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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11.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12.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13.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14.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15.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16.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17.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18.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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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횡성읍
머나먼 횡성읍

 

■ 마을 공용 전화기가 전해준 운명의 전화 한 통

정리가 좀 되셨나요. 이제 본격적으로 태기리 화전마을 학교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마을회관 구석에 칠판만 걸고 시작한 바로 그 소꿉장난 같은, 순수 만발한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1965년 10월 1일, 최초의 학생 8명을 모아놓고 운명의 첫 수업을 막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마을회관에 놓여 있는 마을의 공용 전화기를 통해 기다리던 전화가 한 통 걸려옵니다. 학교 설립 인가가 확정되었음을 알려주는 횡성군 교육청의 통지였습니다.

사실 저 한 통의 전화를 받기 위하여 이명순 선생님은 얼마나 재게 다리품을 팔았는지 모릅니다. 태기리 주민들에게 교통수단은 오직 ‘뚜벅이’입니다. 나물을 캐러 가든, 장을 보러 가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대부분 걸어서 오고갑니다. 당시 교통 여건 자체가 낙후된 이유도 있지만, 특히 험난하기 짝이 없는 태기산의 어깃장이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게다가 군청과 교육청 등 관공서가 몰려 있는 횡성읍과 태기산의 위치가 여간 멀지 않습니다. 대체로 둥그스름하게 타원 형상을 띠고 있는 여느 군의 지도를 연상해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읍이 원의 중심에서 살짝 왼쪽에 위치해 있어, 횡성읍과 태기산의 거리가 전체 원 지름의 3분의 2쯤 되는 거리랍니다. 이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서 다닌 거지요.

주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이명순 선생님은 몇 시간을 걸어서 태기산을 내려오고, 다시 두어 시간을 걸어서 횡성읍으로 갑니다. 또 다시 교육청으로, 군청으로, 경찰서로 허가에 필요한 서류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고 자문을 얻기 위해, 걷고 또 걷습니다. 약속도 없이 찾아간 외부인이 교육장이랑 군수, 경찰서장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요. 더구나 직원들 눈에는 그저 새파란 애송이 처녀로 비쳤을 따름이겠지요. 당시는 전화기 자체가 귀한 시절이었으니, 전화를 걸어서 미리 약속을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요.

꽃풍년 야외수업
꽃풍년 야외수업의 모습.

■ 기우제 성공 확률 100%인 인디언 주술사의 비결

잠깐 우스갯소리 하나 해드릴까요.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주술사는 기우제 성공 확률이 100%였다고 합니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답이 의외로 단순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인디언 주술사는 한 번 기우제를 시작하면 비가 올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고 정성을 다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엉뚱한 기우제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이명순 선생님의 스타일이 꼭 그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횡성 교육장님 이름이 남궁 숙이었어요. 아침 일찍 산을 내려가서 횡성읍까지 걸어갔는데, 직원이 어떻게 오셨냐구 그래요. 그래서 교육장님 뵈러 왔다니깐 무슨 일로 왔느냐? 약속은 했느냐? 물어요. 아니라니깐 그러면 여쭈어봐야 되는데, 외출하셔서 오늘은 아니 오신다, 금요일에 다시 와보라 그래요. 결국,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돌아왔지요. 지겹게 걸어서…. 다시 금요일 약속시간에 맞춰 가니까, 급한 일이 생겨서 벌써 외출을 하셨다고, 오후에 다시 와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후 세 신가 네 신가 갔더니, 월요일에 다시 오라 그래. 그러자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면서 현기증이 핑 돌고 어질어질해요. 복도에 앉아서 잠시 어지럼증을 가라앉히며 생각해보니 밥을 굶어서 배가 너무 고픈 거였어요.”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나고, 무기력한 느낌이었을까요. 점심 식사를 까먹을 정도였으니 말이에요. 참 어이없이 고생을 하였지만, 월요일에는 일이 잘 풀립니다. 남궁 교육장님매우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분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는 그 자리에서 ‘열심히 해보라’며 흔쾌히 대답을 하고, 바로 봉덕국민학교 교장실로 전화를 걸어줍니다. 며칟날 교장선생님 사택으로 찾아가보라고 약속까지 턱 잡아주십니다.

