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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날씨 탓인가, 한 해를 보내는 착잡한 기분 때문일까, 유난히 기분이 침울했는데 27일 정오쯤에 들려온 뉴스는 다가올 새해의 작은 희망마저도 박살 내고 말았다. 마음이 뒤숭숭하니 일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이 같은 비극적 뉴스 한두 번 겪어 본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담담해지려 애써도 보았다. 어차피 내 가족 일도 아닌데, 맘속으로 수십 번 욕하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했는데, 중년 우울증이 심해졌는지 충분한 애도 없인 밤잠을 이루기 어렵겠다.

기자들이 몰려 있지 않은 조용한 추모 공간이라도 어디 있다면,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두르고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도 영화에서 담배를 아주 맛있게 피웠다는 기억이 났다. 담배 한 개비, 국화꽃 한 송이를 그의 가는 길에 놓고 싶었다. 어째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내 가슴을 저미게 하는 지를 떠올려 봤더니, [나의 아저씨] (2018)에서의 역할 때문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인간사를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극찬한 드라마 말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2018)를 극찬한 코엘료의 트윗.

박동훈의 구원, 이선균의 죽음


그 드라마에서 그는 너무나도 평범한 패배자였다. 한때는 좋았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직장 생활은 그 누구에게라도 힘들다. 특히 40대 중후반 한국 남자들에게는 지옥이기도 하다. 밑도 끝도 없이 각박한 사내 정치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가정사의 수레바퀴들. 그런 와중에 그의 인생에 불쑥 끼어든 낯선 소녀.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두 인물은 우연히 서로의 인생사를 엿볼 기회가 주어지는데,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거의 무한대의 비루함과 비참함이 펼쳐진다. 성난 야생 고양이처럼 울부짖는 소녀를 앞에 놓고 이선균이 이렇게 위로한다.

이지안(아이유 분): 사람만 죽인 줄 알았지? 별짓 다 했지. 더할 수 있었는데. 그러길래 누가 네 번 이상 잘해주래? 바보 같이 아무한테나 잘해주고. 그러니까 당하고 살지.

박동훈(이선균 분): 고맙다. 고마워. 그지 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고마워. 나 이제 죽었다 깨나도 행복해야겠다. 너, 나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는 꼴 못 보겠고. 난 그런 너, 불쌍해서 못 살겠다. 너처럼 어린애가 어떻게… 어떻게 나 같은 어른이 불쌍해서… 나 그거 마음 아파서 못 살겠다. 내가 행복하게 사는 꼴 보여주지 못하면, 넌 계속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할 거고,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너 생각하면, 나도 마음 아파 못 살 거고. 그러니까 봐, 어! 봐!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사나 꼭 봐. 다 아무것도 아냐. 쪽팔린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다 아무것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 망가져. 행복할 거야. 행복할게.

이지안: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했어요.

박동훈: 어, 행복할게.

드라마 [나의 아저씨] (2018) 제 15회 중에서

이선균의 죽음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박동훈이 힘겹게 완성시킨 구원의 메시지가 한국 현실에서 완벽하게 붕괴했음을 상징한다. 그러니 어찌 눈물 없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얍삽해 보이는데?


그는 누가 뭐래도, 남성들이 좋아하기 힘든 배우였다. 남자들도 남자 배우에 대해 관심이 높다. 남성도 미적 기준이 대개 또렷하고 경쟁 호르몬이 여성 못지않게 발달해서, 사람을 딱 보면, 저 남자가 나보다 얼마나 잘났고, 지적인 능력은 물론, 체력과 매력도까지 한 번에 견적을 내보기도 한다.

야생마 같은 거친 남성성이나 동화 속 왕자와도 같은 세련된 도시 매력이 넘실대는 드라마 시장에서, 그는 참으로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니까 남자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굉장히 예리한 촉을 지닌 여성만이 발견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닌, 뭐 그런 모던한 남성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래, 저 친구가 특히 발성이 정확하고 목소리가 멋진 건 맞아, 그런데 좀 찌질하고 날티나지 않던가? 너무 얍삽해 보이는데? 너무 폼만 잡는 거 아닌가? 같은 또래들은 이렇게 비평했다.

