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체제의 핵심에는 스마트폰이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2017년 현재 스마트폰은 ‘사회적 교제대상인 타인’을 대체하고 있다. 스마트폰에게 묻고,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스마트폰으로부터 적시에 제공받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마트폰은 나에게 ‘관계의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 외로움을 잊게해 주는 존재인 것은 확실하지만, 기념일을 챙겨야 하거나 내가 수시로 눈치를 보거나 감정을 살펴야 하는 대상은 아닌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나홀로 되기’를 선호하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의 이면에는 한국의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인 개인이 그동안 얼마나 ‘사회적 의무 혹은 역할’을 명분으로 타인에게 억압적이었는가를 되돌아 보게 된다.” (7쪽)
나는 사실 이런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마케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소비자를 객체화해서 그 욕망의 흐름을 도식화하는 ‘장사꾼용’ 책이라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그런 편견이야말로 얼마나 게으르고, 시대착오적인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고도의 소비사회. 이제 인간은 소비함으로써 존재한다. 소비 그 자체가 사회와 인간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 그렇게 소비하는 인간에 대한 탐구는 그 자체로 이 시대의 정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결핍, 기쁨과 슬픔을 포괄한다.
이 책의 산파이자 산모 역할을 담당한 윤덕환 박사에게 2018년을 사는 대한민국 소비자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2018년 고도화하는 대한민국의 소비사회는 어디로 향해 가는지 물었다.
- 인터뷰이: 윤덕환 (심리학 박사, (주)마크로밀 엠브레인 이사)
- 인터뷰어: 민노씨
- 일시, 장소: 2018년 8월 21일(화), 홍대 인근 식당과 카페
= 자기소개
심리학을 전공했다(심리학 박사). (주)마크로밀 엠브레인에서 이사로 일한다. 지난해까지는 대학에서 강의도 가끔했다. 윤덕환이라고 한다.
= 더 애착이 가는 호칭은 뭔가. 박사? 이사? 교수(강사)?
아무래도 회사 다니면서 10년 동안 어렵게 공부해서 딴 박사. 주변에서도 친한 사람들은 윤 박사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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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 대상성 자기와 주체성 자기
= 박사 논문은.
감정노동에 관해 썼다.
= 감정노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직’이 원해서, 나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주체의 이익을 위해 나의 감정을 거기에 맞춰서 서비스하는 사람.
= 예를 들면.
편의점을 예로 들면, 몇 번 인사를 하라를 (감정) ‘메뉴얼’( = ‘표현 규칙’ 혹은 ‘디스플레이 룰‘)로 해놓는다거나. 승무원을 예를 들면, 무형의 어떤 행위를 승객에게 하라고 정의해 놓은 ‘메뉴얼’이 따로 있다. 마트 직원, 편의점, 간호사, 콜센터 직원 등이 가장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로 이들에 관해선 많은 연구가 이뤄져 있다.
= 논문의 핵심 전언은 뭔가.
전형적인 감정노동자들, 콜센터 직원, 마트 직원, 간호사, 편의점 직원 등 ‘감정노동 메뉴얼’이 있는 직종보다 일반적으로 ‘메뉴얼’ 없이 조직생활하는 (감정) 노동자의 ‘결과’(힘들다는 정도)가 더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감정 메뉴얼이 없는 조직원도 감정노동을 하고, 감정 메뉴얼이 없기 때문에 더 스스로 소진(‘번아웃’)되거나 업무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게 내 논문의 전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량적으로 입증했다.
= 감정노동 메뉴얼이 없으면 더 ‘소진’된다? 좀 더 설명하면.
감정 메뉴얼이 있으면 ‘저것만 잘 수행하면 나는 퇴근할 수 있어’가 되지만, 메뉴얼이 없는 노동자는 불명확성으로 인해서 더 많은 에너지가 소진된다.
= 흥미로운 소재고, 흥미로운 결론이다. 지도교수가 좋아했을 것 같은데.
아니, 그 반대다. 감정노동이 이슈가 된다는 것, 논문의 소재가 된다는 것을 지도교수께 설득하는 게 힘들었다. 교수들은 대체로 ‘독고다이’다. 서로 별로 안 친하다. 상대방에 뭘 맞춰주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대안까지 연구하고 싶었을 것 같은데.
