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여성주의 웹진 [언니네]가 2014년 11월 30일부로 문을 닫는다는 소식(“언니네를 닫으며”)을 접했다. [언니네] 사이트가 사라진다는 얘기를 들으니 처음 언니네 얘길 들었던 때가 생각난다. 어떤 일에 관해 감상적으로 소비하는 걸 경계하는 편이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이 그런 감상적인 글이라고 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뭔가 좀 적어 두고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본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마음이다. 일단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필자) [/box]
99년 여름에 처음 [언니네]에 관해 들었다.
그해, 1999년 여름
그때 나는 전역한 후에 휴학하고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서동진의 [문화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던 ‘조졔’에게 학교 친구들(주로 연세대 여성자치언론 [두 입술] 멤버)과 ‘언니네’라는 걸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졔’는 후에 언니네 대표/편집장으로 활동했다.)
94학번인 나는 대학 1학년 때 여성학 수업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들었지만, 보통 남자애들과 거의 다르지 않은 생각과 태도를 갖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은근히 ‘여성주의, 내가 좀 알지…’란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그런 게 있나 보다 싶었다. ‘여성주의가 유행인가?’ 따위 생각도 했다. 마침 99년 8월에 [weiv]가 오픈한 직후여서 ‘웹진’이라는 게 참 많이 생기는구나, 정도로 생각하기도 했다.
‘언니네’창간 그리고 총여학생회 유일한 남자
그러고 몇 개월 뒤인 2000년 봄, 아마도 신촌(아트레온?)에서 조졔와 [매그놀리아]를 보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조졔는 사이트를 열었으니 한 번 들러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문화 글쓰기] 수업은 그때 내게 상당히 중요했는데 (서동진이란 인물 덕분이었겠지만,) 전반적으로 그때는 여성주의와 퀴어에 대한 친밀한 태도나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한 학기를 보내면서 나는 정말로 ‘말하기’라든가 ‘글쓰기’라든가 ‘정체성’에 대해 좀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복학하면서 어쩐 일인지 ‘총여학생회’에 유일한 남자 멤버(사무국장)로 합류했는데, 이건 더 복잡한 고민을 던져줬다. 요컨대 나는 거기서 ‘남자’이면서 ‘학생회 선배’이고 동시에 ‘복학생’이자 ‘기획자’이자 ‘학생처와 직접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밖에서는 ‘남자가 왜 총여에?’라는 질문을 받았고, 안에서는 ‘오빠, 이건 어떻게 써야해?’란 얘기를 들었다. 고민은 있지만, 뭘 어떻게 실천하고 바꿔야할 지 모르던 때였다. 그때 [언니네]가 문을 열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오빠네 세탁소’에서 만난 친구들
조졔는 “너랑 비슷한 남자들을 위한 ‘오빠네 세탁소’라는 코너도 있으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얘기를 했다. 궁금했다. 그래서 ‘오빠네 세탁소’에 올라온 글들, [언니네]의 특집들을 전부 읽고 게시판에 글도 쓰면서 다른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나눴다. [언니네]에 실린 기사를 통해 총여학생회 친구들과 토론도 하고 스터디도 하고 그랬다. 그러다 자연스레 ‘오빠네 세탁소’ 게시판 죽돌이들의 오프 모임이 제안됐고, 아현동 육교 옆에 있던 [언니네] 사무실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만난 게 ‘변’(지금은 공정여행사 [맵] 대표), ‘마비’(나와 마찬가지로 ‘총여학생회에 있는 남자’였는데, 알기에는 여성학으로 석사 학위를 딴 ‘유일한’ 남학생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동물 복지’로 박사학위 받았다. 고학력 잉여… 흑- 사랑한다… ㅠㅠ),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연락이 끊긴 ‘콰이’, 지금도 종종 연락하는 ‘우당탕’ 등이었다. 그 외에 다른 친구들도 많았는데 일일이 다 기억나지 않아서 미안하다.
