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이 글을 받고 편집팀 안에선 작은 ‘줄다리기’가 있었습니다. 척 봐도 정말 긴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필자의 체험과 정성이 가득 담긴 좋은 글이었습니다. 좀 더 독자를 배려해 좀 더 많이 읽히게 하고 싶었습니다. 나눠서 올리자는 의견도 있었고, 편집의 묘를 살려서 초안을 재구성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글을 다시 편집하기도 했습니다. 필자와의 협의가 있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원문을 그대로 올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이 글의 가치는 정치나 선거결과 분석에서가 아니라 특정 시기(2012년 겨울) 특정 세대와 계층의 인식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민속기록지적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이 글의 핵심은 구체적 내러티브로 제공되는 풍부한 맥락이라고 봤습니다. 호흡이 느리더라도, 그래서 독자에게 다소 불편하더라도, 맥락을 제대로 짚어놓고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목부터 ’58년 개띠를 위한 변명’이지 ’50대 공략을 위한 정세분석’이 아니니까요. 이 우직하기 짝이 없는 글이 거기에 맞는 독자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box]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생존 본능, 58년 개띠
58년 개띠란 말을 알지요? 이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행처럼 쓰였던 말이에요. 왜 유독 58년생의 띠만 유별나게 불렀을까요? 한국 전쟁이 끝나고 자식들을 참 많이 낳았지요. 전쟁이 끝나면 자식들을 많이 낳는다고 하지요.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본능이 작동되는가 봐요. 우연히 만나서 나이를 물어보면 ‘저도 58년 개띠에요’라고 할 만큼 흔하게 볼 수 있는 세대를 말하는 거지요. 58년생끼리의 소속감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비슷한 연령대의 기준이기도 해요.
50대 개띠의 화려한(?) 부활
대선 출구조사의 결과를 보고 50대가 박근혜 후보 당선의 주역이라고 하더군요. 조금 얼떨떨하기는 해요. 지금까지는 386이니 486이니 하면서 그들을 투표의 향배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는 2030세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갑자기 58년 개띠의 세대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이 되었단 말이에요.
하긴, 출구조사 결과가 다 믿을만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50대가 89.9%의 투표율을 보였다는 건 대단한 일이긴 해요. 90%라면 막말로 병 걸려 못 일어나는 사람 빼고는 다 찍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십 년 전 우리가 40대였을 때 투표율이 76.3%였으니까 무려 13.6%가 올라갔지요. 10년 사이 전체 투표율은 70.8%에서 75.8%로 5% 올라간 것에 비하면 많이 올랐지요. 게다가 유권자 중에서 50대의 비율이 이제 19.2%더군요. 10대(18.1%), 20대(20.1%), 30대(21.8%)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어요. 십년 전의 50대가 12.9%였던 것에 비하면 연령별 구성에 많은 변화가 생겼지요. 이런 변화를 감안하면 50대의 투표율이 위력이 있었던 건 분명한 것 같네요.
60대도 보수화는 마찬가지… 결국, 중요했던 건 투표율
투표율이 중요했던 건 지지율의 변화를 감안해보면 더욱 잘 느낄 수 있어요. 십년 전 50대의 지지율을 보면 노무현 대 이회창이 40.1%:57.9%였어요. 이번 대선에서는 문재인 대 박근혜의 출구조사 지지율이 37.4%:62.5%로 나왔으니 변화가 있긴 했습니다. 40대를 볼까요? 40대의 경우 48.1%:47.9%에서 55.6%:44.1%로 변했습니다. 그럼 60대 이상을 볼까요? 34.9%:63.5%에서 27.5%:72.3%로 변했습니다. 어떤가요? 결국, 108만 표 차이라고 하는 것은 50대가 유독 더 보수화되었다는 것에 있지 않아요. 오히려 투표율이 높아서 생겨난 결과라고 봐야지요. 투표율이 높으니 그 격차가 절대 수의 증가로 나타난 것이지요.
그렇다면 50대를 저주할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왜 50대는 빠짐없이 투표장으로 향했는가? 무엇이 50대로 하여금 소리 없는 결집을 이루어내게 만들었는가? 이런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달리 보는 방식이 있지요. 세대별로 보지 않고 지역별로 볼 수 있습니다. 충청권을 보세요. 10년 전과 다른 결과가 발생했잖아요. 인천과 강원은 또 어떤가요? 이 지역은 민주당 출신이 시도지사를 맡고 있는 지역이잖아요. 민주당이 도지사로 있는 곳도 졌다면 심각한 문제 아닌가요? 이게 오히려 더 중요하지 않나요?
