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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 ‘잇몸’으로도 견딜 수 없는 태기리의 절대 결핍

지난 글까지 궁핍한 ‘겨울나라’ 태기리 화전마을의 지지리 궁상과, 그 궁상 속에 꽃핀 온정과 지혜, 그리고 희망과 성공의 미담을 미주알고주알 전해드렸습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견디는 저 눈물겨운 ‘겨울나라’에, 그러나 잇몸으로도 견딜 수 없는 절대 결핍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학교였습니다.

썩 적절한 사례는 못 되지만, 병원이나 약국과 비교하면 학교의 특성이 분명해집니다. 병원·약국이 없어도 요행히 자연 치료·회복되는 경우가 있지만, 교육에는 그런 요행이 없으니까요(학교가 병원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고요). 물론 학교 밖에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교육과 지식이 창출하는 ‘미래’라는 차원에서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더욱이 어린아이들의 학습 바탕을 다져주는 초등교육의 경우는 더 강조할 것도 없겠지요. ‘교육의 부재’는 십중팔구 ‘미래의 결핍’ 혹은 ‘결핍의 미래’로 이어집니다. 특히 요즘 시쳇말로 ‘스펙이 갑질’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성을 누가 모르나요. 태기리 주민들 거개가 옴짝달싹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절대 결핍’이었던 거지요. 조금만 여유와 바탕이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주민들끼리 돌아가며 스스로 한 과목씩 선생님이 되어 ‘홈스쿨링’이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이 대신 잇몸’ 노릇이 훌륭하였을 터인데요.

태기분교와 계단식 밭

태기분교와 계단식 밭

그러나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겨우 10여 년이 흐른 절대 빈곤의 시절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기아와 빈곤에서 ‘살아남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홈스쿨링’은 꿈도 못 꿀 일이었고, 산꼭대기 학교도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심지어 태기리로 모여들기 전까지는 각자 살던 지역에서 여느 가정의 아이들처럼 무난히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태반이었습니다.

태기리 정착 초기에는 그래도 아이들 학교를 옮겨 등하교를 시켰더랬습니다. 그러나 태기리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는 산 아래 80리 밖에 있는 봉덕국민학교1였습니다. 대략 서너 시간, 왕복 예닐곱 시간을 걸어야 하는 32km 험한 산길이 멀기도 했을 뿐더러, 오며가며 지친 아이들은 등교 중간에 골짜기로 내빼어 머루·다래와 ‘결석’을 맞바꾸기 십상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태기산은 호랑이와 멧돼지가 출몰하는 위험지역이었습니다. 주민들은 맹수와 맞닥뜨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는 없었으므로, 속수무책으로 아이들을 마을 인근 골짜기나 화전 계단밭 근처에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태기리에서는 갓난아이부터 열대여섯 살 청소년까지 학교는 구경도 못하고, 집안 형편에 따라 어른과 같이 막일을 나가거나 소몰이와 개구쟁이 놀음으로 방치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일찍 자원하는 경향도 이같은 여건과 무관하지 않았고요.

■ 잔 다르크처럼 등장한 스물네 살 ‘처녀 선생님’

태기산은 아이들에게 천혜의 놀이터였습니다. 봄이면 나물 캐기가 공공연한 경제활동이 되었고, 여름에는 각종 약초 채집으로 하루해가 저물었습니다. 가을에는 으름과 머루·다래 등 각종 열매들이 아이들을 불렀고, 겨울에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태기산표 스키’ 놀이로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소몰이 목동은 소 등에 올라타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세월을 흘려보냈지요. 아직 ‘미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태기리의 유년은 ‘천국보다 즐거운’ 유토피아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스물네 살 꽃 같은 처자가 ‘잔 다르크’처럼, 정말 난데없이 불쑥 아무 연고도 없는 태기리 화전마을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며 찾아온 것입니다. 세상에나 겁도 없이, 호랑이·멧돼지 출몰하는 산골짜기를 지나, 우락부락 남정네들이 화전 일구는 황량한 산등성이 마을로, 화사한 처녀가 혼자 걸어서 상황 조사를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열혈 전도’라도 하듯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진득하게 설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수업을 해야 한다고,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그뿐만 아닙니다. 저 산꼭대기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얼토당토않은 희망사항이 거짓말처럼, 동화처럼 술술 진행됩니다. 주민들 입장에서야 ‘잇몸’조차 없어 교육을 포기한 상황이었으니, 엉뚱한 저 처녀 ‘잔 다르크’가 흡사 옥황상제가 보낸 선녀처럼 여겨졌겠지요. 그런데 어디 세상 일이 절실하다고 다 이루어지는가요. 학교 교사(校舍)도 없고, 교실도 없고, 칠판이며 교재며 학용품·문방구도 거의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영문 모르는 아이들과 열정 만발한 꽃처녀뿐. 그런데 도대체 옥황상제께서 무슨 조화를 부리신 걸까요. 저 산골짜기 맨땅에 터무니없는 ‘학교 만들기’ 기적이 일사천리로 펼쳐집니다.

