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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11.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12.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13.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14.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15.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16.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17.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18.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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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특필된 '하늘 아래 첫 학교'
대서특필된 ‘하늘 아래 첫 학교’

 

■ 태기리 아이들 위한 ‘1박2일 졸업식’

1967년 2월 15일.

태기리 산골학교, 정식 이름으로는 ‘강원도 횡성군 봉덕국민학교 태기분실’의 사실상 첫 번째 졸업식 날입니다. 66년 2월 김완정 박기호 등 4명의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지만, 처녀 선생님 혼자 본교에 가서 졸업장만 찾아오고 말았으니 정식 ‘졸업식’이라 부를 수는 없었지요.

유치원 제도가 일반화되기 이전인 당시 교육 여건상 국민학교 졸업은 생애 첫 졸업식이고, 심지어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태기분실’이라는 간이학교 형식이라 하더라도, 산골학교 졸업생들에게 졸업식은 평생의 추억이 되는 나름 비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조금 미묘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소풍이나 운동회는 조금 늦게 도착해도 그다지 차질이 없는 행사였으므로, 아이들이 아침 일찍 태기리를 출발해서 점심 무렵에 합류해도 무방하였지요. 그러나 졸업식은 흔히들 아침 9~10시쯤 행사를 시작해서 한두 시간 만에 끝마치므로, 먼동도 트기 전에 출발을 해야 제시간에 맞출 수 있을 터인데, 태기산의 험난한 겨울 골짜기를 어둠 속에 행군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봉덕국민학교의 막내동생인 ‘태기분실’을 꼼꼼히 챙겨주시는 교장선생님이 특단의 비상조치를 마련해주셨습니다. ‘태기분실’ 졸업생들이 하루 전날 미리 본교가 있는 신대리로 이동을 하여 다음날 아침 졸업식에 참가하는 ‘1박2일짜리 졸업식’을 기획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을 어디서? 신대리에는 여관도 없었고, 있었다 해도 태기리 주민들에게는 여관비의 여유도 없었을 텐데요. 비결은 일종의 자매결연 비슷한 프로그램. 학부모와 교사들 가운데서 태기분실 아이들을 재워줄 지원자들을 준비해둔 것이었습니다.

처녀 선생님은 졸업식 전날 점심식사를 마친 뒤 졸업생 7명을 데리고 본교를 향해 행군을 시작합니다. 땅거미가 뉘엿뉘엿 기울어질 시간, 본교에서는 교장선생님과 여선생님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 같이 학교 옆 식당으로 가서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깍두기가 맛있다고, 고춧가루를 새빨갛게 많이 넣어서 맛있다”고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식사를 마친 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한 집에 두 명씩 지정된 숙소로 안내합니다. 처녀 선생님은 여선생님 집으로 따라갑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껏 수다를 떨어봤네요. 화투도 그날 처음 배웠어요.”

아이들은 참 쉽게 친해집니다. 생전 처음 만나서 하룻밤을 보낸 아이들이 아침 등굣길에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옵니다. 10시 교정에서 졸업식이 거행됩니다. 제일 가장자리에 태기분실 졸업생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머리통 반쯤은 웃자란 아이들, 평균 나이가 14~15살인 만학도(晩學徒)[footnote]나이가 들어 뒤늦게 공부하는 학생.[/footnote]들입니다. 상 받을 일도 없는데 분교 아이들은 다들 상도 하나씩 받았습니다. 참 고마운 교장선생님이십니다.

태기분교

■ 드디어 ‘준교사(강사)’ 자격증이

처녀 선생님은 방학 기간 중에 교육청으로부터 임시교육을 수료하고 ‘준교사(강사)’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월급도 8천 원(요즘 시세로는 200만 원 안팎)을 받는 번듯한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3월 개학을 하고 며칠 뒤 낯선 분이 찾아왔습니다. 교육청에서 새로 보내주신 정호봉 선생님이었습니다. 연세 지긋하고 점잖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산골학교의 환경은 새 선생님이 지낼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하숙을 칠 여건이 되는 집도 없었고, 고령의 남자 선생님이 자취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당시는 남녀의 역할분담이 뚜렷하여 부엌일을 할 줄 아는 남자가 희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정호봉 선생님의 집은 횡성군 공근면. 시계를 예로 들어 보면, 공근면은 10시 방향 서북쪽 끝에 있는 면이고 태기리는 2시 방향 동북쪽 끝에 있는 산이었습니다.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는 탑승을 한다고 해도, 거기서부터 태기리까지는 마땅한 교통수단도 없고, 그렇다고 하루 세 시간씩 걸어서 왕복을 할 수 있는 체력도 아니었고요.