문재인 후보가 선거 직전 주말에 ‘골든크로스를 쳤다’고 했지요. 뭐 말이 어려워 잘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주식할 때 사용하는 말이라네요. 단기 이동평균선이 중장기 이동평균선을 밑에서부터 위로 치고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는군요. 이 현상이 나타나면 투자심리가 좋아져서 주가가 올라갈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것을 나타낸다면서요. 그러면 질 수 없는 게임 아닌가요? 그런데도 졌다면 뭔가 대단히 중요한 요소를 놓친 것이지요.
세대별 투표를 이해하기 위한 인생 경력 분석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세대별 투표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니까, 지역별 분석이나 심리적 분석이 아니라 인생 경력의 분석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온 내력을 한 번 봐 주시고, 우리가 무엇을 바랐는지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50대 개새끼론, 이건 아니라고 봐요. 그렇게 해서 어찌 50대를 설득할 수 있겠어요.
우리라고 독재를 좋아할까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폐허 위에 자란 박정희 시대의 아이들

이번 대선 유권자 중에서 50대라 하면 52년생에서 62년생이 되겠네요.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자랐어요. 우리는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답니다. 고생으로 치자면 우리의 선배들이 훨씬 더 고생했지요. 그러나 우리 역시 넉넉하지 못했어요. 우리의 아버지들이 밥상머리에서 일제 때 소나무 껍질 벗겨 먹고, 비료나 땔감으로 쓰려고 개똥 주우러 새벽같이 골목길로 내몰린 이야기를 할 때면, ‘그럼 우리도 그렇게 살란 말입니까’라고 반발하기도 했어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넉넉지 않아 설날, 추석날만 기다렸지요. 가끔 돌아오는 제삿날이 되면, 제삿밥 먹기 위해 잠 안 자려고 끙끙대기도 했지요.
박정희 시대였어요. 우리의 언니, 누나, 형들은 취직하러 도시로 나갔어요. 국민학교(현재 명칭은 ‘초등학교’) 마치고 바로 공장에 간 경우도 많았어요. 그건 우리 세대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식모로도 많이 갔어요. 광고 음률에 맞춘 ‘식순아 밥 탄다!’라는 말이 당시 유행어였어요. 삼시 세끼 입에 풀칠하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였어요. 공부에 대한 열정은 높았지만, 형편상 그럴 수 없었지요. 웬만큼 똑똑하지 않으면 공부를 시키지도 못했어요. 부모가 형편이 안 되어 누나들이 동생 학업 뒷바라지하기 위해 공장에서 밤새워 일하거나 식모로 일했답니다. 공장 환경이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죠. 전태일 씨가 왜 분신했겠습니까.
새마을 운동과 유신, 중화학공업화와 수출 중심의 70년대
70년대 들어오면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도 펼치고 유신도 선언했지요. 숨죽이고 살아가지 않으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세상이었어요. 그러나 그건 먹물깨나 먹은 사람들 이야기고, 우리들 대부분은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했지요. 산업 역군이라 그러는데, 우리는 그 산업 역군 중에서 막내를 이루고 있는 세대들이었답니다. 70년대에는 ‘대망의 80년대’라고 외치면서 80년에는 100억 불 수출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죽으라고 일했답니다. 거리에 머리 긴 청년들 지나가면 잡아 가두고, 아가씨들 치마 길이까지 자로 쟀답니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람은 용서가 안 되는 시절이었지요.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모두가 근로 전선에 나서는데, 어디 감히 그런 게 용납되겠어요. 국민학생들도 애향단이라고 해서 일주일마다 마을 청소하러 노력 봉사를 나갔거든요.