그리고는 매사가 일사천리로 술술 풀려갑니다. 봉덕국민학교 정덕영 교장선생님의 배려는 뒤에 다시 밝히겠지만, 그렇게 다정하고 꼼꼼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처음 뵙던 날, 짜장면부터 사주시는 센스까지 말이지요.

고진감래, 교육장 감사장 (1966)
고진감래, 교육장 감사장 (1966)

■ 삐뚤빼뚤 올망졸망 ‘작은 신의 아이들’

마을회관 한쪽 구석, 가마니를 걸어 거적문으로 현관을 대신한 초미니 임시학교지만, 명색이 정식으로 허가씩이나 받은 학교인데, 현판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도 초반이라 아는 사람도 부탁할 사람도 없으니, 아쉬운 대로 이명순 선생님이 직접 학교 현판을 만들어봅니다. 두꺼운 골판지를 구해서 ‘태기산학교’라고 커다랗게 가로 글씨로 명패를 써서 입구에 붙였습니다.

아이들이 현판 앞에 모여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도 잠깐, 이튿날 새벽 이슬에 그만 골판지가 우글쭈글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현판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처녀 선생님 눈에는 저 누추한 꼬맹이들이 ‘작은 신의 아이들’처럼 보이고, 아이들 눈에는 선생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님처럼 보였을 터이니까요.

처음 며칠은 아이들하고 친해지기 위해서 그냥 놀았어요. 동요 가르치고, 무용 같이 하고, 옛날이야기 들려주고……. 집에 공부하던 교과서 있는 애들은 몇 권씩 보자기에 싸서 짊어지고 가져왔지. 그걸 같이 돌려보면서 받아쓰기도 하고. 삐뚤빼뚤, 받침도 철자도 제대로 쓰는 아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틀 뒤에 칠판이 도착했습니다. 군청에서 보낸 사람이 작은 칠판을 등에 짊어지고 몸소 태기산을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그만 칠판지우개를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겹겹이 말아서 꿰매어 직접 칠판지우개를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답답해진 아이들이 마구 침을 발라서 지우는 바람에, 이번에는 백묵 글씨가 잘 써지지 않습니다.

참 코미디 같고, 동화 같은 초창기 추억들입니다.

마을회관 구석 임시학교
마을회관 구석 임시학교

■ 밤길을 막아선 두 개의 불덩어리

10월 5일은 유난히 가을 하늘이 높고 청명하였습니다. 서둘러 오전 수업을 마친 선생님은 외출 채비를 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태기산을 내려갑니다. 횡성읍에 있는 교육청에서 학교 인가 증명서를 받아오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서너 시간을 걸어서 읍내에 갔다가, 증명서를 받고 백묵이랑 칠판지우개랑 몇 가지 문방구들을 구입하고는 바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도 태기산 입구 산자락에 들어설 때 벌써 사위가 컴컴해지면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얼마를 걸었을까, 서낭당을 지나고 태기산성까지는 못 미친 중턱 어디쯤으로 기억합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저만치 앞쪽으로 어른 주먹만 한 불덩어리 두 개가 이글거리면서 가만히 멈춰 서 있습니다. 아, 저게 말로만 듣던 호랑이로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오금에 맥이 탁 풀립니다. 이명순 처녀는 그만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호랑이

그런데 마침 주저앉은 자리에 큼지막한 돌멩이들이 널려 있습니다.

“문득 사람들 말이 생각이 나는 거라. 멧돼지는 불빛을 보면 도망가고, 호랑이는 소리를 싫어한다고. 그래서 양손에 돌을 하나씩 집어들고서 딱, 딱 마주치며 입으로는 ‘시편(詩篇) 23장’ [footnote]성경의 일부. 시편 23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장 1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義)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절).[/footnote]을 큰 소리로 외웠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그랬더니 떨리는 게 가라앉으면서 힘이 좀 나는 거 같애. 그 자리에서 밤을 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용기를 냈지.”