덤벙대는 여자 주인공과 티격태격 말로 싸우는 까칠하고 삐쭉한 성격에, 그리 친절할 것 같지 않은 각진 인상, 로맨틱함이라고는 1도 없는 딱딱한 성격까지. 물론 수많은 PD와 감독들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스타카토 정확한 발성의 그가 등장하면 확실히 ‘여자 주연’이 빛나기 때문이다. 잘생겼다고 할 수 없지만, 그는 정확하고 진지하게 상대방을 공격할 줄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K-드라마로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환경에 최적화된 남자 배우였다.

파스타 (2010, MBC)

어른으로


심지어 그는 홍상수가 연출한 [옥희의 영화] (2010)를 제외하면 예술 영화나 사회 고발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이른바 ‘의식 있는’ 배우도 아니었다. 2000년대 이후 상당히 장시간 한국 영화계는 예술영화, 사회 고발영화, 상업영화로 나뉘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그냥 맡은 배역에 충실한 배우였다. 배역을 가리지도 않았다. TV와 영화에서 로맨스, 범죄스릴러, 코미디, 심리극 등 가리지 않고 찍었다.

드라마에서의 성공은 빠른 편이었는데, [하얀거탑] (2007), [커피프린스 1호점] (2007), [파스타] (2010)을 통해서 MBC에서만큼은 확실하게 주연급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남자 관객들은 그를 그다지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이선균이 매력적이라는 감독과 여성 관객들이 서서히 늘어났으리라.

한참 동안 그를 주목하지 못했는데, 역시 우리 또래는 [나의 아저씨] (2018)을 통해서 그의 성장을 절감했던 것 같다. 누가 뭐래도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박동훈’이란 역할은, 아마도 우리 세대가 죽을 때까지는 회자할 것 같다. 좋은 일은 연달아 있는지, 아마도 그 무렵 찍은 영화 [기생충] (2019)으로 그는 세계적인 배우의 대열에 들어선다. 거창한 배역을 해온 배우가 아니었는데, 그는 훌쩍 성장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기생충 (2019)

위로


그는 전면에 나서는 배우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누구도 그를 과하게 칭찬하지도 주목하지도 않았다. 그의 대표작인 [나의 아저씨]에선 아이유가, [기생충]에서는 송강호가 주인공 이미지를 독식하기도 했다. 아마도 우리가 그를 놓친 이유는, 그의 연기가 너무도 현실적이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맡은 배역에 지나치게 찰떡처럼 녹아 들어갔기에, 차마 ‘연기를 잘했다’고 칭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배역 자체가 지나치게 인간적인 이유도 있다. 그에겐 주로 뺀질뺀질하지만, 속 깊은 남자 역할이 맡겨졌는데, 시청자 입장에선 그의 뺀질뺀질함을 먼저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기생충]도 마찬가진데,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아마도 평창동 같은 부촌에 200평 대지에 100평짜리 저택을 소유한 천억대 자산을 가진 IT 업체 대표로 등장한다. 겉은 지극히 신사답고 매너도 좋지만, 그 속은, 대개 그 세대 남자들이 그러하듯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평범한 속물을 맡아 연기한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부자나 잘난 사람을 연기하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비쳤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도 그 대목을 간파하고 캐스팅했을 것 같다.

훌쩍 커버린 그의 ‘어른스러움’을 목격한 작품은 앞서 말한 [나의 아저씨]란 작품인데, 아마도 이를 목격한 3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의 남성들은 대개 눈물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극 중 박 부장이 처한 현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사는 한국인 남성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처지 하나하나가 뼈저리게 공감이 되고, 이를 묵묵히 극복해 내는 그의 모습에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선균과 아이유의 연기 호흡은, 지금 떠올려봐도, 울컥 눈물이 치밀어 차마 언급이 힘들다.