언니네 멤버들 중에선 ‘피소’, ‘이다’, ‘호빵’과 종종 연락하는 편이었다. 서울대 여성주의 자치언론 [주이상쓰] 멤버들 몇 명도 [언니네]에서 알았다. 나는 ‘바깥’에 있던 입장에서 ‘메이저 여성주의’를 동경하거나 질투하는 복잡한 감정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고민이 결과적으로 내 글쓰기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나는 안산 한양대를 다녔다. 이걸 밝히는 건 ‘학벌’ 문제를 감추는 것보다 드러내는 것이 정체성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를 고민한 남자들
아무튼 이때에는 뭐 이런저런 과정이 있는데, ‘오빠네 세탁소’에서 만난 친구들끼리 ‘여성주의를 고민하는 남자들의 모임’ 같은 걸 만들기도 했다. (두둥?) 그때는 이걸 ‘친(親) 여성주의자’ 모임으로 할 거냐, ‘남성 페미니스트’ 모임으로 할 거냐를 두고 깊게 논의하기도 했다. 우리의 ‘여성주의’가 과연 ‘오빠 페미니즘’과 어떻게 다르거나, 달라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상적으로 고민했다.
남자의 페미니즘이라는 건 여성운동을 어떻게 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면 지적 호기심에 불과한 게 아닌가,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남자로 태어난 게 ‘생물학적 한계’라고 해도 괜찮은 거냐?! ‘우리’는 여성주의 ‘안’에 있느냐, 아니면 ‘주변’에 있느냐, 그러니까 ‘우리’는 도대체 누구고 또 무엇이냐… 뭐 이런 얘기를 꽤 깊이, 또 오래 나누면서 계속 ‘우리’에 대해서 정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름 굉장히 열심히 고민하고 대화하고 얘기를 듣고 그랬던 때. 한국에서 ‘다른 감수성을 가진 남자’가 등장했던 때가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적어도 나는, 남자와 여자, 여성주의자와 아닌 사람 모두에게서 욕도 먹고, 수긍도 하고, 항변도 하고, 아무튼 이래저래 ‘단련’되던 기억이 있다. 키보드워리어로 단련된 게 아니라 돌아보면, 성찰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돌아보면서 말을 아끼는 훈련이었던 것 같다. 회상하면 서로 적나라한 얘기와 고민과 조언과 비판을 나누면서 감정적으로 다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뭐 그랬던 듯하다. 이 체험은 후에 공적으로 글을 쓰면서 꽤 유용한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호주제 폐지도 지원하고 ‘언니네’ DJ도 하고
어설프게 호주제 폐지 모임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가 (그때 ‘호폐모’ 게시판이 엉망진창이어서) 내부적으로 뭔가 정리되지 않은 채 [한겨레21]과 같은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괴상하게 소비되기도 했다. 기사화 방식이나 결과, 내용, 관점을 치열하게 토론했고, 그 뒤로는 아마 여성주의 저널 외에는 인터뷰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사화를 계기로 모임 이름도 ‘귀띔’에서 ‘멘이프’로 바뀌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바빠지기도 하고 졸업을 하고 진로를 찾으면서 모이는 시간 자체가 어려워졌지만, 나름 꾸준히 유지는 되었다. 졸업 후에는 몇몇 멤버가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의 남성문화’를 다루는 포럼을 준비해 자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썼던 건 ‘군대와 한국의 남성 문화’였고, 그 과정 자체가 내게 꽤 큰 영향을 미쳤고, 또 도움을 줬다. 잠시 여성주의 저널 [이프]와도 ‘연애’를 주제로 기획한 시리즈에 어설프게나마 끼기도 했던 때였다.
