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미디어 » 정인이를 보내기 전에

정인이를 보내기 전에

많이들 그럴 테지만, 문득 머릿속이 정인이 얼굴로 꽉 찬다. 그리고 눈물이 난다. 그 눈물이 내가 아직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 나를 포함한 이 가증스러운 세계가 인간 아닌 어떤 것과 동의어라는 걸 증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세계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만든 세계다.

어느 쪽일까. 어느 한편이기만 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아마도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기는 하다.  어느 한쪽이 어떤 것의 본질을 모두 설명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순수한 증오보다 순수한 사랑보다  삶을 만드는 주된 재료는 애증이니까. 삶이 있으니 죽음이 있고, 희망이 있으니 절망이 있다.

그럼에도 악(惡)이 있기 때문에 선(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세계에서 선은 악에 대한 증오보다는 그저 사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학습당하는 내면의 악에 대한 본능적인 집단 공포로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서 선함은 아주 성공한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아니라면 권장되지 않는다. 교육공무원에게 ‘개돼지’ 취급받는 이른바 ‘국민’ 사이에서 선함은 이미 비웃음의 대상이다.

이 세계에서 선의 위상은 영화나 드라마나 연예 기사가 아니라면, 그저 찌질함, 그 자체다. 막장 드라마에서 선은 때로 조롱의 대상이다. 주인공의 선한 행동, 선한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찌질한 어떤 것이다. 조롱하고 싶은 어떤 것이다. ‘고구마’스러운 어떤 것이다.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그저 답답하고 짜증날 뿐이다. ‘우리편 악당’은 그 답답함을 풀어주는 그저 ‘사이다’. 그게 막장의 리얼리티다. 나는 선을 조롱하는 시청자의 마음을 아주 넉넉하게 이해한다.

그 선으로 쌓아올린 그 어떤 단단한 성채도 없고, 그 욕망과 위선으로 쌓아올린 아파트만 드높다.

드라마의 막장은 현실의 막장을 반영한다. 드라마의 막장은 현실의 막장을 그저 극적으로 좀 더 과장되게 흉내낼 뿐이다. 때로 현실은 드라마의 막장을 순진하게 만들 정도로 막장이다. 나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를 보지 않지만, 왜 사람들이 막장 드라마를 보는지는 잘 알 것 같다. 그렇게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삶은 너무 차갑고, 너무 무섭고, 너무 공포스럽다. 나를 위로해줄 어떤 것도 없다. 정인이가 살아났다면, 생존했다면, 정인이 옆에서 정인이를 위로해준 건 경찰이 아니라 입양기관이 공무원이 아니라 막장드라마였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정인이를 입양한 양모에게 정인이는 자신의 선함을 치장하고, 과시하기 위한 ‘레어 아이템’이었다. 정인이라는 ‘입양아’는 장하영에게 그저 구하기 힘든 악세사리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인간 아닌 어떤 것에게 움직이고, 숨쉬며, 먹을 것을 먹고, 보채는 ‘악세사리’는 귀찮을 테다. 장하영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정인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가장 보호를 필요로 하는 그 작은 생명이 악세사리였다면, 금세 실증나서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무엇이다면, 거기에 더해 화풀이 대상이었다면, 그 양모는 인간이 아니다. 그 생명을 잃은 이 세계는 더는 생명을 품을 자격이 없다. 그걸 통계도 증명한다. 이제 태어나는 생명보다 죽어가는 생명이 더 많다. 지난해 11월 통계조사 이후 처음으로 태어나는 생명을 죽어가는 생명이 앞섰다. 어쩌면 그건 다행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예수가 유다에게 그런다.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정인이게도 그렇고, 장하영에게도 그렇다. 나에게도 그렇고, 이 세계에도 그렇다. 정인이를 품을 자격 없는 세계지만, 장하영 같은 자, 저런 인간 아닌 ‘어떤 것’을 남겨놓아도 좋을 세계 역시 아니다.

정인이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장하영을 죽여버리고 싶다. ‘인권’을 위해 일하는 어떤 시민단체의 상임이사는 “아동학대, 분노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 너무 너무 맞는 말을 내 마음은 차갑게 비웃는다.

“(언론은 특히 이번에 정인이를 방송한 ‘그알’은) 개인의 악마성과 피해아동의 학대 피해를 자세히 보도한다. 시청자들의 분노와 동정이라는 감정을 움직이는 것으로 사건을 보도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동학대 방지시스템에 대한 제대로 된 언론의 감시가 있었다면 아동학대에 처벌수위를 높인 ‘정인이법’(아동학대범죄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포함한 아동학대방지관련 입법)이 조금 더 일찍 국회에서 논의되었는지도 모른다.”

–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 ‘아동학대, 분노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중에서

언제까지 그럴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는 정인이를 놓아줄 거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이 그 부끄러움, 미안함, 분노와 혐오로 아주 작은 돌멩이라도 하나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적는다. 정현종은 슬픔으로 보석을 만들고 싶다고 했지만, 틀렸다. 슬픔으로는 그저 슬픔 밖에는 만들 수 없다. 제도를 만드는 건, 사실 분노와 공포다.

저 정치인 ‘개나리’들이 저 높은 ‘견찰’ 양반이 그래도 목소리를 높이고, 그래도 죄송하다고 사죄하는 건 나 같은 ‘개돼지’가 그래도 인간인 줄 알고 분노하고 있어서다. 그 분노가 사라지면, 이 공식적인 위선도 사라진다.

