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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 단군 이래 최대의 화전(火田)

1965년 강원도 횡성군의 태기산 산마루에서는 파천황(破天荒: 이전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처음으로 함)의 거대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해발 1,261m 태기산의 산등성이 일대를 불태워서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화전(火田)을 만드는 사업이었습니다. 화전이란 것이 대개는 나라의 환란이나 폭정으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이 슬그머니 심산(深山) 골짜기로 스며들어 밭뙈기나 만들어볼 요량으로 손바닥만큼 불을 질러 그 잿더미를 거름 삼아 터앝 농사를 짓던 생계형 수작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잿더미로 북돋는 거름의 땅심이 워낙 밭아서, 부득불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또 불을 놓아 새 화전을 일구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태기산의 화전은 애당초 목적과 규모가 달랐습니다. 일단 사업 주체가 중앙 정부입니다. 즉 국가 주도 사업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국가가 확성기를 들고 앞장서서 산 정상부를 홀랑 태워서 밭으로 바꾸는 거국적 사업.

드넓은 태기산 산마루

드넓은 태기산 산마루

이 스토리텔링의 맨 앞 프롤로그에서 설명한 것처럼, 태기산은 산 아랫 부분의 경사가 극악하게 험난한 반면,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평평해지는 고원 같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헬리콥터를 타고 상공을 지나가던 대통령이 태기산 산마루를 보고 비서에게 물었다 합니다. 저 산 이름이 뭐야? 무슨 산꼭대기가 저렇게 넓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 어마어마하게 넓고 평평한 산마루 일대를 밭으로 만들어 보라. 그 한마디로 단군 이래 최대의 ‘화전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는 뒷담화가 전합니다.

뒷담화야 믿거나말거나 ‘태기산 화전 프로젝트’는 떠들썩하게 진행되었고, 엄청난 사업의 주체가 국가인 사실 또한 변함이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어느 산등성이에서는 나무들이 베어져 넘어갔고, 어느 골짜기에서는 불기둥이 치솟았으며, 불탄 자리에는 사진에서처럼 가지런하게 계단식 밭이 들어섰습니다.

태기분교와 계단식 밭

태기분교와 계단식 밭

■ 집도 없이 투입된 ‘맨땅에 헤딩’ 전위대

태기산 화전농업 프로젝트가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65년 9월입니다만, 초기에는 두세 해 전부터 사업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전위대를 투입하였습니다. 주로 폭력배와 부랑자 같은 요주의 인물들을 보냈다 합니다. 물론 지원자들도 있었구요. 이기운 씨(61) 가족이 초기 지원자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에 속합니다. 아버지가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천하장사여서 어설픈 폭력배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62~63년 겨울쯤이었을 거예요. 눈이 엄청 왔는데, 왈패 한 녀석이 취해서 아버지한테 시비를 거는 거라. 그래 그냥 한 손으로 번쩍 들어서 던지니까 저만치 날아가서 눈더미에 푹 꽂혀버렸어. 근데 한참을 그렇게 거꾸로 처박혀서 꼼짝을 못해. 그래서 아버지가 꺼내주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나도 그거 봤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왕 씨라고 불렀어요. 태기산 이사 가서 얼마 안됐을 때, 첨엔 헷갈려서 니가 왕 씨인 줄 알았대니깐.”

“어휴. 손목이 보통사람 장딴지만 했어요.”

“근데 니는 어쩌다가 아버지 유전자를 못 받았니?”

“누나랑 막내만 받았어. 천하장사!”

한바탕 추억담이 폭설처럼 쏟아지고, 웃음꽃이 튀밥처럼 터져 오릅니다.