한때는 [언니네]에서 인터넷 라디오도 진행했다. 내가 맡은 방송은 ‘인디즈캣’이었지… (어우-) 인디 음악을 소개하는 라디오여서 인천 집에 있는 음반들을 아현동까지 들고 가 직접 틀고는 했다. 오프닝을 고르다가 그냥 ‘토토로’의 삽입곡을 썼는데…. 골드웨이브도 그때 처음 익혔고, ‘피소’가 피디 역할을 맡으면서 둘이 뭔가 재미있는 진행 아이디어라든가 뭐 아무튼, 그런 걸 짜보기도 하고, 언니네 사무실의 구석방에서 문 닫고 조심조심 녹음하고 그랬다. 브릿팝을 틀어주는 ‘타로음악사’도 있었고 방송 꼭지는 몇 개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인터넷 라디오가 유행할 때라서 ‘지하실’이나 ‘아임스테이션’ 같은 라디오 사이트가 은근히 인기를 끌었는데, [언니네] 라디오스테이션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알려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언니네에서 만난 친구들
[언니네]에서 ‘럭비’도 만나고 ‘똑지’도 만났다. 똑지는 나중에 언니네의 ‘이다’, ‘시타’ 같은 친구들과 [weiv]의 최지선, 최세희, 이용우 선배들, 또 그때 막 데뷔한 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깜악귀’ 등과 함께 ‘여성과 록’에 대한 스터디를 같이 하기도 했다. (애초에 ‘깜악귀’는 만화비평 웹진 [두고보자] 필자로 알고 있었는데, 밴드를 하기 전 웨이브 필자로 참여하면서 만났다.) 똑지는 그 모임이 와해되고 난 뒤에 ‘흐른’이란 이름으로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흐른’ 전에 쓰던 필명은 ‘나의처절한앙뜨와넷’이었다. 스터디 멤버들에게 들려준 데모가 너무 좋아서 (몰래) wav 파일을 씨디로 구워서 혼자 듣고 다니곤 했다. 그 음악들은 공개되지 않았다. 아무튼, ‘흐른’을 비롯해서 언니네에서 만난 오랜 친구들이 있다.
[언니네]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언니네]를 통해서 좀 더 깊숙한 고민들을 할 수 있었다. 이 고민들은 당시 다니던 직장이나, [웨이브] 같은 모임으로도 전이되어 뭔가 본질적인 고민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실수도 많이 했고, 반성도 많이 했고, 어쩌면 나아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엉망인 때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내 이십대 후반부터 삼십대 초반 사이에 [웨이브]와 [언니네]가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언니네] 내부 멤버는 아니었으므로 깊이 관여하진 못했고, 잘 알지도 못했지만, 회사가 끝나면 종종 사무실에 놀러가고 그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 하거나, 그들의 고민을 듣거나, 뭔가 같이 해보기도 하고 그랬다. 이런저런 지식, 태도, 맥락을 배울 수 있었다. 적어도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에 관해 더 깊이 고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남자로서의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여성주의를 책이 아닌 삶에서, 경험으로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 배우고 고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고맙다.
몇 만원 부담돼서 끊었던 후원… 다시 해야지
[언니네]는, 2000년부터 2006년 정도의 [언니네]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이후 운영진도 바뀌고 친구들도 각자 진로를 찾아가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회사 생활을 할 때엔 정기후원금도 내고 그랬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그 몇 만원이 부담이 돼서 후원을 중단했다. 그걸 다시 풀었어야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거라도 할 걸’이라는 후회가 든다. 물론 ‘웹진’만 없어질 뿐 ‘언니 네트워크’는 남아 활동을 지속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다시 후원해야겠다.
[언니네]가 아니었다면 ‘바깥양반’(아내)과 만날 생각도 못했을 거다. 이 친구가 여성주의자란 것이 이이와 연애하고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내게 여성주의는 여성주의자와의 관계보다는 남자로서 자신에 관해 살피는 프리즘이고, 그게 나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대신 남자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감별사’나 ‘판관’이 아닌 입장으로 나를 포함한 남자의 위치나 태도나 역할을 살피는 관점이다. 이걸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맙다 미안하다
여러 가지로, [언니네]는 내게 소중한 공간이고, 그러므로 이 공간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정말 애매하고 복잡하다. 내 기분이 이런데 한 시절을 여기서 다 보낸 친구들의 기분은 어떨까. 의외로 담담할지 모르겠으나 정말로 남다른 곳이었을 테니 진짜 복잡할 것 같다.
[언니네] 특유의 커뮤니티인 ‘자기만의 방'(초창기의 ‘블로그’ 서비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에 올라온 글들을 읽으며 울고 웃던 때가 있었다. 누군지 모를 ‘언니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뭐 그러면서 늘 조심스럽던 때가 있었다. ‘남자’로서 어떻게 여성주의를 대할 수 있을까에 대해 늘 고민했다.
지금도 그렇다. 실수하거나 오해받을 때도 있겠지만, 아무튼 늘 신경 쓰고 애쓰는 편이다. 돌아보면, 이 긴장이야말로 내가 [언니네]에서 배운 가장 좋은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언니네] 운영진, 구성원에게 인사를 전한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