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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11.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12.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13.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14.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15.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16.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17.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18.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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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니 깔고, 억새로 묶은 이불 덮고”

우당탕퉁탕!

굉음을 울리며 ‘통발 운반대’ 위로 쏟아져내린 통나무들이 차곡차곡 제무시 트럭에 실려 한국전쟁으로 박살난 폐허의 재건 목재로 팔려나가는 동안, 태기산 산마루는 수통메기로부터 태기분교 터 자리를 향해 시나브로 널찍널찍한 공터로 변하여 갔습니다. 매끈한 통나무를 만들고 남은 가지며 껍질 따위 지저깨비들은 초기 주민들의 아궁이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아름드리 나무의 아랫도리께를 번잡하게 비비적거리던 키 작은 나무와 덩굴들도 깨끗하게 아궁이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산판(山板) 작업으로 통나무들을 찍어낸 뒤에 산에 불을 놓아 화전을 만들기 시작하기까지는 2년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저 시절 초기의 에피소드 가운데 재미있는 것 하나가 주택 양식의 변화입니다. 산판 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태기산 골짜기가 ‘아름드리 나무와 수십m 허공을 치렁치렁 뒤덮은 덩굴들로 헤쳐 지나가기도 어려운 정글 같았다’고 앞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저런 첩첩산중에 집을 지으려니 나무를 제대로 치목(治木: 재목을 다듬고 손질함)하기조차 어려웠지요. 그래서 맨 처음 밀림으로 들어온 1세대들의 주택 양식‘움막집’이었습니다.

태기산 움막집
태기산 움막집

움막집은 완만한 경사지 위에 짓습니다. 물론 하늘을 가리는 수십m 나무와 덩굴들이 덜한 터를 골라야지요. 근처에 개울도 있어야 하고요. 예컨대 글로 ‘움막집’ 한 채를 지어보겠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터는 남향이지요. 그러면 남쪽이 낮고 북쪽이 살짝 높은 터가 제격입니다. 먼저 집이 들어설 부지에 표시용 말뚝을 박고 새끼줄이나 칡덩굴로 직사각형 형태의 윤곽을 잡습니다. 그리고는 직사각형 부지의 흙을 1m 이상의 깊이로 파냅니다. 그러면 남쪽의 낮은 경계는 한 팔 정도의 깊이가 되고, 북쪽의 높은 경계는 깊이가 2m쯤 되는 평평한 직사각형 구덩이가 생겨나지요.

다음에는 어른 종아리 굵기만 한(혹은 그 이상) 나무를 3m 남짓한 길이로 다듬어 네 모퉁이에 기둥을 세웁니다. 직사각형 긴 변의 중간쯤에 하나씩 사이기둥을 세워도 좋습니다. 부지 바닥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습기 처리용 홈을 길게 파놓습니다. 기둥이 들어설 부분의 홈 자리에 밑돌을 괴고, 그 위로 흙벽에 기대어 기둥을 세웁니다. 한두 사람이 직접 집을 지을 때 가장 고생하는 단계가 바로 기둥 세울 때입니다. 거기 비하면 움막집 기둥은 흙벽에 기대서 세우니 거의 거저먹기입니다.

다음은 부지 길이에 맞게, 역시 어른 종아리 굵기만 한 나무를 다듬어서 기둥 위에 가로·세로로 걸쳐 들보를 얹습니다. 들보 사이사이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팔뚝 굵기만 한 나무를 다듬어 서까래를 얹어줍니다. 서까래 위에 읍내에서 사온 비닐을 얹고, 다시 그 위에 나뭇가지와 시누대 등으로 겹겹이 지붕을 덮어서 햇빛과 빗물을 가려줍니다. 흙벽과 지붕 사이로는 가늘고 단단한 나무가 서로 교차하도록 얽어서 가벽을 세웁니다. 벽 중간에 임시 창을 내기도 하고요. 나머지 부분에 다시 나뭇가지와 시누대 등으로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덧대주면, 그럭저럭 살 만한 집이 탄생합니다.

북쪽 벽 가까운 곳에 바닥을 둥글게 파내고 만만한 돌을 둥글게 둘러주면 실내난방용 화톳불 자리가 됩니다. 자리 위 지붕에는 밖으로 굴뚝을 만듭니다. 어차피 흙벽이 높은 자리여서 화재 위험도 별로 없습니다. 나름 지혜로운 배치입니다. 필요에 따라 같은 방식으로 옆방이나 부엌을 덧대어 짓습니다. 바닥에는 대개 짚으로 만든 가마니나 멍석을 깔고 살았다고 합니다. 문짝을 만들 만한 기술 좋은 목수도 따로 없어서, 입구 위에 가마니를 걸어 밀고 드나들며 문 대용으로 사용했습니다.

