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이 성격을 결정한다고 굳게 믿는 S와 모든 인간의 행동과 성격을 체질에 따라 분류하는 J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2차로 옮겨간 술집에서 두 사람은 나를 대상으로 A형이라 그런 행동을 한다는 둥, 소양인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둥 하며 자신들의 학설(?)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신빙성이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설파했다.
혈액형과 체질이라는 잣대로 이렇게 저렇게 분석당하며 나는 때로 소심한 인간이 되기도 했고, 때로 버릇없고 제멋대로인 인간이 되기도 했다. 재미있었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나를 이해하고 가깝게 느끼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지도 모르지만)이 좋았다. 그런 노력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말을 주의 깊에 들었다.
한때 각각 죽음을 시도했던 그들은 오직 혼자서 그 ‘문제적 상황’을 극복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혈액형과 체질로 티격태격하던 S와 J가 의견의 일치를 보인 지점이 있었다:
“어떤 인간이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한다면 그가 어떤 문제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야.”
어디서 많이 듣거나 읽은 내용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 했다. 그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그들을 거쳐 갔을 고통과 숙고의 시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술자리에서 어떤 이상한 짓을 해도 그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다행히 술 깨고 나서 민망하게 생각될 만한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술자리가 부담 없고 즐겁기까지 했던 것은 S와 J가 가진 넉넉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는가 싶다. 혈액형이 S에게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법이 된 것도 S가 가진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내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인간이라서 소위 정상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비난할 수가 없어.”
건축을 전공한 J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시멘트로 만든 나무 모양의 벤치였다. 그저 ‘나 시멘트다’ 하면 될 것을 굳이 왜 나무인 것처럼 꾸미느냐는 게 J의 말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인간에게도 적용됐다. 자신의 본질에 맞게, J의 용어로는 ‘체질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정직한 삶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을 나에게 맞추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그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므로. 뭐 흔하게 들어왔던 뻔한(?) 말이었지만, 그 자리, 그 분위기에서 J를 통해 듣는 말은 새로웠다.
나는 그들의 학설을 있는 그대로 신뢰했다. 그 술자리의 분위기가 그랬다. 겉도는 말들도 물론 오고갔지만, 대체로 S와 J가 풍기는 아우라는 매우 진지했고, 동시에 유쾌했으며 거짓이 없었다. 술집을 나갈 때 티격태격하던 S와 J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흰 머리 듬성듬성한 그들의 모습이 마치 소년 같았다. 좋은 기운이 그들로부터 전해져 나마저 순화되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