정인이의 얼굴을 애써 보여주기로 결심한 ‘그알’을 칭찬한다. 가해자 장하영, 안성은의 얼굴마저 용기 있게 보여줬더라면 더 좋았을 거다. ‘그알’이 촉발한 정인이 양부모에 대한 분노조차도 책망하며 제도적 관심을 촉구하는 그 마음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물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동학대, 분노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 마음을, 그 진심을 나는 오해하고 싶진 않지만, 그 건조하고 추상적인 언어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걸 잔인하게 증명하는 건 지금, 이 현실이다.

분노 없는 개혁은 욕망 없는 정치보다 허언이다. 다만 중요한 건 분노의 방향일 뿐이다. 희망이 없다면, 분노라도 존재해야 한다. 그 분노마저 사라지면 그때 남는 건 어떤 걸지 나는 그게 무섭다.

해맑게 웃는 정인이의 얼굴 대신 검게 그늘진 정인이의 얼굴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저 악마의 얼굴도 기억해야 한다. 머지않은 어느날 정인이도 저 악마도 잊겠지만, 가능하면 오래오래 기억해야 한다. 그게 남은 자들의 몫이다. 아니, 남겨진 자들의 벌이다.

2020년 대한민국, [어느 평범한 가족](EBS)의 모습

2020년 대한민국, [어느 평범한 가족](EBS)의 모습. 아빠 안성은, 엄마 장하영, 작은딸 입양아 ‘정인'(친모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알’ 정인이 편의 맺음말

그 어떤 제도도 그 어떤 아동학대 예방책도 이 미안함과 이 분노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 미안함과 분노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겠지만, ‘그알’ 같은 대중적 미디어가 그 분노와 미안함을 매번 상기해준 점에 감사한다. ‘그알 ‘ 정인이 편의 ‘맺음말’을 옮긴다. 그 어떤 ‘정인이법’의 입법취지보다 정인이법이 왜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고, 그 어떤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보다 정인이 양부모를 왜 강력하게 처벌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한다.

“아동 학대의 실상을 전하는 보도에는 늘 이어지는 질타가 있습니다. 사건의 잔혹함을 전하는 데에 급급하고 대안에 대한 고민은 짧다는 게 그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 지점에서 고민을 했습니다. 한정된 시간을 어느 쪽으로 쓰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정인이가 입은 피해를 입증하는 것과 아동학대에 대한 예방책을 고민하는 것. 그 둘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은 정인이 쪽이었습니다. 정인이에게는 나서서 싸울 어른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동 학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데에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처분이 꼭 필요하기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며 계속되고 있는 학대 사건들. 이에 대해 일관되고 강력한 법의 판단을 쌓아가는 일은 효과적인 예방책을 만들어가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오늘 방송을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도 13일에 시작될 재판의 결과를 끝까지 함께 지켜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관련 기관들의 실책은 책임을 물어야 하는 수준입니다. 동시에 그래서 더 개선해야 할 문제점들이 뚜렷히 보이기도 합니다.

사건 담당자는 무조건 일원화되어야합니다. 신고 의무자의 신고는 좀 더 무겁게 받아야 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편견이 제일 위험합니다. 학대 의심자와 아기가 잘 지내는 듯 보여서, 학대 의심자가 좋은 일을 많이 한 인물이어서 ‘설마?’ 하는 편견이 아이들의 모습을 잃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연구로도 공통점을 찾지 못한 건 그것이 바로 아동학대 가해자들입니다.

양부모에게 정인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늘 입양이 꿈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입양 뒤로는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고, 점점 더 학대의 강도를 높여갔던 양모. 그런 아내를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내내 모른 척 했고, 끝내 아이를 구조하지 않았으며, 가해자인 아내만을 두둔했던 양부.

부모로서 미성숙하고 어른으로서 비겁한 그들을 대신해 아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같은 어른이어서
지켜주지 못해서
그리고
너무 늦게 알아서
정인아 미안해

아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아이가 생사에 기로에 서 있을 때 우린 기도조차 해주지 못했습니다.

(노래 ‘천개의 바람’)

너무 늦게 알게 된 미안한 이름.
되뇌일때마다 아파오는 이름.
하지만 부를수록 다짐하게 되는 이름.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더 나아가 행동하게 하는 이름.
결코 잊지 못하고
절대 잊어서는 안될 이름.

그 이름은 정인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정인이는 왜 죽었나? – 271일간의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2021. 1. 2., 1233회) 중에서

좋은 기사 공유하고 알리기
슬로우뉴스에 커피 한잔의 여유를 후원해주세요. 필자 원고료와 최소한의 경비로 이용됩니다.

필자 소개

슬로우뉴스 편집장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뉴스일 당신, 그 안에 담긴 우리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작성 기사 수 : 238개
필자의 홈페이지 필자의 페이스북 필자의 트위터 필자의 구글플러스

©슬로우뉴스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슬로우뉴스 안내 | 제보/기고하기 | 제휴/광고문의
(유)슬로우미디어 | 전화: 070-4320-3690 | 등록번호: 경기, 아51089 | 등록일자 : 2014. 10. 27 | 제호: 슬로우뉴스 | 발행인: 김상인 | 편집인: 강성모
발행소: 경기 부천시 소사로 700번길 47 1동 506호 (원종동, 삼신) | 발행일자: 2012. 3. 26 | 개인정보관리/청소년보호책임자: 강성모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