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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11.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12.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13.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14.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15.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16.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17.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18.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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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기리의 추억
태기리의 추억

 

■ 에필로그

태기리 철거 계획에 등을 떠밀려 사람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갔습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태기리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모들을 따라 하산, 타교에 편입될 경우 환경 적응이 큰 문제”라고 횡성군교육장이 안타까워하던 태기리 아이들의 미래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 태기리 아이들도 이제는 다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는 완숙의 어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 ‘분교를 거쳐간 교사들’이 기자에게 심정적으로 토로했던 “화전민 자녀의 특수한 내성적 성격 때문에 교육상 어려움이 많다”는 발언만큼은 수정되어야 할 듯합니다.

화전민 자녀들은 ‘특수한 내성적 성격’과 무관하게 모두들 멋진 어른이 되었고, 유쾌하면서 사교적인 사회인들이 되었습니다. 누구는 경찰관이, 누구는 약사가, 누구는 잠수부가 되었고, 밤무대에서 색소폰을 부는 뮤지션도 있었습니다.

건설업·꽃가게·농장·도자기 공장·레스토랑·펜션 등을 경영하는 사장님들도 많았습니다. 모두 ‘특수한 내성적 성격’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직업들입니다. 교수나 학자, 정치인이나 기업인 같은 직업군이 드문 것은, ‘화전민 자녀의 특수한 내성적 성격’ 탓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서울 중심·도시 중심·부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기울어진 운동장’ 탓인 까닭이지요.

■ 서로 끌어당기는 그리움의 본성

태기리 사람들에게 ‘태기리’는 단순한 과거의 한 토막이 아니었습니다. ‘화전민 집단농업단지’ 프로젝트를 발표한 1965년부터, 비공식적으로 태기산 원시림에 2~3년 먼저 입산한 사람들로부터 따져도 76년 태기리 철거에 이르기까지 길게는 15년, 짧게는 한두 해 정도 거쳐 간 사람들에게 ‘태기리’는 흔한 인생의 한 토막이 아니었습니다.

고춧가루도 마음껏 넣지 못하는 ‘유사 김장’인 덤벙짠지, 하도 먹어서 “밀가루에서 비린내가 나더라”는 지독한 궁벽, 이불 한 장 없이 가마니 깔고 나뭇잎을 덮고 겨울을 났다는 지지리 궁상의 시간들. 저 곤핍한 군상(群像)들이 서로 비비고 끌어안고 버티어낸 시간들이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 속에서, 가슴 속에서 솔불처럼, 숯불처럼 점점 빨갛게 피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저 태기리의 추억들은 고스란히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그리움은 서로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본성을 품고 있지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습니다. 각자 전국으로 흩어져 살면서, 자녀들 낳고 길러 독립시킬 즈음이 되어 자연스레 서로가 서로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화번호가 전화번호를 낳았고, 결혼식이며 장례식이 네트워크가 되었습니다.

태기분교 기념관 개관 기념
태기분교 기념관 개관 기념

그렇게 알음알음 끼리끼리 서로 생사를 확인하고, 만나서 회포를 푸는 작은 모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와중에 우연한 사건이 새로운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우연한 사건의 주인공은 원주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이상은 씨입니다.

“벌써 20년 전이네요. 원주 시내를 지나가다가 신호등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는데, 건너가는 노인이 아무래도 낯이 익어요. 잘 살펴보니…, 아! 옛날 선생님이신 거라. 모시고 가던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를 도로 옆으로 세운 뒤 얼른 달려가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지요.” (이상은) 

우연한 사건의 꼬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시점은 이명순 선생님 시점.

20년쯤 전에 아들 결혼식 다음날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옛날 제자들 10여 명이 집으로 우르르 찾아왔어요. 선물을 한 보따리씩 싸가지고…. 떼로 큰절을 하고…. 그때 무슨 사정이 있어서 아들 내외가 신혼여행을 며칠 미룬 참이었어. 막 시집 온 며느리가 몰려든 제자들 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사람들 돌아간 뒤에 ‘우리 어머님이 이렇게 유명한 분인 줄 몰랐어요’ 그랬다니까.” (이명순)

평창에서 피자 가게를 하는 이기운 씨의 회상도 감동입니다.

“어릴 때 유난히 몸이 작았어요. 아마 내가 태기리에서 제일 작았을 거야. 언젠가 선생님하고 애들하고 어디를 가던 길인데, 개울을 건널 때 선생님이 나를 업어서 건넨 기억이 있어요. 그날 선생님 집에 몰려간 날, 옛날 업혀서 개울 건넌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제는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그랬는데 순간 다들 울컥해서는 눈물을 훔치고….” (이기운) 

■ 태기리 동창생들의 비밀 접선책

이렇게 이빨 빠진 세월의 퍼즐이 씨줄과 날줄로 맞물리며 인연의 새로운 페이지를 만들게 됩니다. 제자들이 몰려간 날이 하필 선생님 자제분의 결혼식 다음날인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의 방문이 그로부터 얼마 전 이상은 씨와의 ‘횡단보도 조우(遭遇)’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벌써 스무 해 전의 일이었으니까요.

‘횡단보도 조우’는 이상은 씨에게 무언가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이상은 씨는 태기리 사람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합니다. 먼저 ‘연락의 달인’ 보험 영업자와 교회 선교인 동창을 물색해봅니다.

