신의 공적과 활동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행여 누군가와 주고받은 기록이나 자신의 행적을 적은 기록이 나중에 환난을 불러들이는 꼬투리가 된다고 여겼을 수 있다. 장군은 김덕령 장군이 이몽학 반란 사건에 휘말려 아무 잘못도 없이 목숨을 잃는 것을 목도한 적이 있다.
이순신 장군과 곽재우 장군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간단한 비교·대조를 마치면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본다. 만약 두 분 장군의 처지가 바뀌어졌으면 어땋게 됐을까? 곽재우 장군이 이순신 장군처럼 관군을 맡아서 통솔했다면 어땠을까? 이순신 장군이 곽재우 장군처럼 의병을 조직하고 이끌었다면 또 어땠을까? 이렇든 저렇든 두 분 장군은 모두 본인이 놓여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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