가방을 어깨 뒤로 돌려 메고 힘주어 자리에서 일어난 이명순 처녀는 양손으로는 돌을 딱딱 마주치고, 입으로는 큰 소리로 시편을 외우면서, 불덩어리를 향해 느린 걸음으로 뚜벅뚜벅 나아갑니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걸어가니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불덩어리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순간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제일 먼저 떠올라. 아, 내가 호랑이를 이겼구나. 나중에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호랑이 선생님’ 하면서 별명을 불러요. 이때의 느낌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든든하게 힘이 되었는지 몰라.”

■ “어휴. 냄새가 말도 못해”

이튿날 학교 인가 증명서를 본 마을 주민들은 너무나 기뻐서 저녁에 즉석 잔치를 벌였습니다. 모처럼 여기저기 가마솥에서 음식 익는 냄새가 퍼져 오르고, 술독이 마을회관 마당으로 모여듭니다. 누구는 노래를 부르고, 누구는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특히 지금 약사 하는 광윤이 아버지, 나중에 기성회장도 맡아 하셨던 김해진 씨가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평안도 영변인가, 공무원 하다가 내려와서 인천 살다가 오신 분인데, 내외가 다 점잖았어요. 성품이 반듯해서, 좀처럼 경우를 넘는 적이 없는 분인데, 그날은 모처럼 술을 흠뻑 마시고 근처 집에서 자고 다음날 돌아갔어요.”

외박을 한 까닭은 길이 너무 험해서 사고가 날 위험이 상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 씨네 집은 학교에서 고개를 두 개 넘어가야 하는, 태기산 중턱에 몇 가구가 모여 사는 ‘돌문’이라는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잇몸’도 없어서 포기했던 아이들 교육,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안 꾸었던 학교, 그것도 교육청이 인가해준 정식 학교……. 얼마나 기뻤으면 외박을 각오하고 가슴을 술로 달래려 했을까요. 절로 실감이 나는 대목입니다.

다음날부터 선생님을 바라보는 주민들과 아이들의 시선이 달라집니다. 이제는 그냥 스물네 살 처녀가 아니거든요. 무엇보다도 첫날 8명이던 학생이 금방 24명으로 늘어납니다. 학생도 참 다양합니다. 달리 갈 데가 없으니 누나·형을 따라온 네댓 살배기 꼬맹이부터 깜빡 학교 다닐 기회를 놓쳐서 나이가 들어버린 열댓 살 사춘기까지, 땟국물에 절은 꾀죄죄한 ‘꺼병이’[footnote]꿩의 어린 새끼.[/footnote]몰골을 한 아이들이 눈만 초롱초롱,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 무릎 꿇고 허벅지 위에 공책을 놓아 책상을 대신

먼저 칠판을 나눕니다. 세로로 금을 두 줄 그어, 세 칸을 만듭니다. 오른쪽부터 1·2학년, 3·4학년, 5·6학년 순입니다. 선생님이 혼자이다 보니, 수업을 절묘하게 섞어서 꾀를 냅니다. 이를테면 1·2학년은 국어책 베껴 쓰기, 3·4학년은 산수, 5·6학년은 미술…처럼 말이지요.

칠판을 나눠서 수업했던 이명순 선생님
칠판을 나눠서 수업했던 이명순 선생님

책상도 없어서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허벅지 위에 공책을 올려놓고 책상을 삼아 공부를 하였습니다.

허벅지가 책상이었던 시절
허벅지가 책상이었던 시절

아이들은 자꾸 늘어났습니다. 뒤늦게 알고 합류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새로 이주해 오는 주민들도 계속 줄을 이었습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아이들 입성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신발이 없어 맨발인 아이들도 많았고, 바지도 ‘빤쓰’도 없어서 아랫도리를 내놓고 온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여자아이는 속옷이 없어서, 쌀자루에 다리 뻗을 구멍을 내어 하의를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어휴. 무엇보다 냄새가 말도 못해. 발꼬랑내에 지린내에……. 그래서 회관 인근의 공터나 아름드리 나무 아래로 옮겨서 야외수업도 자주 했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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