초기 전위대들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밀림처럼 우거진 태기산의 비림(秘林)을 뚫고 수십m 높이의 아름드리 거목들을 베어내는 산판(山板)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벌목에 투입한 일꾼들이 생활할 최소한의 지원도 없었습니다. 집 지을 재목도 보급이 안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 합니다. 볕 잘 드는 곳에 살림집 정도의 넓이로 1m 이상 땅을 파내고, 산에서 잘라낸 나무 기둥을 파낸 웅덩이에 기대듯 꽂아 세워 얼개를 잡고는 그 위로 지붕용 가지를 가로지르고 비닐과 솔가지를 얼기설기 덮고 지내는 것입니다. 움막 한가운데를 둥그렇게 파내고 모닥불을 피워 한겨울의 한기를 이겨내고 살았다 합니다. 첫해 끼니는 원조 밀가루가 유일했고요.

화전민 집터

화전민 집터

■ 보름 동안 밤낮없이 불타오르는 천 년 원시림

벌목으로 길이 뚫리고 골짜기가 열리자, 언젠가부터 한쪽에서 산에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불길이 대단했어요. 너무 커서 베지 못하고 남겨둔 아름드리 단풍나무며 고로쇠나무 군락지에 불이 붙으면 보름 동안 밤낮없이 활활 불이 타올랐다니까. 불길이 위로 솟으니까 산꼭대기라서 더 번질 데도 없었고.”

불을 피울 때는 사람들이 다들 모여서 위험에 대비합니다. 산불이 옆 골짜기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골짜기 사이 경계의 나무들을 먼저 10여m 넓이로 베어내고 불을 놓습니다. 이전에 베어낸 나무의 가지며 삭정이들을 어느 정도 말린 다음에 불쏘시개 삼아 불을 지르는데, 불길은 겁이 날 정도로 엄청나게 타올랐고요. 건너편 골짜기에는 불 끄는 청솔가지들을 준비한 사람들이 산등성이 여기저기로 미리 자리를 잡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합니다. 그렇게 천 년 원시림이 재가 되어 사라져갔고, 사람들은 불이 꺼진 뒤에 타고 남은 숯들을 땅에 묻어가며 화전을 일구었습니다.

프로젝트가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합니다. 산마루 입구의 고갯길로는 매일같이 밀가루 포대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먼지 흩날리며 왕복달리기를 하였고, 마을 한쪽의 공터에는 새로 판잣집을 짓기 위한 각목이며 합판들이 바리바리 쌓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묘하게 들뜬 소문이 돌았습니다.

“태기산 산마루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로 준다더라.”

개중에는 ‘태기산 프로젝트’ 소식을 용케도 미리 알아채고 잽싸게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기 프로젝트의 명분은 ‘화전민 정착사업’이었습니다만, 발 없는 말은 어찌나 빠른지 횡성뿐만 아니라 이웃한 평창과 홍천, 경기도 여주와 용인, 심지어 수원과 인천 등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소식 빠르고 행동 날랜 사람들 가운데 못된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지요. 태기산에서도 그랬습니다. 냉큼 먼저 움직여 관리들과 안면을 익히고, 밀가루며 목재며 원조물자 보급 일을 따내서, 업자들과 짜고서 절반을 미리 처분한 뒤 나머지만 태기산으로 나르는 수법이었습니다. 태기리 사람들 사이에서 “밀가루 빼돌려서 모은 돈으로 둔내면에 땅을 샀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만송의 아버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말썽장이네 가족들을 내보내고, 이장을 맡아 태기리 운영 체제를 재정비합니다. 만송 일가족이 피난 같은 이사를 했던 날이 바로 그 무렵이었던 거지요.

외국(핀란드)에서 화전밭을 정리하는 모습 (출처: 퍼블릭 도메인)

불이 꺼진 뒤에 화전밭을 정리하는 핀란드의 화전민 모습 (출처: 퍼블릭 도메인)