70년대가 우리 경제에서는 중화학 공업화의 시대였어요. 세계적으로는 경제가 위기에 빠지던 시절인데도 우리나라는 잘나갔어요. 원유값이 대폭 오른 오일쇼크까지 터지고 세계 경제는 아주 오래도록 불황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박정희 대통령은 대기업들에게 돈을 팍팍 대주었지요. 60년대 한일협정으로 받은 돈으로 포항제철 짓고, 또 경부고속도로도 놓았지요. 경부고속도로 짓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지만, 결과적으로 잘 한 것 아닌가요? 그런 기반 위에 정부에서 아낌없이 대출해주니 대기업들 잘 나갔지요.
우리들 형편이야 뭐 나은 게 있었겠어요. 수출경쟁력을 갖추어야 살 수 있는데, 우리나라가 가진 게 뭐냐,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노동력이 가장 중요한 경쟁 요소 아니냐, 그런데 당장 배불리 먹으려고 하면 어찌 경쟁력이 생기겠느냐, 그러니 잘 살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자, 대신에 쌀값은 정부가 올리지 않을 테니 일단 견뎌보자. 뭐 이런 시절이었으니까. 농민들도 많이 힘들었지요. 누가 농사지으려고 하겠어요. 다 도시로 떠났죠. 그런데도 데모하는 대학생들 보면 혀를 찼지요. 그 좋은 머리를 국가를 위해 쓰지 않고 뭐하는 짓인지.
박정희의 죽음과 전두환 일당의 등장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요. 50대 중후반 세대는 이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그 전에는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잖아요.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 두 부부 사이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도 참 많이 돌았었지요.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면 안 되겠군요. 어찌 됐든 70년대 후반 들어 한국 경제가 서서히 거꾸러지고 있었어요. 노동자들의 불만도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거죠. 이를 총칼로 진압하려고 하다가 10.26이 터진 거지요.
다들 전쟁 나는 건 아니냐고 불안해했어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이제 민주화가 이루어지는구나라는 희망이 솟아났지요. 웬걸, 민주화의 봄은 짧디짧았어요. 전두환 일당이 무수한 시민들의 주검을 군홧발로 밟고 총칼로 정권을 잡았어요. 그때 우리는 혈기 방창한 20대였어요. 서슬 퍼런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전두환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숨죽여야 했지만, 그 살인자를 우리는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요. 박정희 때는 중앙정보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였다지만, 전두환은 백주대로에서 살육한 거잖아요.
전두환 시대의 3저 호황과 넥타이 부대
그런데도 경제는 괜찮게 돌아갔어요. 3저 호황이라고 했지요.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를 3저라고 해요. 게다가 정부는 위기에 빠진 철강, 조선 등의 산업에서 반도체 등으로 주력 산업을 바꾸게 됩니다. 반도체를 한국 경제의 쌀, 밥이라고 했어요. 전두환은 또 물가는 잡았어요. 전두환은 인정할 수 없지만, 경제는 잘 돌아가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이미 한 번 터져 나온 민주화에 대한 의식은 사라지지 않는가 봐요. 그때 대학생들 데모 정말 열심히 했지만, 공장에 다닌 사람들도 가만히 죽어 있지는 않았어요. 박종철 학생이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탁’치니 ‘억’하고 죽었더라는 기만적인 발표에 대학생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모두 같이 일어선 거예요. 연세대 대학생 이한열 열사가 죽고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지요.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들고일어났지요. 왜 ‘넥타이 부대’라고 하잖아요. 그때 생긴 말이랍니다.
전두환이 계속 대통령 간선제를 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는 직선제 쟁취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어요.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민들의 함성이 넘쳐났어요. 결국, 전두환은 항복했지요. 노태우가 6.29 선언을 하고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지요. 우리는 이 시절에 대한 자부심이 있답니다. 그리고 공장의 노동자들도 일어났어요. 경제는 잘 돌아갔지만, 우리한테 돌아오는 게 없었잖아요. 그래서 어용노동조합은 민주노동조합으로 만들고, 노동조합이 없는 곳은 노동조합을 만들었지요. 대대적인 임금인상이 이루어졌답니다.