“그러더니 정선생님이 싱겁게 웃으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녀가는 걸로 하자’고 그래요. ‘이선생도 혼자 도맡아서 하는 게 편하지?’ 이러면서…. 물론 교육청에는 모르게요. 그 덕분에 정선생님하고는 많이 친해졌지요.”

■ 불도저에 굴삭기에 일사천리 학교 신축

5월 16일 케어[footnote]세계빈곤퇴치 국제원조구호기구 CARE : Cooperative for Assistance and Relief Everywhere.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교전국의 국민을 구제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 민간구호단체. 뉴욕에 본부가 있다.[/footnote]에서 또 헬리콥터가 날아왔습니다. 위문품 장부에는 ‘대형 학용품 박스 2개, 케어 박스 120개’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번 방문은 건축기사들이 학교 지을 터를 측량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삼발이가 달린 망원경 같은 장비와 깃발, 땅에 꽂는 기다란 장대 따위를 든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며칠 동안 작업을 하였습니다.

실제 신축공사는 68년 초봄에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정산을 할 때 보았는데, 학교 건축비로 케어에서 110만 원, 강원도청(박경원 도지사)에서 170만 원을 출연하였습니다. 요즘 시세로 환산하면, 약 200배 금액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이명순 선생님과 정호봉 선생님도 1만3천 원을 보태었습니다. 거의 한 달 월급을 내놓은 셈입니다.

68년 3월 중순부터 갑자기 미국 ‘제무시 트럭’[footnote] 한국전쟁 당시 맹활약했던 군용트럭에 붙여진 별명. ‘제무시 트럭’을 만든 자동차 회사의 이름이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Corporation)였는데, 이니셜인 GMC를 일본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 ‘지-에무-씨’…, 그걸 매끄럽게 후려서 부른 이름이 ‘제무시’였다.[/footnote]들이 몰려들어서 한편에 건축자재를 부려놓았고, 불도저와 굴삭기가 달려들어서 둔덕을 밀고 움푹한 곳을 메워서 학교 부지와 운동장을 매끄럽게 펼쳐놓습니다. 오늘날 태기산 산마루 휴게소에서 태기분교 터로 이어지는 주도로도 학교 신축 공사 때 닦아놓은 것입니다.

미군지원단의 제무시(GMC) 트럭
미군지원단의 제무시(GMC) 트럭

미국 원조단과 강원도청이 진행한 프로젝트이니만큼 공사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불과 두 달 남짓 만에 67년 5월 17일 교실 4칸짜리 100평 크기로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의 학교가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 1968년 6월 10일 눈물의 개교식이 열린 것입니다. 산골학교도 ‘갑천면 봉덕초등학교 태기분실’에서 ‘둔내면 덕성초등학교 태기분교’로 바뀌게 됩니다. 개교 기념으로 케어에서 각종 운동기구와 농구공·배구공·축구공 따위 공들과 네트 등을 선물하였습니다. 이제는 운동회도 제법 모양을 갖출 수 있게 되었네요.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제부터는 소풍도, 입학식·졸업식도 3시간씩 걸어가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태기분교

■ “연애편지가 그렇게 많이 와”

기다렸다는 듯이 언론의 대서특필이 이어집니다. 조용하던 화전민 약초단지로 갑자기 기자들과 카메라들이 들이닥쳐 며칠 동안 와랑와랑 야단법석이 벌어집니다. 신문들은 제목도 참 잘 뽑습니다.

[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탄생]

[하늘 아래 첫 학교의 처녀 선생님]

[현대판 상록수 이명순 선생]

…….

인터뷰 코멘터리도 참 구성집니다.

“그림책에서만 보아온 기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6학년 우호근)”

마을에 변소 시설과 우물이 없어 어린이와 주민들의 보건 위생이 엉망이다. 갑자기 큰 병이 돌면 꼼짝없이 죽을 판(정호봉 선생)”

마을 전체에 라디오가 겨우 7대 있다. 그나마 4대는 고장인 실정.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 정서 교육이 크게 걱정(이명순)”

…….

