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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11.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12.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13.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14.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15.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16.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17.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18.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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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본향 태기산
안개의 본향 태기산

 

 

■ 궁벽(窮僻)이 선물해준 별미, 감자옹심이

좀 엉뚱하지만, 이번에는 ‘감자옹심이’ 만드는 법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봅니다. 강원도 분들은 대부분 익히 아시는 조리법이겠지만,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지요. 시나브로 감자옹심이가 전국적으로 인기 메뉴가 되어가는 추세이므로, 아기자기하고 가슴 짠한 옹심이 조리법을 추억 삼아 되짚어봅니다.

먼저 적당한 분량의 감자를 골라 껍질을 벗긴 뒤, 강판에 갈아서 으깨줍니다. 다음 으깬 감자를 면포에 붓고 꽉 짜서 감자즙을 짜냅니다. 면포 안의 감자 건더기는 모아서 그릇에 담아놓고, 짜낸 감자즙은 30분~1시간가량 놓아두었다가 앙금이 가라앉으면 즙액을 따라 버리고 앙금만 따로 모아줍니다. 여기서 사람마다 서너 가지 스타일로 조리법이 달라지게 되는데, 그것은 앙금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감자 전분의 색깔이 갈색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감자옹심이
감자옹심이

냉장고가 생활필수품이 된 현대식 조리법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감자 전분의 갈변(褐變)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하얀 옹심이 조리법을 창안합니다. 감자즙을 밀폐 용기에 넣어서 가라앉히거나, 냉장고 안에서 가라앉히면 갈변이 되지 않은 하얀 앙금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러면 하얀 감자 건더기와 하얀 앙금을 합쳐서 다시 반죽을 섞어줍니다. 그 반죽으로 새알도 만들고 수제비를 뜨기도 하지요.

그러나 냉장고 이전의 옹심이는 갈변이 필연이었지요. 그래서 갈색 감자 건더기와 갈색 앙금을 합친 반죽으로 만든 옹심이가 가장 흔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런데 미묘한 것이, 감자 건더기와 감자 앙금으로 빚은 수제비의 식감이 달랐습니다. 감자 건더기로 새알을 빚어 끓는 물에 익혀두면 색이 갈색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얀 새알과 갈색 앙금 수제비로 조리를 다채롭게 꾸미는 집도 있었고요. 여기에 얇게 썬 감자편과 호박, 버섯 등도 넣고, 밀가루 수제비와 메밀국수를 추가로 넣어서 함께 끓이기도 하였고요.

감자를 편 썰고, 갈고, 즙을 내서 다시 앙금을 얻고, 또 반죽을 하고…….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이토록 다채로운 조리법을 개발해낸 인간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애절합니다. 비탈밭을 일구고, 혹은 화전을 일으켜 생계를 도와야 했던 척박한 강원도에서 무슨 여유로 저렇게 부지런하고 아기자기한 테크닉을 개발했을까요. 그만큼 먹거리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물과 약초, 열매 등 계절에 따른 부식은 오히려 다양했을지 몰라도, 매양 끼니를 때워야 했던 주 식재료의 단조로움. 그 지겨움을 비켜보려는 안간힘의 지혜였던 거지요. 감자만 예를 들어도 이렇습니다. 구워 먹고, 삶아 먹고, 삶아 으깨서 먹고, 밥에 섞어 먹고, 국 끓여 먹고, 갈아서 지져 먹고, 채 썰어서 부쳐 먹고, 옥수수·밀가루와 버무려 먹고, 튀겨 먹고, 간장에 졸이고…….

■ 대장장이에서 ‘야매 의사’까지, 스스로 일어서는 사람들

반복되는 끼니의 지겨움은 태기리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배급 밀가루로 연명해야 했던 태기리의 처지는 훨씬 열악했습니다. 오죽하면 “나중에는 밀가루에서 비린내가 나더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지난 글에서 간단히 소개했듯, 저 궁핍 속에서도 주민들은 감자버무리와 붕시레미, 짝퉁 진간장과 도토리찐빵 등 절묘한 꼼수로 끼니의 지겨움으로부터 혀를 속이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그렇게 간절한 상황인데도, 감자옹심이는 쉽사리 욕심을 부릴 음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부모님들이 화전이며 개간에 동원되어 매일 집을 비워야 했으니, 저렇게 ‘갈고 짜내고 가라앉히며’ 조리할 여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와중에 날이 궂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간혹 몇 집이 작심을 하고 모여서 둘러앉기도 하였던 모양입니다. 모처럼 감자를 갈아서 감자즙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감자를 갈아낼 강판이 부족합니다. 그러자 즉석에서 감자 강판을 만듭니다. “워낙 물자가 귀하다 보니, 버릴 게 없어요.” 배급으로 받은 가루분유나 백도 복숭아 캔의 빈 깡통을 잘라내서 못질을 해서 구멍을 뚫고 날카로운 부분이 위로 올라오도록 나무판자에 고정시키면 순식간에 뚝딱 강판이 탄생합니다.