그건 와이프가 석사 논문으로 연구했다. 시민활동가도 감정노동을 한다는 게 골자다. 표현 규칙을 지키면서 하는 활동은 아니지만,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게 감정노동이기 때문에, 와이프 논문에 의하면, 감정노동의 대가는 ‘주도성’이다.
= 주도성? 감정노동을 해서라도 일을 주도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낀다?
그렇다. 내 주장대로 상황을 만들거나 주체적인 일을 한다는 만족감을 감정노동의 보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시민활동가들 사이에서 토론은 열띠기 마련이다.
= 그 대안은 뭔가.
대안은 감정노동자로 인정하고, 시민활동가에 맞는 표현 규칙을 정립하는 일이다. 시민활동가는 일과 생활의 경계가 없어서 더 힘들다. 뜬금없이 카톡을 보내고, 시민활동가와 인터렉션이 있는 시민들은 활동가가 퇴근 개념도 희박해야 하고, 가난한 게 당연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 (…..)
그래서 시민활동가들도 돈과 같은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서 ‘여기서 대장이 돼야지’, ‘이번 이슈는 내가 주도해야지’ 그런 방향으로 틀어진다. 상업적인 이익을 배제했기 때문에 다른 쪽에서 보상받으려는 경향이 강해지는 거다.
시민들은 감정노동자로 인정하고, 합리적인 프로그램을 구성해서 그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인정해주고, 업무 시간과 여가 시간을 확실하게 구별해주고, 시민활동가에 맞는 표현 규칙을 만들고. 그게 와이프가 쓴 석사 논문의 결론이다.
= 감정노동에 관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반 소비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돈을 주니까 나에게 친절해야 해’ 이런 기대를 깨야 한다. 표현 규칙을 노동자만 가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반 소비자에게까지 그 인식이 확산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새벽에 술마시고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진상 손님’을 자주 경험한 마트 직원이라고 한다면, 퇴근하는 순간 소비자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인 체험이 쌓이면, 소비자로 바뀌는 순간 갑질을 하는 소비자로 돌변할 가능성이 커진다. 악순환이다.
서비스 노동으로 감정이 다치는 경험을 하면 어딘가에서 보상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자신의 감정이 다치지 않는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손님은 왕이다’는 신화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노동의 악순환이 심화한다.
= 책에 보면 서울과 도쿄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감정노동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일본은 감정노동이 심하지 않다. 올해 초 일본 능률협회에서 조사한 바로는 일본의 콜센터 노동자의 감정노동 문제는 심각하지 않은 수준이다.
= 왜 그럴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감정노동의 강도는 회사가 요구하는 것과 내가 느끼는 실제 감정의 간극이 클수록 더 커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체성 자기(subjective self)’가 강하고, 일본 사람들은 ‘대상성 자기(objective self)’가 강하다. 일본인들은 회사에서 부여받은 규칙을 잘 지키는 게 내 ‘셀프(정체성)야’라고 생각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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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 자기 vs. 대상성 자기
“주체성-대상성 자기 이론은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양쪽 다 상호협조적 자기관이 우세하며 사회적 관계에 대한 표상이 자기개념에 포함되어 있지만, 사회적 관계에 임하는 태도에는 대조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한국인의 자기관은 자신을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심적 존재로 보는 주체성 자기(subjective self)이고, 일본인의 자기관은 스스로를 사회적 영향력을 수용하는 주변적 존재로 보는 대상성 자기(objective self)라고 주장한다.”
– 이누미야 요시유키(犬宮 義行), [주체성-대상성 자기와 긍정적 환상의 관계에 관한 한일비교 연구] (2007-2008), ‘연구목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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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성 자기’는 비주체성과는 다른 것인가.
2016년(상반기)에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품은 무라타 사야카(村田沙耶香)라는 작가가 쓴 [편의점 인간; コンビニ人間]이다. 이 소설에는 18년 가깝게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지내는 인물이 나오는데, 작가 자신의 얘기다. 그야말로 편의점을 사랑하는 이야기인데, 이 자전적 소설의 여성 주인공, 그러니까 작가는 편의점에서 메뉴얼대로 움직이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무라타 사야카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을 때도 잠깐 상만 받고 다시 가서 편의점에서 일했다고 한다.