나의 아저씨 (2018, tvN)

배우의 힘


내가 ‘이선균’이란 이름 석 자를 처음 인지한 시점은 [하얀거탑]에서 내과 과장 역할을 하던 2008년도 무렵이었다. 아마 그의 나이가 30살 초중반이었을 텐데, 세속적 성공에 연연하지 않는 연구하는 의사 역할을 너무 빼어나게 수행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더랬다. 그는 진지한 표정과 잘 어울렸다. 이후 등장했던 작품이 워낙 많아 필모그라피를 보면 놀랍기도 하다. 단역에서 시작해 조연으로, 다시 차근차근 출연 작품을 늘리고, 연기 폭을 늘려가면서 지난 20년 가까이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

떠올려 보면, 우리 세대는 그와 동시에 백수의 삶을 살기도 했고, 그가 [커피프린스]와 [파스타]에서 진하게 연애하던 무렵 실제로 사랑을 시작했으며, 자신의 전문성을 찾기 위해 노력도 해보고, 친구의 아픔을 슬퍼하기도 하며, 또 회사에서 죽도록 일하며 잘릴 위기에 처해보기도 했다. 배우라는 건 참으로 매력적인 존재구나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도 친구 같고, 때론 형, 동생 같은 배우가 갑자기 뉴스에 오르내리더니, 두 달이 채 되지 않아서 갑자기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2017년 보이그룹 [샤이니]의 종현이라는 멤버가 죽었을 때 1020 청소년이 느꼈을 감정이 이런 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울컥해진다.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 40대 후반 50대 초반 남성들에게, 이선균이라는 배우는 상상외로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얀 거탑] (2007, MBC)

서글픔


인간의 모든 죽음이 서글프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죽는다는 건 더욱 슬프고 심적으로 더 큰 충격을 주는 것 같다. 심지어 20년 가까이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나마 알고 지낸 사람인데 말이다. 또 나는 그의 작품에서 굉장히 다양한 감동과 영감을 얻었는데, 그렇게 그는 우리를 위로해 준 인물인데 말이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배우인 그의 아내는 우리가 또 대략은 아는 강인하고 멋진 여배우 출신이며, 48세라는 나이에 걸맞게 토끼 같은 두 아들의 아빠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를 둘러싼 1만여 개가 넘는 기사는 더럽고, 비윤리적이며, 추악한 형태로 묘사하는 잔인한 제목으로만 남고 말았다.

사건 보도 직후, 잠시나마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던 필리핀과 태국,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떠올리며, 무지한 국가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을 죽였는지를 잠시 헤아려 보았다. 나아가, 어째서 우리의 사생활은 존중받지 못하게 되었을까도 함께. 더 많은 애정과 찰나의 현실도피를 갈망하지 않는 현대인도 있다던가? 그것을 꿈꾼 것만으로 죄라면, 우리는 모두가 유죄 아닌가?

그가 국가 폭력과 언론의 자극적 보도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분개하는 글을 쓰려다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그냥 그의 죽음이 너무 안타깝고, 인생이 허무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나의 무력감이 압도적이라는 점만을 깨닫곤,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명복을 빈다. 꼭, 꼭, 극락왕생했으면 좋겠다.

너는 진짜 멋진 어른이었고, 너의 연기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

via imdb.

추신.

그의 죽음을 어떻게 수식해 봐야 할지 잠시 고민해 보았는데,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남자의 죽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의 아저씨] 박동훈도 사라졌다. 광화문이 아니라도 어디 빈소 말고 가까운 조문 장소라도 있으면 좋겠다. 담배 한 까치, 하얀 국화 하나 놓아두고 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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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어제는 그냥 싱숭생숭하더니 오늘은 자꾸 눈물이 나네요 비슷한 또래지만 남자는 아니고
    다만 진짜로 죽고 싶을만큼 힘든데 용기는 없어서 죽지는 않고 꾸역꾸역 살아가다가 나의아저씨를 보면서
    특히 아무것도 아니란말 , 그리고 지안이에게 꼭 행복하겠다는 그말 등등 무수히 많은 박동훈의 대사로
    펑펑울며 위로받고 다시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하고 힘들때마다 그 위로를 떠올리며 살아왔던 1인이예요
    뉴스보면서 솔직히 실망안했다면 거짓말이고 다만 포토라인에서 팔휘적거리며 걷는것 그와중에 90도로 인사하는것 그 모든 모습이 내가 알던 박동훈같아서 부디 아무것도 아니니 꼭 견디시라고 조용히 응원만했는데 힘이 못되어드린거 같아서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부디 그곳에선 평안하셨으면 합니다

  2. 더 많은 애정과 찰나의 현실도피를 꿈꾸는 사람들은 많을지 몰라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음. 도덕적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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