강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태기리 마을의 출발은 천 년 원시림과 목마른 사람들, 오직 둘뿐이었습니다. 애초에 ‘태기산 분지에 사람들을 모아서 거대한 화전민촌을 만든다’는 지침 말고는, 관공서·파출소·학교·약국·예배당 등의 생활기반은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화장실이며 구멍가게 하나 없이 졸속으로 밀어붙인 프로젝트였으니까요. 그 텅 빈 생활의 구멍을,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의 재능을 비벼가며 훌륭하게 메워갑니다.

누구는 어디서 폭탄 껍데기를 잔뜩 구해다가 대장간 노릇을 합니다. 물 긷는 함지박이며 프라이팬, 괭이며 낫이며 호미 등의 농기구까지, 꽁깡꽁깡 망치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집니다. 목수도 빠질 리 없습니다. 움막집이며 토막집을 거뜬히 올리는 대목(大木)도 있고, 장롱이며 선반, 책상과 의자 등을 뚝딱뚝딱 지어내는 소목(小木)도 있었습니다. 손맛 좋은 박 씨는 짚으로, 산죽으로 멍석이며 자리며 삼태기·조리·바구니들을 빚어냈고요. 침술 실력으로 긴급한 상황을 건져준 ‘야매 한의사’도 있었고, 송아지를 받아내고 구제역 수술도 할 줄 아는 ‘야매 수의사’도 있었습니다.

대장간의 물건들(둔내 )
대장간의 물건들(둔내 들봄 대장간)

■ ‘메이드 인 태기산’의 3대 명품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겯고 강파른 산골의 척박을 견디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서로를 보듬고 달래며 견디어가는 생활이라지만, 차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생이 있었으니 바로 해발 1200m 고산지대의 겨우살이였습니다. 산마루 고원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듭니다. 10월이면 첫눈이 내리고, 11월이면 산등성이를 휩쓰는 강풍에 눈이며 개울이 꽁꽁 얼어버리는 ‘겨울왕국’ 태기리에서는 겨우살이 준비도 다른 강원도 지역보다 한 달 이상 앞서 서둘러야 합니다.

겨우살이 준비의 핵심은 단연 김장 담그기입니다. 그런데 태기리에서의 김장은 얘기가 또 한참 다릅니다. 일단 김장 재료 준비가 여의치 않습니다. 태기리가 저 혼자 서두른다고 김장용 무·배추며 고춧가루 따위가 덩달아 시장에 빨리 나오지는 않으니까요. 물론 김장거리를 사다가 먹을 만큼 여윳돈도 애시당초 언감생심이었고요. 게다가 강원도의 상징 같은 포동포동한 ‘고랭지 배추’도 어찌된 영문인지, 태기산에서는 좀체로 속이 여물지를 않았습니다. 그나마 볕 좋은 골짜기에서 자란 속 빈 배추들이 착하게 김장 준비를 도와주었다 합니다.

대신 태기리에서는 가 잘 되었습니다. 당시 태기산이 자랑하는 3대 명품이 있었는데, 바로 ‘태기산 약초’‘태기산 무’, 그리고 ‘태기산 약초 한우’입니다. 태기산 당귀(當歸)와 천궁(川芎), 만삼(蔓蔘) 은 한약방에서도 높은 가격으로 귀족 대우를 받았다 하지요. 봄·여름·가을에 수확해서 말려둔 약초를 겨우내 다듬어서 다발로 묶어놓으면, 초봄마다 태기산 약초를 구하려는 구매상들이 줄줄이 태기리를 찾았다 합니다. ‘약초 한우’의 명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약초 한우’ 덕분에 태기산 바로 아래에서 열리는 ‘둔내 우시장’은 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지요. 어쩌면 오늘날 ‘한우축제’로 유명한 횡성 한우의 뚝심이 바로 저 시절, 태기산 약초 한우와 맥을 같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왕국 태기산
겨울왕국 태기산

태기산 무는 정말 엄청났습니다. 굵기는 건장한 여성의 다리만 한 굵기로, 길이는 대략 70~80cm, 길게는 1m 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합니다.