= 엄청나다(…..)
우리나라 독자들이 쓴 댓글을 보면, “뭐 이런 쓰레기에 상을 줬냐” 이런 격한 반응이 있다. ‘대상성 자기’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반응으로 보인다.
= 일본은 한국의 근미래라고들 하는데.
특히 수치로 보면, 2016년과 1996년의 일본이 비슷하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자기 인식 차이, 즉 ‘주체성 자기’와 ‘대상성 자기’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일본인들에게는 이런 자기 인식이 생겼을까?
재난이 많은 나라라서 그렇지 않나 싶다. 자신과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연의 힘에 순응할 수밖에 없고, 그 자연이 초래한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최소한 마을이나 국가 단위의 거대한 조직력에 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노엄 촘스키는 계급 이동이 없는 사회로 일본을 뽑는다. 안정성은 높지만, 역동성이 부족하고, 사회가 정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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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체제: 개인화된 사회성
= 본론으로. 책의 독자로 상정한 대상은 마케터인가 일반 소비자인가. 그러니까 이 책은 전문서인가 교양서인가.
회사는 마케팅이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렇게 출발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마케터를 위한 책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전체 소비라는 것이 어떤 돈만 쓰는 행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자원인 시간을 쓰는 행위라서, 소비자의 관심과 그 방향을 알아야 하는 것이라서, 그런 맥락에서 보면 책이 향해야 하는 대상은 일반 독자(소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로서 현재와 내일에 대한 변화를 예측하는 것을 지향한다.
= “개인화된 사회성”이라는 말은 함축적이다.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매튜 리버만은 인간이 ‘사회적 뇌’를 가졌다고 말한다. 리버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화 과정에서 도태했을 가능성이 높고, 진화가 완성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극도의 민감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다만, 스마트폰 시대에는 혼자 있어서 사회성이 없다는 것은 착각이고, 타인이 어떤지 끊임없이 궁금해하는 스마트폰 사용자, 소셜미디어 사용자들은 충분히 사회성이 있다.
=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아이러브스쿨 가입자가 1,000만명을 돌파한 2007년 기준으로 83%이 인터넷 카페에 가입한 경험이 있었다. 이 수치는 해마다 떨어졌는데, 2017년에는 80%대로 다시 회복했다.
아이러브스쿨 가입자는 친목 도모가 목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친목 도모가 아니라 요리, 맛집, 각종의 취미 활동을 위해 모였다가 바로 헤어지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촛불집회에서도 뒷풀이를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이런 경향은 젊은이들에게 더 강하다.
내가 직접 경험한 사례도 있다. 한국여가학회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강생들이 강의를 들으면서 피자와 맥주를 시켜서 먹더라. (= 기분 나빴겠는데?) 그래도 함께 피자와 맥주를 먹으면서 분위기 좋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물어봤다. 강의 중에 웬 피자와 맥주냐고. 그분들 말씀이 보통 학회하면 끝나면 바로 집에 가는 분위기라서 강의를 들으면서 먹은 거라고 하더라. 목적을 달성한 뒤에 바로 헤어지는 분위기가 강하다.
= 이런 현상이 설명하는 건 뭔가.
‘던바의 수’라는 게 있다. 로빈 던바라는 학자가 제시한 수다. 그 던바의 수는 150인데, 문화적으로 친밀하게 맺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150을 넘지 않는다는 거다. 관계를 확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나는 던바의 수를 신뢰한다.
던바는 ‘사회적인 관계’를 일류 최고의 발명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평소 친목을 도모해야 사회성이 발휘될 수 있다는 게 던바의 주장인데, 사회성이 집단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 이익을 위해서든 공익을 위해서든 뭔가를 하기 위해선 친목 과정이 필요하다는 게 던바의 주장이다.
= 그런데?