■ 엉성해 보여도 지붕은 기와집

뚜벅뚜벅 걸어와서 울고 있는 세 사람을 품으로 감싸 안는 아버지. “어느덧 아버지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흘렀다”고 한만송 씨는 회상합니다. 아이 둘을 한꺼번에 업고 짐보따리를 받아든 아버지와 뒤를 말없이 따르는 어머니. 그렇게 한참을 걸어갔던 골짜기는 이름이 ‘수통메기’였습니다. 갈지자로 간신히 고갯마루까지 기어 올라온 신작로에서 태기산 산마루의 화전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같은 골짜기입니다. 지금 고갯마루 휴게소에서 태기분교 기념관 앞을 지나 풍력발전기 사이로 뻗어 있는 찻길은 화전마을을 만들고 2~3년 뒤 농작물이 제법 생산되면서 작물을 출하하기 위해 새로 뚫은 길이고요. 뒤에 도로 폭도 넓어지고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하얗게 눈이 덮인 수통메기 골짜기로 들어가면서, 그 때는 그 길이 그렇게 지긋지긋한 ‘고생길’이 되리란 것을 만송은 짐작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좌우로 눈 덮인 계단식 밭이 늘어선 골짜기 사이를 걸어갑니다. 손수레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게 뻗은 임도(林道)를 따라서 산 고개를 넘는 사이 드문드문 골목길이 이어지며 구석마다 상자처럼 생긴 붕어빵 닮은꼴 집들이 혹은 서너 채씩, 혹은 예닐곱 채씩 이웃을 하고 있습니다.

생김새는 가로 10m, 세로 3m, 10평 남짓한 직사각형 한일자 집으로, 평면을 삼등분한 단순한 설계입니다. 한쪽 끝에서부터 부엌과 안방과 쪽방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부엌에 하나, 안방에 하나, 골목길을 향해 문이 나 있습니다. 툇마루도 없어서 안방 문을 열면 길에서 살림살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부엌과 안방과 쪽방 사이에 쪽문이 하나씩 나 있고요.

아, 저렇게 엉성해 보여도 지붕은 기와였습니다. 암키와와 수키와를 한 몸으로 합해 만든 일본식 기와를 모방한 이른바 ‘새마을운동형 기와’ 말이지요. 기와는 아이들이 날랐습니다. 트럭들은 기와를 신작로의 수통메기 입구 언저리에 부려놓았습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두세 개의 산 고개를 넘어서 태기리까지 아이들이 기와를 칡덩굴이나 지푸라기로 꼬아 만든 새끼줄로 묶어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 합니다. 고학년 남자 아이는 3~4장, 어린 아이와 여자애는 2~3장씩. 아이가 없거나 일찍 장성하여 산을 떠난 집에서는 기와를 가져올 틈이 없어서, 시누대와 조릿대를 베어 지붕을 엮었다 하고요. 비오는 날은 안방에 가득 펼쳐놓은 그릇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퐁당퐁당 처량도 하였다지요.

고개 하나를 더 넘어가자 작은 골짜기로 집이 서너 채 모여 있습니다. 골목 끝 집에 이르러, 아버지를 따라서 안방에 들어서니 아랫목에 보온용 이불이 덮여 있습니다. 만송이 얼른 이부자리 아래로 손을 넣어봅니다. 방바닥이 보기보다 따뜻합니다. 어두운 실내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윗목에 널어놓은 약초 뿌리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동시에 한약방에서 맡아보았던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태기산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그렇게 쿰쿰한 한약방 냄새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태기리 화전농

태기리 화전농

■ 사람이 살고 있었네

태기산에서 맞는 첫 아침. 지붕 위로 흰 눈을 덮고 있는 박스형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아침 짓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입에서는 하얗게 김이 피어납니다. 이웃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아침상을 기다리다 지루해진 만송이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서 흘금흘금 이웃집들을 기웃거려 봅니다.

조심조심 이웃 고샅을 살피는데, 저쪽에서 와글와글 아이들 소리가 들립니다. 또래 아이들 너댓 명이서 눈밭을 뒹굴고 있습니다. 슬금슬금 다가가 봅니다. 아, 그런데 이게 뭘까요? 다들 신발에 뭔가를 신고 있습니다. 썰매처럼 생긴 것이 좀 더 길고 날렵합니다. 앞 코를 둥그스름하게 말아 올린 모습이 스키 비슷하기도 합니다(당시는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아, 모두들 스키를 구경하지도 못하였을 때). 조금씩 다가가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훌쩍 미끄러져 다가온 아이가 급정거를 하면서 말을 걸어옵니다.