“윗목에 화톳불 지펴놓고, 가마니 깔고 억새로 묶은 이불 덮고 잤지요. 그래도 추우면 나뭇잎 주워다 이불 위로 수북하게 덮고….”

‘움막집’은 아무래도 임시주택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던 듯싶습니다.

■ 통나무로 뚝딱뚝딱, 태기산표 ‘토막집’

그렇게 1년여의 세월이 흐르자, 제법 널찍한 공터가 여기저기 생겨나면서 태기리 일대 부지를 정리할 필요가 제기됩니다. 주민들도 급격히 늘어납니다. 첫해 전위대로 투입되어 첫겨울을 보낸 사람들이 10여 가구 정도였는데, 이들이 죽지 않고 살았다는 소문이 돌자 이듬해 봄에만 30여 가구가 태기리를 찾았고, 두 번째 겨울을 넘긴 봄에는 다시 두 배의 주민들이 몰려듭니다. 때맞춰 불도저 한 대가 투입됩니다. 제일 먼저 길을 닦습니다. 도로에서 태기리 마을까지 제무시 트럭이 오갈 수 있는 1차선 임도(林道)입니다.

그리고 마을이 들어설 만한 규모의 골짜기를 만져서 부지를 정리합니다. 그렇다고 오늘날처럼 엄청난 규모의 평지는 아니었습니다. 태기산 정상부는 크게 싸잡아보면 널따란 분지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석구석이 요철로 들쭉날쭉한 지형입니다. 마침 태기리 일대에는 산판 작업으로 베어낸 통나무 가운데 너무 굵어서 버려진 밑둥과 그루터기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나무토막들과 바위들로 오목한 지형을 메우고 흙으로 덮어서 평지를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태기산 태기리
태기산 태기리

널널한 공간이 생기자 새로운 주택 양식이 탄생합니다. 집 지을 부지 옆에 목재를 치목(治木)할 공간이 가능해진 덕분입니다. 태기리의 새로운 주택 양식은 ‘토막집’이라 불렸습니다. 오늘날의 ‘통나무집’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렇다고 통나무와 통나무가 맞닿는 부분을 기계를 이용해 반원형으로 딱 맞물리게 깎아내 조립하는 북유럽식의 세련된 통나무집으로 오해는 자제해주시구요.

태기리의 ‘토막집’은 그냥 단순하게 통나무를 거칠게 쌓아올려 지은, 이를테면 성냥개비를 겹겹이 쌓아올려 만든 미니어처의 실제 규모 스타일이라 보시면 적당합니다. 그런데 ‘토막집’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창문이며, 쪽문이며, 옆방이며, 부엌이며, 공간을 덧대는 데 필요한 연결부위의 치목(治木) 기술이 너무 미흡하여 그냥 단순하게 한 칸짜리 사각형 집을 만들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옆방이랑 부엌이 추가로 필요해지면, 연결 쪽문도 없이 그냥 옆에 새로 한 채를 지어야 했으니까요.

강원도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의 토막집 전경 
강원도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의 토막집 전경

■ 전후 복구의 수훈갑 ‘미류(美柳)나무’의 진실

아무리 산판 작업 중에 통나무 구하기가 쉬웠다 하여도, 저렇게 ‘무식하게’ 통나무가 많이 소비되는 주택 양식은 부담스러웠겠지요? 무거운 자재로 집을 짓는 수고에 비해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너무 비효율적이었고요. 그래서 2~3년 뒤부터 다시 새로운 주택 양식이 선을 보입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각목이며 널판 따위를 이용한 판잣집입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전후 복구사업이 진척된 결과입니다. 특히 서울과 인천, 부산, 대구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초고속으로 유행한 달동네 판잣집들이 전후 한국의 주택문제를 미봉(彌封)하는 데 눈부신 역할을 맡았지요.

태기산에서 베어간 통나무들도 한몫을 했겠지만, 한국전쟁 전후 재건에 쓰인 목재들은 대부분 미국 군함에 실려온 ‘미루나무’들입니다. 지금은 국어연구원이 ‘미루나무’를 표준어로 규정하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미류(美柳)나무’입니다. 직역하면 ‘아름다운 버드나무’가 되는데, 사실은 ‘미국(美國) 군함에 실려온 버드나무’ 종류의 통칭이었습니다.

