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여러분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면 이력서를 다시 쓸 것인가, 아니면 홀로서기를 할 것인가? 물론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1순위로 이력서를 다시 써서 직장을 구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왜 그럴까? 직장 안에 있는 것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홀로서기는 너무 막막하다. 직장에 다닐 때 했던 일, 배운 능력을 기반으로 홀로서기를 했을 때 먹고 사는 데 문제없다고 느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림 그리는 남자, 정진호
‘그림 그리는 남자’로 알려진 정진호 작가(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 작가로 불리는 게 편하겠다고 답했다)를 만났을 때, 그는 인생의 기로에서 어떤 길을 갈 것인지 마지막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98년 모 그룹사 SI 업체에 입사해 개발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2013년까지 야후! 코리아, SK컴즈 등 꽤 알려진 ‘조직’에서 일했다. 지난해 말 과감하게 회사를 나왔고, 어쩌면 그때 이미 홀로서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몇 달째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고민 중’이라며 말을 꺼냈지만, 이미 답을 구했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회사를 그만두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는 질문에 이미 그의 일정은 빼곡히 차있었다.
3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강의가 있습니다. 그림 그리는 기쁨을 일반인들과 나눌 수 있는 ‘행복화실’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고요, 매월 ‘비주얼 씽킹’ 워크숍도 시작합니다.
그가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행복화실 2014’ 프로그램에는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12주의 그림여행’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림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석 달 동안 함께 그림을 그리며 그림 실력도 키우고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도록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석 달 후에는 각자의 그림 전시회로 화려하게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평일 저녁에 세 달 동안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조직에 몸담기를 이미 거부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직장인’이 아닌 ‘작가’다운 답이 돌아왔다.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 그림으로 생각을 정리하도록 돕는 것은 모두 제가 앞으로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홀로서기 대신 조직을 선택하더라도 일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죠.
일할 수 있는 조직을 찾는 것은 의미 있지만 (자신이 평생 해야 할) 일과는 상관없이 회사 다니는 것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평생 해야 하는 일을 찾다
평생 해야 하는 (하고 싶은) ‘일’을 이미 찾았다는 그가 부러웠다. 우리 대다수는 ‘일’보다는 안정적인 밥벌이가 보장되는 조직을 찾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어떻게 그 일을 찾게 된 것일까? 그 과정은 어느 날 갑자기 영감처럼 떠올랐다기보다는 오랜 세월에 거치면서 생각과 경험이 합쳐져 숙성된 것이었다.
98년부터 개발자로 일했던 그는 야후! 코리아로 자리를 옮기면서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때마침 과연 한국에서 언제까지 개발자로 일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개발 경력으로 해를 거듭하면서, 15년, 20년, 개발자로 경험이 쌓일수록 그만한 부가가치를 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사례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때 야후! 코리아에서 개발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테크니컬 에반젤리스트(Technical Evangelist; 기술 전도사)가 그가 하는 일의 정의였다. 당시 야후! 코리아는 시스템(내부 IT 인프라)이 다른 곳과 너무 달라서 야후! 코리아에 입사하면 야후! 코리아의 독자적인 기술을 배워야 일할 수 있었다. 개발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과정을 설계해야 하므로 인사교육 담당자가 하기 어려워 그가 맡게 된 것이다. 교육 과정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일이 보통의 개발자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사내 교육이다 보니 강의를 맡은 개발자들에게 강의료를 많이 줄 수가 없었어요. 1인당 2만 원 정도 돌아가는데 매력적인 금액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강사들의 만족도를 높일까 고민하다가 디자이너를 꾀서 멋진 디자인을 곁들인 후드 티를 만들었죠. 거기에 ‘Yahoo Bootcamp Trainer’라는 글자가 새겨진 한정판 후드티를 만들어 나눠 주었습니다.