“아이고, 저 천둥벌거숭이들……. 아이들을 처음 본 날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아침에 몇 시간을 걸어서 올라온 길을 저녁에 갔다가 다음날 다시 올 생각을 하니 그만 맥이 풀리데요. 그래서 주민대표님께 하루 묵을 방을 부탁했더니, 고개 넘어 사는 유용진씨 댁을 소개해줬어요. 그 집에 유영순·유계순, 계집애 둘과 젖먹이 머스마가 하나, 그랬어요. 태기산의 첫 밤을 그 집에서 묵는데, 서로가 하도 먹먹해서 애들 부모랑 밤새껏 이야기를 나눴어요.”

운명이 시작된 65년 9월 어느 날, 가슴 저릿한 저 밤을 이명순(李明順 )선생님(79)은 평생 잊지 못합니다.

이명순 선생님 수업 모습

이명순 선생님 수업 모습

■ 얼떨결의 유명세 ‘태기분교 탁구부’

이튿날 미처 살피지 못한 나머지 집들을 마저 다 돌아보고 아이들 현황을 파악한 끝에, 주민대표와 협의를 거쳐 동네 초입의 마을회관에 공간을 마련하는 대로 바로 수업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1965년 10월 1일, 드디어 태기리 화전마을에 학교가 생겼습니다. 첫 수업의 학생은 모두 8명이었습니다. 10월 5일에는 강원도 교육청으로부터 ‘횡성군 봉덕국민학교 태기분실2이라고 정식 인가증도 나왔습니다. 이날부터 뒤늦게 학교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이들이 몰려들어 학생 수가 24명으로 늘어납니다.

아침 조회

아침 조회

교재며 학용품들은 일단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쓰던 것들을 다시 쓰기로 합니다. 마을 목수님이 책상도 여러 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일인용 책상이 아니라, 공회당이나 교회 같은 곳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길쭉한 책상의 ‘앉은뱅이 형태’입니다. 칠판도 생겼습니다. 교육청에서 직접 마련해 보내준 ‘족보’ 있는 칠판입니다.

그런데 ‘잇몸’도 없어서 포기했던 학교를, 왜 갑자기 책걸상도 없이 문을 열 정도로 저렇게 서둘러 개교를 하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태기리가 여느 지역보다 달포나 일찍 눈이 내리는 ‘겨울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칼바람이 한두 달은 빨리 찾아오는 태기산의 매운 동장군, 그래서 11월이면 태기리는 벌써 겨울입니다. ‘태기분실’도 일찍 겨울방학을 합니다. 겨울이 길 듯, 겨울방학(11월 중하순부터 2월 말)도 깁니다.

겨울방학 중에 원주 KBS 방송국이 ‘태기리 화전마을 산골학교’ 이야기를 방송하였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전국에서 보내온 성금이며 온갖 학용품·문방구들이 산골짜기 학교로 줄줄이 밀려듭니다. 교과서·공책·연필·책받침·지우개·칼·가위·크레용·도화지 따위가 천막 창고에 가득 쌓였고, 옷가지며 신발·모자·장갑·양말 같은 의류와 각종 의약품들도 커다란 무더기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와중에 예기치 않은 재미난 해프닝도 생겼습니다. 여러 구호단체와 체육회 등에서 각종 운동기구와 함께 축구공·농구공·배구공·네트 등을 보내주었는데, 한 번은 생각지도 못한 탁구공과 라켓 등이 무더기로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탁구는 대도시 아이들도 탁구장에 가서 유료로 잠깐 놀아보는 정도의 게임이었습니다. 그런데 태기산 아이들은, 공부하라 보채는 어른들의 지청구도 아랑곳없이 무제한 탁구 삼매경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훗날 ‘태기분교’는 탁구부가 있는, 횡성에서 몇 안 되는 국민학교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지요. 물론 훌륭한 감독·코치 없이 자기들끼리 막무가내로 익힌 실력이어서 무슨 대회까지 출전하지는 못하였구요.

