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펠릭스 누스바움의 1943년 작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이다.
누스바움의 유대인 신분증
화가는 당시 벨기에가 발행한 외국인 등록증을 마치 뒤쫓아 온 누군가에게 확인시켜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무거운 질감의 외투와 붉은 눈빛은 그가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국인 등록증에는 ‘Juif-Jood’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는데 이것은 나치가 유대인임을 식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그림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친위대에 잡힌 누스바움은 1944년 7월 말 사형 당하고 만다. 펠릭스 누스바움의 신분증은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는 징표였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은 국민이 아니었다. 국민이 아니기에 말할 수 없었다. 숨어 지내야 했다. 자신의 존재, 아니 목소리 조차 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어떤 신분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진하는 친구 ‘S’의 사용할 수 없는 명함
친구 S는 사진을 한다. 명문 사학 출신의 S는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지만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버거운 초보 예술가다.
생계를 위해서 S는 강남에서 수능 영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수입의 대부분은 이 일에서 나오지만 어딜 가서도 ‘학원강사’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S는 학원 강사로 일해야 필름 값이나 작업실 임대료를 낼 수 있다. 즉, 예술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 학원 강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학원에서 파준 ‘00어학원 고3 담당 팀장’이라는 명함을 어느 누구에게도 돌린 적이 없다.
누군가에는 학원 강사라는 자리도 성취하기 어려운 자리이겠지만 S는 학원 강사를 현 입시 체제의 모순에 기생하는 존재, 사라져야 할 사교육에 의존하는 ‘준범죄자’ 등과 같이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S의 첫 명함은 작품의 진정성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혐의 하에 서랍 한 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S는 최근 들어 동료의 결혼식에도 가지 않는다. 결혼식은 ‘명함’을 마음 놓고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의 특권적 잔치다. ‘요즘 어떻게 지내?’. 30대 중반에게 이 질문은 명함을 내 놓으라는 말과 다름 없다.
“어떤 명함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회적 폭력과 권력관계 수단인 신분증과 명함
신분증이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존재했다면 명함은,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만큼은, 서로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국민에게 신분증 확인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겠지만, 2차 대전 당시의 유대인이나 재일 조선인들을 포함한 여전히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었다고 할 수 없는 ‘비-국민’에게 신분증 확인은 하나의 폭력이었다. ‘유대인 증명서’를 들며 보이는 화가의 초조한 눈빛이 ‘삶’에 대한 어떤 위협을 감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면 일상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명함’을 주고 받는 손 위에 명함에 적힌 직장, 직위, 직업으로 자신의 ‘사회적 삶’에 대한 위협을 감지하는 떨림과 긴장이 있다는 것은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
대기업 사원, 의사, 교수, 교사, 회계사, 법조인, 기자 등등에게 명함은 하나의 관계를 만드는 것, 그것도 권력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직장명이 없는 사람, 시간제 교사, 학원 강사, 영세 업체 직원에게 명함은 하나의 커밍아웃이다. 이것은 물론 거친 일반화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명함이 권력이 될 것인지, 커밍아웃이 될 것인지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같은 학원 강사끼리 명함을 주고 받는 것에서 이런 권력 관계가 생기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 발언할 수 없고 대신 말해지는 존재
사람들은 대기업 사원, 의사, 교수, 기자에게서는 공적으로 가치 있는 발언이나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직장명이 없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 시간제 교사, 학원 강사는 ‘무능력하고 게으르며 사욕에 밝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하며 그들의 공적 발언의 기회를 차단한다. 이것은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에게 부여한 이미지,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혐한 시위에서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재일조선인에 대해 부여하는 이미지와 동일하다.
유대인이든 조선인이든, 학원 강사든 이런 식의 사회적 인식 하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따라서 혹시나 이들이 공적 발언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자신의 ‘위치’를 결코 노출해서는 안된다. 사회적 공론장이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제안의 장이라 할 때 불만이든 제안이든 말할 기회가 없으며, 말하더라도 무시된다. 유대인의 처지를 유대인 아닌 사람이 말해줘야 하듯이, 직장명이 없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의 처지는 교수나 정치인이 대신 말해줘야 한다.
이성의 공적 사용에 관한 자유
일본의 많은 재일조선인 예술가나 연예인이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히지 않듯이 S 역시 자신이 학원 강사임을 밝히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계몽을 위해서라면 결코 제한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한 자유, ‘이성의 공적 사용의 자유’가 우리 사회에서 아직 보장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칸트는 사회 메커니즘이 유지되기 위한 자유의 제한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부당한 명령, 부당한 세금이라도 일단은 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라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부당한 명령을 받은 군인, 부당한 세금을 내야 하는 시민이라도 마치 ‘학자들처럼’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의견을 공중에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이 계몽된 사회다. 말하자면, 명함으로 발언의 기회가 확대되거나 축소되지 않는 사회, 명함으로 사회적 삶이 위축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이다.
친구 S여, 명함을 돌리며 말하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니.
읽으면서 유대인 까지 비유를 드는 게 좀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좀 생각해 보니 전혀 과하지 않은 현실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우리나라의 명함에 대한 인식과 집착과 상징성은 특히나 유별난 것 같습니다. 보통 서구의 젊은이들에게 명함은 자신을 브랜딩하는 크리에이티브한 개인홈페이지 미니버젼과도 같다고 느껴지는데 한국은 입사 후 부디 빨리 인쇄돼서 부모님과 주변분들에게 취직턱을 내며 뿌려야하는 대상으로만 인식이 머무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프리랜서 외신기자들은 종종 자신이 기고하는 회사 로고를 박아 제작한 명함을 사용하곤 하는데, 이것은 속임수가 아닌, 한국 인터뷰이들-주로 관료들-을 제대로 알고 겨냥한 아이디어라고 여겨집니다. 프리로 일하는 외신기자들은 그게 타임지건 가디언지건 본인과 그닥 동일시하지 않기에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하거니와, 자기 취재를 성사시키기 위한, 목표가 뚜렷한 툴로써 사용할 뿐입니다. 취재원 입장에서도 사실 그 기자가 정직원이건 일회성 기고자이건 그 매체에 본인들의 이야기가 실린다는 사실이 중요하기에 손해를 볼 것도 없고요. 또 사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외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신기해하며 명함에 큰 간판없어도 지나치게 우호적인 모습도 참 프로페셔널 하지 못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