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de style=”2″]
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divide style=”2″]
■ 들쭉날쭉, 태기리 번지수의 비밀
태기산 꼭대기의 태기리 화전(火田) 마을에는 모두 12개의 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요. 저 12개의 반 위치가 들쭉날쭉 멋대로였어요. 3반 옆에 7반이 있고, 6반 옆에 9반이 있고…, 가로세로로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골짜기를 따라 숫자를 매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기준에 따라 반을 정한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태기리를 찾아와서 마을을 이룬 순서였습니다. 점차 화전이 늘어남에 따라 생겨난 적당한 공터에 자연스레 사람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차례로 마을이 늘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맨 먼저 생긴 마을이 1반, 그 다음이 2반…, 맨 마지막에 형성된 마을이 12반이었던 것이지요.
횡성읍에서 동쪽으로 횡성군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뻗은 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동쪽 경계 부근에 둔내면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둔내면이 가까워지면서부터 등고선이 두드러지게 높아지고, 구불구불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가파른 산길이 시작됩니다. 힘들게 뻗은 도로는 태기산의 남쪽 산허리에서 잠시 쉬었다가 고개 너머 평창군 봉평면으로 멀어져갑니다(구도로). 고갯마루 휴게소에는 차량 십여 대 주차할 정도의 공터가 있을 뿐, 지금도 아무 휴게 시설물 없이 감자옹심이와 막걸리를 파는 푸드트럭 아저씨 내외가 수십 년째 손님을 맞고 있습니다. 수십 년 자리를 지킨 음식 솜씨가 명불허전입니다.
휴게소에서 도로 맞은편 북쪽으로 승용차가 왕복할 정도의 시멘트 포장도로가 태기산 정상을 향해 뻗어 있는데, 이 도로는 훨씬 뒤에 생긴 것입니다. 태기리 마을이 생길 무렵에는 고개를 넘어 봉평 쪽으로 1Km쯤 내려간 지점의 왼편 도로가에 태기산의 동쪽 사면으로 골짜기를 오르는 작은 산길이 나 있었습니다. 이 산길이 도로에서 태기리 마을로 이어지는 유일한 교통로였습니다.
그 산길을 오른 뒤 태기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이름이 수통메기였습니다. 이 수통메기에 있던 마을이 1반, 수통메기에서 다시 고개를 하나 넘은 곳에 있는 마을이 2반이었다 합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올라 완만한 경사를 따라 나아가다보면 태기분교가 있던 제법 널찍한 분지가 나옵니다. 이 일대가 당시 태기리의 가장 번화가였습니다. 태기분교 뒤쪽 언덕 위에는 헬리콥터 착륙장이 있어서, 늘 이런저런 보급품이 도착하던 이를테면 마을의 다운타운가인 셈이었지요.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합니다. 마을 중심부인 다운타운가의 주변에는 3반, 4반, 7반…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제일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기득권 터줏대감인 1반과 2반은 왜 하필 다운타운에서 동쪽 고개 너머에 있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수통메기 인근에 터를 잡고 있었을까요.
■ 나무의, 나무에 의한, 나무를 위한 ‘통발’ 벨트
반 이야기가 조금 길었네요. 뜬금없이 반 이야기를 꺼낸 것은 태기리 마을 형성의 초기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태기리 화전 프로젝트’가 공공연하게 언론을 통해 발표된 것은 1965년 9월이었고요, 그보다 두세 해 앞서서 전위대로서 희망자들을 먼저 태기산 정상에 투입한 것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습니다. 초기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태기산은 울창한 밀림을 방불케 하였습니다. 장정 예닐곱 사람이 손을 잡고 둘러싸야 간신히 둘레를 감쌀 수 있는 아름드리 원목들이 지천이었고, 하늘을 까맣게 뒤덮는 머루, 다래, 으름덩굴 따위들로 그냥 걸어서 지나가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합니다.