“전화번호부 만들 듯이 사람들 리스트를 적어놓고, 밑줄을 죽죽 그어가면서 찾았어요. 한 사람의 행적을 알게 되면, 그 사람 통해서 수소문을 했지요. ‘누구누구는 어디 산다더라…’하면 또 수소문을 해서 그 행적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다시 연줄을 찾아내고….” (이상은) 

‘중계소 옹심이집’[footnote]‘중계소 옹심이집’이라는 가게가 있는 것이 아니다. 태기산 정상의 간이휴게소 안쪽으로 둔덕에 한국통신 중계소가 있는데, 중계소 앞에 있는 ‘간판 없는 푸드트럭’을 ‘중계소 옹심이집’이라 지칭한 것.[/footnote]을 떠올린 것도 이상은 씨였습니다. 횡성과 평창을 가로지르는 국도의 태기산 정상에 ‘간판도 없는 간이휴게소’가 있고, 그 휴게소에서 수십 년째 ‘감자옹심이·칼국수·막걸리’ 등을 팔고 있는 ‘간판도 없는 푸드트럭’이 있습니다. 태기리 출신이 옛날 화전마을을 들러보려면 십중팔구는 저 간이휴게소를 찾기 마련이고, 그중 십중팔구는 저 후드트럭을 찾기 마련입니다.

“언젠가 태기산 마을 터에 갔다 오던 길에 ‘중계소 옹심이집’ 주인에게 ‘태기산 사람들 다녀간 적 있나…, 누군가 다녀간다면 연락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날 이후로 옹심이집 사장님이 우리 동창들 비밀 접선책이 되었죠.” (이상은) 

태기리 동창 모임의 숨은 접선책 '중계소 옹심이집'
태기리 동창 모임의 숨은 접선책 ‘중계소 옹심이집’

비슷한 무렵에 ‘아이러브스쿨’이나 인터넷 카페와 밴드 등이 유행하면서 태기분교 동창 네트워크는 더욱 활성화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등장한 ‘카카오톡’의 단톡방[footnote]‘여러 명이 참여한 채팅방’을 뜻하는 ‘단체 카카오톡 방’을 줄인 말.[/footnote] 프로그램 등은 동창회 모임에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지요.

■ 세월은 가고 추억은 남아

이상은 씨가 태기리 동창 모임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 전에도, 여러 사람이 ‘추억 찾기’ 노력을 산발적으로 벌이고 있었습니다. 갑장(甲長)[footnote]‘육십갑자(六十甲子)’가 같다(동갑同甲)는 뜻으로, 같은 나이를 이르는 말. 또는 나이가 같은 사람.[/footnote]들끼리 각자 또래 동창회로 모임을 시작했는데, 묘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처음 모일 때, 오랜만에 태기산 가서 옛날처럼 함께 어울려 나물이나 좀 뜯어보자고…. 먼 데서 오는 사람도 있으니 하루 전날 태기산 근처 산장에 모여 저녁 먹으며 회포를 풀기로 하면서 모임이 시작되었어요.”(함재문)

대체로 각각의 또래 모임들이 비슷한 시기에 ‘1박2일 나물 뜯기’라는 비슷한 모양새로 모임을 시작합니다. ‘겨울왕국’ 태기산의 봄날은 짧기도 하련만은, 저 산발적인 또래 동창회의 ‘나물 뜯기’ 행사가 우연히도 같은 날 겹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입니다.

이렇게 각개전투로 진행되던 동창회가 이명순 선생님을 계기로 통합 총동창회로 발전합니다. 또래 동창회는 각자 알아서들 하시되, 매년 11월 어느 날은 선생님을 모시고 연합 모임을 갖기로 한 것입니다. 총동창회가 처음 열린 것은 2014년, 55년생들의 환갑을 기념하여 잔치를 해주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후부터 매년 11월은 총동창회 환갑 잔칫날이 되는 것이지요. 동창회 모임은 훈훈하였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연락을 해오며 태기리의 추억은 멋진 공동체로 쑥쑥 자라납니다.

동창회의 한 순간
동창회의 한 순간

그러던 차에 2017년 9월 횡성군청에서 이명순 선생님을 초청하면서 태기리 모임은 다시 한 번 활기를 띠게 됩니다. 횡성군청에서 옛날 태기리 마을과 계단밭 자리에 ‘국가생태탐방로 조성사업’을 벌여 준공식에 선생님과 제자들을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2017년 9월 28일자 ‘강원일보’에는 ‘화전민 아이 가르치던 20대 여교사, 50년 만에 제자들과 감격의 상봉’이란 제목 아래 오랜만에 이명순 선생님을 매스컴에 다시 띄워주었습니다.

제자들 감사패
제자들 감사패
횡성군청 감사패
횡성군청 감사패

함께 초대를 받은 선생님과 여러 제자들은 오랜만에 학교 터를 찾아가 감회를 나누었습니다. ‘하늘 아래 첫 학교’는 폐교된 뒤 철거되었고, 100평짜리 직사각형 교사(校舍)가 헐린 자리에는 건물의 기초를 보여주는 콘크리트 잔해와 우물터가 함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옛 학교 터를 찾은 졸업생들
옛 학교 터를 찾은 졸업생들

학교는 가고, 사람은 남았습니다. 세월은 가고, 추억은 남았습니다. 학교가 세워졌다가 떠난 자리,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그리움을 키워낸 자리, 그 넓고 따뜻한 자리에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의 시 한 편을 바치며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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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의 빛[footnote]원제는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 제목과 본문에 각각 한 번씩 ‘초원’을 ‘산골’로 패러디하였다.[/footnote]

-윌리엄 워즈워스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산골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
죽음마저 꿰뚫는
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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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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