2018년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과정이 없다. 일부러 친목을 도모하지 않고, 원하는 목적만 취하는 형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회성을 발휘하는가. 친목 도모가 없어진 게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대체’되었다고 본다. 나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친목 도모를 ‘대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 대체 가능한가. 질적으로 양적으로. 지속적으로.
양적으로 지속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본다. 질적으로는 아직은 검증된 바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낙관적이지는 않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스마트폰 시대의 교류를 ‘차가운 친밀성’([감정자본주의], 2010)이라고 명명한다.
= ‘응답하라’ 시리즈가 얻은 사회적 반향을 보건데, 공동체에 대한 갈증이 여전한 것 같다.
집단적인 외로움이랄까. 그런 결핍이 있다. ‘응답’ 시리즈가 그런 갈증을 풀어주는 거다. 혹은 최근 드라마로는 [라이프 온 마스]나 [나의 아저씨]에서 ‘정희네’와 같은 공간. 사회적인 교류는 나에게 너무 억압적이라서 그 관계 속에서 떨어져 있지만, 결속에 대한 결핍감은 남을 수밖에 없다. 왜냐면 인간은 ‘사회적 뇌’를 가진 존재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정희네’와 같은 공동체의 따뜻한 공간을 소구할 수밖에 없다.
= 소셜미디어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도 그렇다. 한편으로는 ‘행복경연대회’의 경향이 강해지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확증편향’이 강화하면서 점점 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으로 변해간다고 느끼는데.
20대와 50대가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는 패턴이 다르다. 조사해보면, 자존감이 높은 연령대는 50대고, 자존감이 가장 낮은 연령대는 20대인데, 소셜미디어 이용 빈도는 정반대다. 젊은 세대일수록 더 내 삶을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 같다.
토리 히긴스(인지심리학)는 사회비교인지 영역을 개척한 학자인데,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현실 자아(리얼 셀프)와 이상화된 자아(아이디얼 셀프)를 비교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뭔가 대단한 사람이길 원하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현실에서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타인과 비교할수록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런데 그런 젊은 세대는, 나이든 세대들도 그렇긴 하지만, 더욱 더 경쟁을 내면화한 세대다.
= 50대도 치열한 경쟁을 거쳤는데.
하지만 50대는 모두 ‘평등하게’ 가난했던 공동체의 체험이 있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최근의 트랜드는 소셜미디어를 탈피하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페북 가입자, 특히 젊은 가입자가 줄어들고, 탈퇴하는 이들도 젊은 세대가 많다. 전체적으로 소셜미디어에 대한 피로감이 늘고 있는 추세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렇게까지 비교하면서 피곤하게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늘고 있는 것 같다.
= 한편으로 소위 ‘관찰 예능’ 시대다. 이제 삶의 모든 영역을 ‘대리 체험’하고, 구경하는 시대가 됐는데.
2016년에 [대신 경험해 드립니다]라는 주제로 책을 썼다. 1인 체제는 필연적인 결핍감을 수반한다. 아이, 결혼, 여행 등등. 그래서 이제 TV가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것들을 대신 체험해준다. 1인 체제의 인간은 돈과 시간이 부족하니까… 사회적 욕구를 TV의 관찰 예능으로 해소한다.
= 왜 관찰 예능에 끌릴까.
이제 사람들은 더는 편집된 정보, 연출된 정보에 흥미를 못느낀다. (= 왜?) 리얼한 삶을 보고 싶으니까. 1인 체제 속에서 고립된 사람에게는 TV의 관찰 예능은 ‘아, 저렇게 사는구나’를 확인시켜 준다.
= 개인적으로 유튜브의 ‘리액션 비디오’를 보고 깊은 공감과 함께 충격을 받은 적 있다. 개인적으로 [왕좌의 게임]이라는 TV 드라마를 아주 좋아하는데, 드라마를 보고 나서 우연히 유튜브에서 그 드라마를 보고 맥주집에서 서로 공감하는 모습을 10분 정도로 요약 발췌한 영상을 보고나서 드라마의 감동이 훨씬 더 커졌던 경험. 지금은 리액션 비디오를 보지 않지만, [왕좌의 게임]을 상영했던 시절엔 그 맥주집의 리액션 비디오를 여러 번 봤다.