“보통 무를 옮기려면 자루에 무를 담아서 자루째 지게에 싣고 옮겼다고. 그런데 태기리 무는 자루가 필요 없었어. 그냥 무를 직접 지겟가지에 걸치도록 실었다니까.”

태기분교 동창들의 과거 회상에서도 무 이야기는 빠지지 않습니다. 무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간식이었지요.

“무에서 배 맛이 났다고요.”

무가 어찌나 잘 자라는지 밭이랑 위로 한 뼘쯤이나 웃자라기 십상이었는데, 아이들은 그걸 발로 차서 부러뜨려 먹었다고 합니다. 뽑기도 귀찮아서요. 어른들도 그걸 뻔히 보면서 혼내지도 않았다 하고요. 워낙 흔한 게 무라서.

■ 속 없는 배추로 담는 ‘덤벙짠지’

그러나 아무리 무가 훌륭해도 배추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오늘날처럼 고춧가루며 배·젓갈·파·마늘·생강 등 양념을 충분히 쓸 형편도 못 되었으니, 태기리의 겨울은 더욱 춥고 곤핍한 계절이었지요. 심지어 산판으로 나무를 잘라내고 골짜기에 불을 놓던 처음 몇 해는 김장은 꿈도 못 꾸고, 봄가을에 미리 뜯어둔 두릅이나 죽나무 순, 참나물·머위·곰취 따위를 염장(鹽藏)해두고 김치를 대신하였다 합니다. 하필 태기산에는 그 흔한 고사리와 칡도 나지 않았다네요.

그나마 비탈밭을 개간하면서 동치미랑 깍두기에, 못난이 배추랑 무청을 소금에 절여두었다가 꺼내서 찢어 먹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대신 구덩이를 파고 묻어두었던 무가 겨울 내내 위안이 되었다 합니다.

궁하면 통한다지요. 해가 쌓이면서 태기산에도 척박한 환경에 걸맞는 묘수가 생겨납니다. 무는 풍년이라 속 채울 무채는 무궁무진한데, 정작 배추에는 속이 없고……. 그래서 탄생한 태기리표 김장‘덤벙짠지’입니다.

절임배추
절임배추

‘덤벙짠지’도 절인 배추와 속 채울 양념을 준비하는 단계까지는 여느 김장과 흡사합니다. 다만 배추가 속이 없는 겉청뿐이라는 게 안타깝습니다만. 커다란 함지박에 무채를 듬뿍 썰어 양념에 버무리는데, 다른 점은 바닥에 찰랑찰랑할 정도로 물을 붓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양념이 밴 붉은 물에 절인 배추를 덤벙덤벙 헹궈서 둘둘 말아 ‘도라무깡(드럼통)’에 차곡차곡 쌓는 겁니다. 그리고 양념에 버무린 무채 속을 배추 사이사이에 얹어줍니다. 큼지막하게 썰어낸 무 조각들도 사이사이 꽂아주고요. 그렇게 도라무깡에 배추를 다 채우면 그 위로 남은 양념을 아낌없이 부어주는 거지요. 물론 도라무깡에는 깨끗한 비닐을 깔고요.

김칫독 구하기가 어렵다 보니, 항아리 대용 아이디어도 코끝이 시큰합니다. 워낙 살림이 변변치 못하다 보니, 방수가 필요한 대목은 대부분 비닐의 힘을 빌립니다. 김장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그나마 도라무깡조차 구하지 못하는 집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나요? 산으로 갑니다. 이 골짝 저 골짝을 한참 뒤져서 속이 썩어 비어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찾아냅니다. 그걸 잘라서 낑낑거리며 가져옵니다. 그리고 속을 다듬어서 구석에 세우고는 안쪽에 비닐을 씌워 항아리를 대신하는 거지요. 그나마 나무를 옮겨올 장정이 없는 집에서는 땅을 파고 깨끗이 씻은 비료포대를 묻어 김장을 담기도 했구요.

그렇게 한 시절 추억이 자랐고, 아이들도 무럭무럭 뼈가 굵어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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