저 ‘미류나무’들은 포플러, 백양, 사시나무, 자작나무 등 종류도 무척 다양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수종이 버드나무(=포플러; Poppler)여서 ‘미국 버드나무’라는 의미로 ‘미류(美柳)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옛날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던 “미류나무 꼭대기에 조각 구름 걸려 있네”로 시작하는 노래 속의 미루나무는 ‘양버들’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수직으로 키만 껑충하게 뻗는 롬바디포플러(Lombady Poppler) 품종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이탈리아 포플러’, ‘캐나다 포플러’, ‘오스트레일리아 포플러’, ‘유럽 포플러’ 등 다양한 목재들이 유입되었습니다.

양버들-룸바디포퓰러 나무
양버들-룸바디포플러

미루나무의 특징은 목재가 연하고 가공이 쉽다는 것입니다. 대신 자질이 약하고 오래가지 못하여, 예로부터 집 짓는 목수들이 그다지 좋아하던 자재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전후 복구사업처럼 얼른 만들어서 우선 급하게 미봉해야 하는 사업과 찰떡궁합이었던 게지요. 저 초속성 목재들이 마침내 태기리 마을 주택사업에까지 배급되게 된 것이었습니다.

■ ‘눈 목(目) 자’로 길쭉한 ‘판자삼간(板子三間)’ 기와집

‘태기산 화전 프로젝트’가 신문에 대서특필되며 정식으로 발족한 1965년 9월 이후의 주택은 대부분 저 판잣집 양식입니다. 앞에서 밝힌 대로, 가로 10m, 세로 3m, 10평 남짓한 직사각형 한일자 집으로, 평면을 부엌과 안방과 쪽방 순으로 삼등분삼간(三間) 판잣집. 부엌에 하나, 안방에 하나, 바깥쪽으로 문이 나 있고, 툇마루도 없어서 안방 문을 열면 밖에서 집안 살림살이가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60년대 대중가요 가사의 ‘초가삼간(草家三間)’ 표현을 빌리면 고스란히 ‘판자삼간(板子三間)’ 집이 되는 것이지요.

주민들은 이 주택들을 이구동성으로 ‘기와집’이라 불렀습니다. 비록 ‘눈 목(目) 자’ 형태의 획일적인 삼간(三間) 판잣집이지만, 그래도 위에는 반듯하게 기와를 올린 지붕이 주민들에게 엄청난 긍지였던 것입니다. 물론 판잣집 기와는 암키와 수키와로 궁합을 맞추는 전통 기와가 아니라, 암수 기와의 기능을 한 몸으로 합친 일본식 기와를 모방하여 만든 이른바 ‘새마을운동형 기와’였습니다.

태기리 기왓집 짓는 모습 
태기리 기왓집 짓는 모습

그런데 트럭들이 저 기와를 마을까지 실어다주면 좋았을 것을, 아쉽게도 수통메기 골짜기의 저 아래쪽 신작로 위에 쌓아놓고 말았습니다. 당시 어른들은 나무 베어내랴, 계단밭 만들랴, 기왓장 나를 여유가 없었지요. 그래서 기왓장을 마을까지 나르는 것은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고학년 남자 아이는 3~4장, 어린 아이와 여자애는 2~3장씩, 기와를 칡덩굴이나 지푸라기로 꼬아 만든 새끼줄로 묶어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 합니다. 결국 아이가 너무 어리거나, 이미 장성하여 마을을 떠난 가정에서는 지붕에 기와를 올리지 못하고 시누대와 조릿대들을 첩첩으로 쌓아서 엉성하게 지붕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합니다.

몇 해 뒤에는 태기리 마을에 목재소가 들어서서, 직접 만든 판재들로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목재소가 자리 잡은 위치입니다. 다운타운 학교 근처도 아니고, 좀 떨어진 마을의 주변도 아니고, 북쪽으로 고개를 몇 개 넘은 곳의 ‘늦은목’에 자리를 잡았으니까요. ‘늦은목’은 사람들이 한 번 갔다가 돌아오려면 저녁 늦게야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 합니다. 목재소가 왜 그렇게 멀리 자리를 잡았을까요? 거기에 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을부터 늦은목 사이에는 화전으로 산을 모두 태워버려서 아예 나무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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