인터렉티브한 삶이 일상이었을 때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1인 체제 시대에는 그런 일상적인 체험들이 낯선 경험이고, 궁금한 경험이 된다. ‘아, 다른 사람은 저렇게 느끼는 구나’ 그 자체로 볼 거리가 되고, 안도감, 공감 욕구를 충족해주는 것 같다.
= ‘개인화된 사회성’은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칠텐데. 소비 부문에선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행의 영향이 적어질 거다. 예전보다 남들이 샀다고 사질 않는다. 그런 사례 중 하나가 ‘ZARA’라는 브랜드다. 중저가 브랜드로 잘 나가다가 점점 유행이 시들해졌다. 이런 경향으로 명품 시장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고 있다는 게 통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 ‘개인화된 사회성’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개인의 관심으로만 모인 사회성. 영어식 조어로는 ‘하이퍼 커스터마이즈드 소셜리티‘(hyper customized soci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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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 성장: 기본소득과 4차 산업혁명
= 매슬로 가설(매슬로의 욕구단계설)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나.
동기는 어차피 정량적인 분석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매슬로 가설이 유효하다고 본다. 매슬로 가설을 활용하게 된 이유는 매슬로가 ‘결핍’ 동기와 ‘성장’ 동기를 구별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게 아주 중요한 프레임이라고 본다. 매슬로 가설이 4단계냐 6단계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인간은 ‘결핍’ 동기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고, 그 뒤에 ‘성장’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을 접했을 때 엄청 감동받았다. 그리고 이론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결핍을 채우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기본적인 결핍이 남아 있는 한 인격적으로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경험적으로 주변에서 많이 지켜봤다.
= 결핍이라는 건 참 막연하다. 한국인의 결핍은 무엇이라고 보나.
2018년에도 의식주와 안전에 대한 욕구가 여전히 강하다고 본다. 사회적으로 이런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4차 산업혁명이니 뭐니 다 관심 없다. 기본소득과 부동산의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최소한의 소득보장에 관해 안정감을 가지지 않으면 ‘지적’으로 절대 성장할 수 없고, 지적인 성장이 정체되면, 국가적인 성장도 바랄 수 없다. 그러면 불안을 조장하는 세력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큰 정부를 지향한다. 작은 정부 해봐야 기업이 더 커진다는 이야기이다. 시민의 정체성, 소비자의 정체성, 엄마아빠의 정체성….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
특히 소비자에게 돈과 시간이 줄어드는 상황이다. 국가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국민을 도와야 한다. 국가가 그걸 유지하지 못하면 자본주의 시스템 유지가 어렵고, 기업이 개인의 삶에 개입해서 좀 더 많은 것을 빼앗아 갈 가능성이 커진다.
= 예를 들면.
학교 급식의 예를 들어보자. 학교는 최소한의 이익을 보면 좋겠고. 학부모는 급식 가격을 좀 내리면 좋겠고. 급식회사는 가격을 올리면 좋겠고. 그렇다면 결론은 공공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곳에 세금을 써야 한다.
= 기본소득과 4차 산업혁명 간의 논의도 조금씩 활발해지는데.
1, 2, 3차 산업혁명은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기술을 발명한 혁명이다. 노동시간이 증가하고, 더불어 노동효율성도 높아졌다. 즉,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의 수익이 늘었다. 즉, 열심히 일하면 (정도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돈 버는 시대였다.
하지만 인공지능시대는 노동력을 없애버리는 기술을 수반한다. 일부만 더 극단적으로 더 돈을 벌고, 시간(노동력)만 가진 사람들은 그 시스템에서 배제된다. 그렇게 되면 시스템은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가 부자 증세(일명 ‘버핏세’)를 주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 한국사회에서 기본소득 논의는 연착륙할 수 있을까.
노동에 관한 기존의 패러다임이 기본소득 논의를 방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다:
“노는 사람한테 왜 돈을 줘?”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돈을 벌어야지.”
공적 자금을 투여하려면 여론이 중요한데 아직까지는 이런 예전 패러다임이 강해서 기본소득 논의를 확산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이 흔하지만 잘못된 상식이 깨져야 기본소득 논의가 연착륙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