이번에는 강원도의 지역 언론에 보도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의 대표적인 신문과 방송들, 여성잡지 등이 전국구로 보도를 해준 것입니다. 성금과 위문품, 위문편지가 이전의 몇 배 규모로 전국 각지에서 날아들었습니다. 우체부의 얼굴은 더욱 울상이 되었고, 그래서 편지는 모아서 1주일 치를 한 번에 배달하기로 조정을 해주었습니다.태기분교

 

태기분교

태기분교

“위문편지가 하도 많아서 우선 위문품에 붙어온 편지부터 읽고, 달랑 편지만 온 것들은 읽지도 않고 박스에 던져두었어요. 밤에 짬을 내서 틈틈이 살펴보는데, 연애편지가 그래 많아. 사귀고 싶다고…, 자기는 몇 살이고 어디 살며 어디 학교 다닌다고……. 나중에 아버지가 그런 사실을 알고는 ‘너는 연애질하러 학교 올라가느냐’며 편지 뺏어서 태워버리기도 했어요.”

■ 박목월 시인과 친하다던 사기꾼 소설가

태기리 화전마을로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교육청·도청·군청 등 관련 공무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응원과 후원 차원에서, 자원봉사 차원에서 태기리 마을을 찾았습니다. 서울시립대 농과대학과 강원대 농과대학 학생들이 농촌봉사활동으로 태기리에서 약초재배 자원봉사를 하였고, 횡성실업중고등학교는 태기분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를 하였습니다.

“특히 두 사람이 생각나네. 한 사람은 서울 신설동에서 찾아온 이성옥 학생. 당시 무학여고 2학년이었는데, 신문을 보고 편지를 보내와서 답장을 해줬더니,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와 한참씩 지내다 갔어요. 태기리에서도 지냈고, 방학 때는 화동리 아버지 집에서 같이 지내기도 하고…. 애들하고도 친해져서, 나중에 간호사가 된 뒤에 서로 연락도 했다는데 지금은 인연이 끊겼어요. 이 이야기 읽고 연락이 왔으면 좋겠네.”

또 한 사람은 넉살좋은 소설가.

69년에 찾아와서 글 쓴다고 1년 반쯤 산 아래 신대리 마을에 방을 얻어두고 살았어요. 맨날 베레모에 체크무늬 잠바 차림으로 다니며, 박목월 시인하고 친하다고 자랑하고…. 육민관고등학교 선생님들 이름을 대면서, 또 자기랑 친하다고…, 그러면서 수업 끝날 시간쯤 되면 학교 근처를 찾아와서 배회하는 거예요.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당시 4학년에 최춘수라고 싸움 잘하는 개구쟁이가 있었는데, 2018년 모임에서 불쑥 그러는 거야.

옛날에 여차했으면 그 소설가 선생 패줄려고 했다고.”

어쩌면 그때 최춘수 어린이가 소설가 어른을 패주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 선생의 행적은 끝내 대대적인 사기극으로 끝나고 말았거든요. 앞서 이 이야기 제9화 ‘태기산 약초 한우의 추억’에서 ‘태기산 목장’의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있었지요? 소설가 선생이 태기산에서 1년여를 굴러먹는 동안 저 ‘약초 한우 목장’ 이야기를 주워들은 모양입니다.

횡성한우 (설성목장)
횡성한우 (설성목장)

“소설은 영 진척이 없고, 어느 날부터 목장을 하겠다며 사람들을 데려오는 거예요. 산 정상 부근에서부터 인근 골짜기까지 토질검사를 하네, 목장 건물을 짓는다고 측량을 하네 그러면서…. 목장을 하게 되면 태기리 주민들도 일거리가 많이 생길 거라면서,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가. 부자 학부형들한테서도 빌려가고, ‘늦은목’ 저편에 있던 목재소에서도 빌려가고, 나한테도 빌려달라길래, 주민들 살기 좋아지나 보다 싶어 아버지한테 융통해서 돈을 얻어주었더니 그 뒤로 영 안 보여. 도망간 거지. 요즘 시세로 몇 천만 원은 될 돈인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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