태기분교 탁구부

태기분교 탁구부

■ 마침내 번듯한 학교 건물을 세우다

1966년 3월 15일에는 처음으로 정식 입학식을 열었습니다. ‘본가’에 해당하는 봉덕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이 장중하게 축하의 말씀을 해주시었고, 군수님과 경찰서장, 도 교육청 관계자 등도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입학식에 참석한 태기분교 학생 수는 75명이었고, 4월 1일에는 다시 84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입학식에 참여한 경찰서장님이 마을회관 구석에 딸린 교실을 보시고는, 마침 경찰서에 여분의 천막이 있다면서, 마을회관 앞마당 구석의 맞춤한 평지 30평쯤 되는 ‘천막교실’을 지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와랑와랑 시끌벅적 이사를 합니다. 태기리 마을학교의 첫 번째 이사입니다. 이사래야 칠판 옮기고, 책상 옮기고, 잡동사니 짐 꾸러미 조금 옮기면 끝입니다.

아이들은 아주 살판이 났습니다. 어른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놀고, 노래하고, 소리치며 까불 수 있는 해방구가 생긴 것입니다. 그 대신 티격태격 개구쟁이 사내아이들의 안전사고가 늘어 엉뚱하게 선생님이 분주해진 것이 ‘의문의 함정’이었지만 말입니다.

이러구러 태기리 학교도 자리를 잡고, 아이들도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명순 선생님은 ‘천막교실’이 마뜩지 않아 못내 마음이 불편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벽돌로 번듯하게 지은 정식 학교 건물에서 수업을 해줄 수는 없을까. 교육청이며 강원도청과 횡성군청 등을 방문하여 제대로 된 학교를 지어달라고 수도 없이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도 이루어집니다. 당시 도지사와 면담 중에 서울 이태원에 있는 ‘케어CARE’3라는 국제구호단체를 찾아가서 부탁해보라는 제안을 듣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훌쩍 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이명순 선생님.

케어 단장으로부터 학교 설립 승낙을 받아오자 강원도에서 예산을 보탭니다. 1967년 봄에 착공하여 두 달쯤 되는 5월 16일 건평 100평, 교실 4개짜리 아담한 직사각형 학교를 완공하여 새 교실로 입주를 합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도지사와 케어 단장님이 오셔서 축하를 해주시고, 멋진 문방구 패키지 120박스(한 박스에 노트 19권, 연필 6자루, 색연필 1세트, 공작가위 4개, 고무·자·칼 각 하나씩)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태기분교와 학생들

태기분교와 학생들

이듬해인 1968년 6월 10일 강원도 교육청으로부터 ‘봉덕초등학교 태기분교’ 인가를 받아 정식으로 개교식4도 개최합니다. ‘봉덕국민학교 태기분실’에서 ‘태기분교’로 승격한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알았는지 언론에서도 벌떼처럼 몰려와 대서특필로 난리를 피웁니다. ‘하늘 아래 첫 학교’라는 멋진 제목 아래, 태기분교와 처녀 선생님 이야기가 전국으로 퍼져갑니다.

 

(계속) 


  1. 초등학교의 당시 명칭은 의무교육을 강조한 ‘국민학교’

  2. 태기리 학교의 초기 인가는 ‘분교(分校)’ 개념이 아니라 ‘딸린 교실’ 개념의 ‘분실(分室)’ 차원이었다.

  3. 세계빈곤퇴치 국제원조구호기구 CARE: Cooperative for Assistance and Relief Everywhere.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교전국의 국민을 구제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 민간구호단체. 뉴욕에 본부가 있다.

  4. 지금 ‘옛 태기분교 터’ 자리에 서 있는 기념관에는 1968년 6월 10일 ‘태기분교’ 개교기념일을 ‘하늘 아래 첫 학교’ 설립일로 밝히고 있다. 엄밀하게는 8명 학생으로 학교 문을 연 1965년 10월 1일(횡성 교육청으로부터 전화로 학교 인가 확정 통보)이나, ‘봉덕국민학교 태기분실’ 인가를 받은 1965년 10월 5일(정식 인가 증서 수여)을 학교 설립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학교 건물을 완공한 날을 기준으로 한다면, 1967년 5월 16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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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송준
초대필자. 작가. 건축 칼럼니스트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글쓰기를 시작해 어언 30년째 글밥을 먹고 있다. 1995년 무렵부터 건축 분야를 맡게 되면서 늦깎이로 독학의 계단을 올랐다. 『공간Space』, 『건축인Poar』, 『플러스Plus』 같은 건축 전문지에 인터뷰 원고와 리뷰·건축 칼럼을 썼고, 집도 직접 두어 채 지어보았다. 2010년에는 서울시가 주최한 [서울건축문화제Seoul Architecture Festival]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저서로 영국 건축문화기행 『건축의 표정』(글항아리, 2017)과 예술인 에세이 『바람의 노래』(동녘, 2010), 영화 이야기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심산, 20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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