1962~63년께부터 투입되기 시작한 전위대들의 초기 임무는 나무를 베어내는 산판(山板)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1반이 태기리의 가장 동쪽 끝, 도로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일 먼저 나무들을 베어낸 뒤에 생겨난 공터에 첫 번째 마을이 생긴 것이지요. 차가 들어올 길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모든 일은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해결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튼튼하고 거친 장정들이라 해도, 아름드리 원목을 잘라내서 고개 너머 도로까지 어떻게 운반을 할 수 있었을까요.
“먼저 통나무로 ‘통발’을 짜요. 그러니까 ‘통발’은…, 통나무로 십자가 수백 개를 만들어요. 그걸 ‘X자’ 형태로 일으켜서 골짜기 아래까지 죽 이어지게 연달아 바짝 붙여서 줄줄이 세우는 거라. 그러면 가운데가 오목한 통나무 운반대가 생기게 되지. 그걸 ‘통발’이라 불렀어요. 그렇게 만든 오목한 통로 위로, 다듬은 통나무를 올려놓으면 순식간에 우당탕퉁탕 골짜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예요.”
장정들이 여기저기서 도끼로 아름드리 나무의 밑둥을 찍어서 넘어뜨리고, 누군가는 가장자리 삐죽빼죽 뻗은 가지를 쳐내고, 한쪽에서는 2인1조로 거대한 톱을 밀고 당기며 규격에 맞게 통나무 원목을 만드는 풍경이 절로 떠오릅니다. 원목을 옮기는 것은 ‘목도질’[footnote]목도질 = 목도: 두 사람 이상이 짝이 되어, 무거운 물건이나 돌덩이를 얽어맨 밧줄에 몽둥이를 꿰어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 어깨에 메는 몽둥이는 ‘목도채’라 한다.[/footnote]로 날랐습니다. 예로부터 커다란 바위나 나무를 옮길 때는 밧줄로 묶어 한쪽씩 장정들이 둘러메고 힘을 썼습니다. 넷이 붙으면 4목도, 여섯이 붙으면 6목도, 여덟이 붙으면 8목도라 하였는데, 발을 맞추어 리듬을 타며 부르는 노동요를 ‘목도소리’라 하였습니다.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하나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허여~ 허여차 허여~, 허여차 허여~
내려간다 발조심, 진 데 있어 주추움
허여차아 어여차, 허여차 허여~
놓고! 저것도 메어와야 한다
이번엔 천 근이나 되는 게 4목도가 되것다
자 한 번 해보자
어- 어으 허여~ 허여차 허여~
냇가 오면 발조심, 목도꾼들 가벼웁게
허여차아 으흐어여~, 허으여 어허차호~”
■ ‘산판의 레전드’ 제무시 트럭
목도꾼들이 통나무를 ‘통발’ 입구까지 낑낑거리며 날라옵니다. 그리고는 우당탕퉁탕,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퍼집니다. 그런데 통발이 끝난 지점에서 다시 오르막 고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르막은 순전히 목도꾼들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다시 고갯마루에서 골짜기 아래까지 두 번째 통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두세 차례 오르락내리락, 우레 같은 굉음과 함께 도로까지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쏟아져 내립니다.
다음은 산판업자들 몫입니다. 저 통나무들을 싣는 트럭은 ‘산판의 레전드’ 제무시 트럭입니다. ‘제무시’는 한국전쟁 당시 맹활약했던 군용트럭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당시 전설의 야전 트럭을 생산한 자동차 회사의 이름이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Corporation)였는데, 이니셜인 GMC를 일본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 ‘지-에무-씨’…, 그걸 매끄럽게 후려서 부른 이름이 ‘제무시’였던 거지요.
