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국경없는 기자회’는 수년 동안 계속해서 한국을 ‘인터넷 감시국’으로 선정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쪼그라들지만, 소수자와 특정 지역을 공격하는 혐오발언은 오히려 기승입니다.
[혐오발언의 해악](The Harm in Hate Speech, 제레미 월드론, 하버드, 2012)의 논의를 통해 표현의 자유와 혐오발언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봅니다. (편집자) [/box]
‘말과 자유’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하는 시절이다. 말 한마디 때문에 국가기관이 일개 시민을 감옥에 넣고, 말 한마디 때문에 소송이 걸려 시민들끼리 고되게 번 돈을 주고받는다. 인터넷에는 말을 잘못했다며 고소하겠다는 위협이 난무하고, 위협을 받은 사람들은 한편 코웃음 치면서도 조용히 우려하며 자기 발언의 수위를 낮추기도 한다.

그저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희구하는 사람들은, 최근에 번역된 앤서니 루이스의 책 제목처럼,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즉, 그 얼마나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발언이라도, 공공장소에 꺼내놓을 자유가 있어야 논파도 가능하고, 활발한 민주적 논의가 가능하게 한다는 주장이다. 이 입장은 루이스로 대표되는 미국 표현자유론의 주류를 형성하기에, 한국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명분과 논리적 힘을 동시에 갖추게 된다.
미국 표현자유론 비주류 대표하는 월드론
먼저 월드론은 혐오발언은 단순히 듣기 싫은 소음이 아니라, 실제로 해악을 끼치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한다. 월드론은 미국 9/11 사건 이후 모슬렘들을 향한 혐오발언을 예로 들며 시작한다. 모슬렘 아이들의 사진에 거대한 글자로 “이들의 이름은 전부 ‘오사마’다”라고 쓰여있는 포스터가 거리에 붙어있다면, 그 포스터의 메시지는 단순히 말과 글로 끝나지 않는다. 그 포스터는 그것을 보는 모슬렘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폭력을 암시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는다.
민주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폭력, 위협, 차별에 시달리지 않고 자기 생활을 영위하고 그 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나, 이러한 혐오발언으로 인하여 이슬람교도들은 그러한 권리를 부정당하게 된다. 즉, 혐오발언은 그 목표물이 된 시민의 존엄성을 훼손하여, 민주사회의 동등한 일원이라는 위치를 깎아내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여기서 월드론은 “혐오발언”이라는 개념어가 혼동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집단명예훼손”이란 개념어가 더 적합하다고 부연한다.)

월드론은 이러한 혐오발언도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월드론에 의하면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현대 법학자들이 주장하는 수준의 표현 자유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월드론은 볼테르가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다” 라는 널리 알려진 경구를 실제로 말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주1))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가운데에서도 사회질서를 강조했으며, 여기서 사회질서란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닌, 모든 사회구성원이 존엄을 지켜가며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상태라고 월드론은 주장한다.
피해자가 누구인지 직시하라
이어 월드론은 에드윈 베이커, 로날드 드워킨, 그리고 앤서니 루이스의 혐오발언을 용인하자는 주장을 논파한다. 루이스에 대한 비평은 특히나 날카롭다. 루이스의 주장을 비판하는 장에서, 월드론은 실제로 혐오발언의 피해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집중하라고 요구한다.
즉, 백인 자유주의자나 인권 변호사에게 돌아가는 해악이 아닌, 그 증오발언의 대상자에게 돌아가는 해악을 상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권 변호사 입장에서 혐오발언은 그저 충격적이고 듣기 싫은 소리일 뿐이지만, 혐오발언의 대상 입장에서 그 발언은 인격을 부정하고 사회의 구성원임을 부정하는 실질적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법학자들은 자유를 제약할 가능성이 가장 큰 존재는 정부라 상정하지만, 혐오발언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제약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그 소수자를 괴롭히는 다수자라는 것을 월드론은 환기시킨다. 월드론은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지며 논의를 정리한다.
“그러한 학대를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으로 오염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이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고, 자녀를 키우고, 희망을 품으며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것인가?”

월드론의 한계, 혐오발언의 기준은 무엇인가?
월드론의 주장은 많은 부분에서 고개가 끄덕거려지나, 그 주장의 한계 또한 손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 한계는, ‘대체 정확히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지 너무 난해하지 않은가’라는 지적이다.
소수자의 존엄을 보호하여 민주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자는 취지는 동감할 수 있으나, 정확히 어떤 발언이 소수자의 존엄에 법이 개입해야 할 만큼 위해를 끼치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월드론은 이 비평을 인지하면서도, “근본적 자유를 재단하는 법원의 책무는, 종종 다수의 善의 균형을 맞추고 여러 가치를 동시에 판단하는, 섬세하고도 어려운 일이다”는 원론적 지적 이상을 보여주진 않는다.
규제는 증오를 가둘 뿐이잖아? 바로 그것이 목적이다!
월드론의 주장의 핵심적 전제는 공동체주의와 사회 발전에 대한 신뢰이다. 혐오발언에 대한 규제는 증오를 지하로 밀어 넣는 것뿐 아니냐는 반론에, 월드론은 “바로 그것이 목적”이라고 답변한다.
월드론에게 있어 이를테면 인종차별주의는 이미 패배한 이념이며, 민주사회에서 더는 재고의 가치가 없기에, 인종차별주의자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인종주의가 다시 승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둘 이유가 없다. 월드론에게 있어서 인종주의는 더 이상 공동체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인종주의에 일종의 근간을 둔 나치즘과 전쟁을 했고, 미국에서 흑인노예해방을 이유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른 서구의 입장에선, 인종주의는 더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인종주의는 배격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강고하며, 어떤 언사가 인종주의적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월드론의 이론을 한국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여러 가지 숙제를 남긴다. 한국에서 혐오발언의 실례로 종종 거론되는 ‘일베’의 레퍼토리를 살펴보자. ‘일베’에선 전라도 출신에 대한 실제로 혐오스러운 비하와 욕설이 난무하며, 이러한 발언은 혐오발언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하고 있다. 지역감정을 배격해야 한다는 전제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월드론의 공식에 따르면 이러한 발언이 규제되어야 하는가, 또 규제되어야 한다면 어디까지여야 하는가는 쉽게 결정 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한국사회에서 “홍어”라는 단어가 미국사회에서 “니거(nigger)”라는 단어와 같은 수준으로 모욕의 정도가 높은 것인가? 또 그렇게 높은 수준의 모욕이란 것이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졌기에 “홍어”라는 단어를 거론하는 것이 전라도 출신 대한민국 국민에게 임박한 폭력을 암시하고 그들을 2등 국민으로 전락시키는 것인가?
월드론의 이론은 좀 더 토착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이 아직 사회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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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그 말은 실제로 볼테르가 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상을 정리한 이블린 홀(Evelyn Hall)이 [볼테르의 친구들](1906)이라는 책에서 볼테르의 사상을 요약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 말과 비슷한 말을 하기는 했다. 1770년 2월 6일에 르리슈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에서 볼테르는 “저는 당신의 글을 경멸하지만, 당신이 계속 글을 쓸 수 있기 위해 목숨을 걸겠습니다”라고 했다. (참고: 캡콜드, 볼테르의 톨레랑스는 사실 이런 것, 2009년 1월 22일.)(원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