한정판 후드티의 힘은 컸다. 교육에 참여한 강사들이 굉장히 좋아하며 만족도가 높아졌다. 2만 원을 ‘한정판’으로 가치 상승시킨 것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교육을 통해 가치를 나누고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할지를 고민하는 일에 본인이 꽤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이후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것들을 잘 정리해서 사람들과 나누는 일에 더욱 관심을 쏟게 됐다.
에반젤리스트 활동을 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해서 마인드 맵(mind map)이라는 프로그램을 쓰게 됐다. 정리 기능이 아주 좋아서 교육도 받아가며 열심히 마인드 맵을 활용하게 되었고, 어느 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슬라이드를 만들어 팀원들에게 강의했다. 그 후에 많은 개발자가 오히려 자신보다 더 마인드 맵을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팀원을 대상으로 한 강의는 개발자들 사이에 번져 수강생이 수십 명을 넘어서고 블로그를 통해 외부 강의도 했더니 더 많은 사람이 듣게 됐다. 이때의 경험이 계속 발전되어서 지금은 생각을 간결한 그림으로 정리하는 기술에 관한 ‘비주얼 씽킹’ 워크숍을 만들게 됐다.
이렇게 에반젤리스트로 새로운 개념을 대중들이 알기 쉬운 용어로 풀어서 해석하고, 그것을 강의를 통해 나누는 일을 하다가 결국은 ‘직업’이 바뀌었다. 2010년부터는 SK컴즈로 회사를 옮겼고 개발자가 속한 부서가 아닌 ‘기업문화팀’에서 일하게 됐던 것이다.
불혹을 넘기며 든 생각, ‘그림을 그리자!’
정진호 작가가 자신이 평생 할 일을 찾는 과정에서 또 한번 중요한 계기를 맞게 된 것은 마흔을 넘기면서다. ‘불혹’이라는 수식어가 문득 무겁게 느껴지면서 일을 하더라도 하루하루 일을 하며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계속 남아있는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그림을 그리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냥 무작정 그림을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지속해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홍대 앞을 찾았다. 막연히 ‘그림’ 하면 홍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홍대 앞에는 미술학원들이 많았는데 그의 마음을 끄는 곳은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그는 미술학원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상한 게 미술학원에서 가르치는 그림은 생활 속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소재를 선호하더라고요. 말하자면 찌그러진 캔 같은 것이었죠. 그리고 무조건 그림을 크게 그렸습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한 A4 크기로 그림을 가르치는 곳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미술학원에 학생들이 그린 그림은 너무나 똑같았습니다. 그림의 선들이 경쾌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는 홍대 앞에서 그림 배우는 것을 포기하고 교보문고로 향했다. 서점에도 그림을 담은 책은 많은데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은 별로 없었다. ‘스케치 쉽게 하기’라는 책을 겨우 구해서 2011년부터 매일 밤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펜 하나만으로, 작은 크기로 그림을 그리다가 조금씩 크기도 키우고 색도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1년 반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하루에 두 시간쯤 잡으면 1,000시간이 넘었다. 그랬더니 손목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노력과 함께 그 과정을 기록하는 것도 꾸준히 했다. 1년 반의 경험을 정리해서 [철들고 그림 그리다]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그림은 그렇게 노력해서 얻은 ‘일’이었다. ‘작가’라는 호칭을 좋아하고, 회사 다니는 안정감보다는 일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렬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그가 그리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3년째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그렸는데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 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동화책에 담긴 스토리를 그림으로 그린다든지 하는 것이죠……
그가 꾸준히 하고 있는 ‘비주얼 씽킹’도 생각을 그림으로 정리하고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이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영역에 속한다.
저는 오래도록 일하는 게 꿈입니다. 한 70까지…… 혹은 건강이 허락한다면 그 이상도……
오래도록 자신이 찾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일,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이다. 참 간소한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행복을 조용히, 꾸준히 찾고 있는 그는 이야기하는 내내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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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호 님이 그린 다양한 그림은 정진호 님의 블로그 lovesera: ART of VIRTU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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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그리다라는 다큐가 생각나네요.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