여담이지만, 이 미묘한 일본식 간소화 발음은 가끔 초미니 코미디를 낳기도 합니다. 예컨대 자동차정비소에서 쓰는 용어 가운데 ‘쇼바’라는 일본식 용어가 있는데, 유래가 조금 재미있습니다. 원래는 ‘충격흡수장치’ 정도로 번역되는 ‘쇼크 업소버(Shock Absorber)’를 가리키는데, 이걸 미국식으로 매끄럽게 발음하면 ‘쇽업소버’로 들립니다. 이게 일본인들 귀에는 ‘쇼바쇼바’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자연스럽게 ‘뭐하러 두 번씩 말하지?’라는 의문이 들었겠지요. 일본 제품의 특장 가운데 하나로 ‘경박단소(輕薄短小: 가볍게, 얇게, 짧게, 작게)’를 꼽지 않습니까. 그래서 절반을 뚝딱 잘라내 버리고나니 ‘쇼바’라는 고유명사(?)가 탄생한 것이지요.
각설하고, 초기의 산판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요. 나무를 찍어 넘기는 벌목일도, 목도소리 중간에 ‘발조심’이라는 가사가 핵심으로 박혀 있는 ‘목도질’도, 우당탕퉁탕 산신령 놀래키는 통발 작업도, 다치고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합니다. 물론 당시는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요.
게다가 저렇게 목숨을 건 산판 작업의 대가라는 것이 겨우 원조 밀가루 배급이 전부였습니다. 어차피 다들 생계 자체가 죽기살기인 시절이었고, 태기산의 산판일을 대신할 만한 다른 일거리도 드문 시대였으니, 다들 감지덕지 고맙게 여기고 일을 했다 합니다. 그래도 저들이 받은 일값과, 산판업자가 도로까지 쏟아져 내린 통나무를 제무시 트럭에 싣고 1960년대 한국전쟁 뒤의 재건 현장이 요구하는 목마른 목재 수요를 달래준 황금시장과 비교를 해보면, 아무래도 경우가 조금 심하지 않았나 싶은 ‘시대유감’을 적어봅니다. 물론 산판업자의 폭리는 그 위로 이어지는 ‘권력 갑을병’의 주머니로 자연스럽게 상납되었을 터이구요.
■ 간신히 잎담배는 구했건만, 말아 피울 신문지가 없어서
태기리 화전 마을의 산판일은 2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태기분교 다운타운가 일대까지 어지간한 나무들을 베어내고 난 뒤에 본격적인 화전 작업을 시작합니다.
와중에 소소한 에피소드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밀가루 배급이 목숨줄이던 시절, 그래도 일꾼들의 ‘죽고 못 사는’ 낙이 끽연喫煙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무렵 담배가 배급이었는지, 사고파는 상품이었는지, 정확한 증언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자료를 살펴보면 50~60년대의 대표 상품은 ‘건설’, ‘상록수’, ‘새나라’, ‘승리’, ‘신탄진’, ‘아리랑’, ‘재건’, ‘전우’, ‘청자’, ‘화랑’, ‘희망’ 등이었습니다. 필터도 개발되기 이전의 시절입니다.
그나마도 저런 인기 담배는 태기리 사람들의 몫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구하였는지, 다들 신문지에 말아 피우는 잘게 썬 잎담배들을 구해서 휴식시간마다 불을 붙이곤 했나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찌저찌 담배를 구했는데, 태기산 꼭대기에는 담배 말아 피울 신문지를 구할 길이 난망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담배는 구했는데 담배 말아줄 종이가 없어서 못 피우다니요. 마치 쌀은 얻었는데 밥솥과 밥그릇이 없어서 부득이 대통밥이 탄생했다는 『중국 거지의 문화사』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태기산 사람들은 이 곤란을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참 난감하였지요. 작가샘이라면 어쩌시겄소? 근데 궁하면 통한다고, 다 길이 있다니까. 낙엽 있지요? 좀 넓적하고 얇은 낙엽을 주워서 물에 몇 시간 담갔다가 말려요.아, 반드시 음지에서 말려야 해요. 바삭하게 말리면 안 돼. 나뭇잎이 눅눅할 때 담배를 말면 이게 아주 죽여요. 나뭇잎 향기랑 눅눅한 습기랑 담배 냄새랑 섞여서 슥 들어오는데, 이게 그냥 멜랑콜리여. 아흑.”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