“처음 보는 애네. 어디 사니?”

만송은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합니다.

“저 집에 살아. 어제 이사 왔어.”

만송은 힐끔힐끔 아이의 나무썰매를 훔쳐봅니다.

“하하. 처음 보지? 이건 눈썰매 신발이야. 한 번 타볼래?”

아이들이 직접 만든 눈썰매 신발

아이들이 직접 만든 눈썰매 신발

눈밭 위를 신기하게 미끄러져 가는 눈썰매 놀이에 정신없이 빠져듭니다. 설렁설렁 산책 삼아 나온 차림이라 장갑도 없이 흠뻑 젖은 몸이 금방 차가워집니다. 마침 식사를 채근하는 어머니 목소리에 만송은 아이들과 작별을 하고 집으로 뛰어갑니다. 집으로 돌아온 만송이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문고리를 잡는데, 그만 고사리 같은 손이 문고리에 찰싹 얼어붙어버렸습니다. 순간 작은 소동이 일어납니다. 아버지가 얼른 달려나와서 문고리를 호호 불어가며 만송의 손을 떼어냅니다. 떼어낸 자리가 까지면서 발그스름하게 홍조를 띠어 따끔따끔합니다.

■ 태기산 ‘스키부대’의 눈부신 활강 

해가 중천에 오르자 남자들을 일 보낸 마을사람들이 양지바른 집에 옹기종기 모여듭니다. 화투놀이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몹시 즐겨하는 소일거리였습니다. 각자 ‘카지노 칩’에 해당하는 성냥개비를 나누어 가지고 따거니 잃커니 주고받다보면 해거름도 잠깐이었습니다. 부엌 아궁이에서는 잉걸불이 이글거리고, 부뚜막에서는 흰 김을 내뿜으며 씩씩하게 칼국수가 재잘거립니다. 가마솥 가득 보글거리는 칼국수는 도대체 몇 인분일까요.

개구쟁이들은 끼리끼리 놀이패를 꾸려서 골짜기 눈밭으로 달려갑니다. 만송은 아침에 사귄 친구의 소개로 또래 개구쟁이들과 상견례를 마치고 패거리에 끼어듭니다. 아이들은 기꺼이 만송을 맞으며, 기념으로 만송을 위해 눈썰매 신발을 만들어줍니다. 팔뚝만큼 굵은 물푸레나무를 베어 키만큼의 길이로 자른 뒤에, 널빤지 모양으로 깎아낸 다음 앞부분을 불에 살살 구워가며 스키 모양으로 구부립니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습니다. 각자 자신의 눈썰매 스키와 작대기를 어깨에 메고, 줄을 지어 산꼭대기에 오릅니다. 브리태니커가 저 스키 사진을 보았더라면, 자연발생적 원시 스키의 원조로 백과사전에 등재하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를 때까지는 만송도 스키부대의 일원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이었는데, 정상에 이르자 분위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골목대장의 활강을 시작으로 태기산 스키부대의 눈부신 활강이 펼쳐집니다. 드디어 꼴찌인 만송의 차례입니다. 그런데 그만 만송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고추’를 움켜잡고 말았습니다. 왜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 걸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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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송준
초대필자. 작가. 건축 칼럼니스트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글쓰기를 시작해 어언 30년째 글밥을 먹고 있다. 1995년 무렵부터 건축 분야를 맡게 되면서 늦깎이로 독학의 계단을 올랐다. 『공간Space』, 『건축인Poar』, 『플러스Plus』 같은 건축 전문지에 인터뷰 원고와 리뷰·건축 칼럼을 썼고, 집도 직접 두어 채 지어보았다. 2010년에는 서울시가 주최한 [서울건축문화제Seoul Architecture Festival]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저서로 영국 건축문화기행 『건축의 표정』(글항아리, 2017)과 예술인 에세이 『바람의 노래』(동녘, 2010), 영화 이야기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심산, 20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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