다시 권력은 쿠데타 일당 노태우에게
하지만 권력은 또다시 군부인 노태우한테로 돌아갔습니다. 어처구니없었지요. 김영삼과 김대중이 갈라서지만 않았어도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거예요. 두 사람의 지지율을 합치면 55%인데 노태우는 36.6%였거든요. 이게 뭡니까. 정치인들 믿을 수 있었겠어요. 노태우의 정책은 우왕좌왕이었어요. 권력 기반이 약하니까 요즘 말로 하면 포퓰리즘적인 정책도 펼쳤기도 했지요. 예를 들면 국민연금제도가 그때 도입되었어요. 물론 근본이야 재벌 중심이었지요. 부동산 광풍이 이때부터 불기 시작했어요. 3저 호황에다가 막대한 선거자금 등으로 인해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기 시작한 거죠. 노태우는 또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을 밀어붙였어요. 그전부터 생겨난 현상이긴 하지만 내 집 마련을 위한 직장인들의 무리한 대출이 이때부터 본격화되었죠. 또 노태우는 주식시장을 인위적으로 부양시키려고 했지요.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임기 말에 총액임금제라고 해서 임금인상을 억제했습니다. 임금으로 세상 살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거예요. 모두가 한탕을 노리는 시대가 된 겁니다.
김영삼의 ‘구국의 결단’과 금융위기의 도래
그러던 중 김영삼이 구국의 결단이라면 노태우, 김종필과 손을 잡았어요. 민정당의 시대가 가고 민자당이 탄생한 거예요. 결국, 김영삼 후보는 김대중 후보를 꺾고 대통령이 됩니다. 김영삼은 처음 등장했을 때 군부 하나회의 청산, 금융실명제 등 개혁적인 행보를 취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국제화를 들고 나오더니 대한민국을 OECD 선진국에 가입시키겠다며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어요. 국제화하겠다며 외환 자유화를 선언한 거예요. OECD에 가입하고 이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고 샴페인을 터뜨렸죠. 그런데 이미 미국은 공업국가의 길을 포기하고 금융시장 중심으로 세계경제를 재편하겠다는 구상 하에 움직이고 있었어요. 외환 자유화가 되니 한국의 재벌이나 금융회사들이 이자율이 낮은 외국의 단기 자금들을 막 끌어다 쓴 거예요. 처음엔 몰랐겠죠. 정말 몰랐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동남아 금융위기가 와요. 그런데도 정부 관리 나리들께서는 우리나라는 펀더멘털이 좋으니까 아무런 문제없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지요. 정부가 자신 있는가보다 라고 하고 있다가 결국 외화 잔고가 바닥나고 IMF에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거죠. 그래도 또 우리는 나라가 망하면 안 되지 라며 국채보상운동의 마음으로 결혼반지, 애기 돌 반지 다 빼서 금 모으기 운동을 했어요. 거덜은 딴 사람들이 내고, 갚기는 우리가 갚는 식이죠.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아, 얘기가 너무 길어지네요.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15대 대선은 DJP연합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돼요. DJP연합이란 김대중, 김종필, 박태준의 연합을 말하는데, 김종필, 박태준은 공화당 시절 핵심 인물들이지요. 김대중과 이회창의 대결에서 준비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지요. 그때 투표율이 80.7%였으니까 대단했지요. 득표율이 40.3%:38.7%였으니까 큰 표 차라 보기 어렵죠. 특히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가 19.2%를 얻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쉽게 얻은 승리가 아닙니다. 그때도 50대가 89.9% 투표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었지요. 30대, 40대 모두 투표율이 80%를 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IMF의 요구를 충실히 따릅니다. 4대 부문 구조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고통을 분담하자고 했지요. 30%가 일자리를 잃더라도 70%가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다시 일자리가 만들어질 거라고 했지요. 이때 사오정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45세가 정년이라는 거지요. 정확하게 지금의 50대가 당시 사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일자리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IMF가 초래한 물질적, 사회적 박탈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요? 사회에서 이제 막 제대로 자리를 잡아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집 한 채 마련한다고 대출도 받았지요. 부동산이 대세 상승기에 있었기에 어떻게든 집은 사 두려고 노력했습니다. 임금이 높았다고 할 수 없어도 평생직장이 있었고, 퇴직 후에 퇴직금으로 노후를 살아가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었지요.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은 우리 부모 세대 못지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 부모 세대가 교육열은 높아도 형편이 되지 못해 우리를 공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는 어떡하든 자식 공부는 제대로 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우리 윗세대보다 조금 더 빠르게 가정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왜 가장이 돈을 벌어 가족 전체가 먹고사는 가정 말입니다. 우리 때는 결혼하면 대부분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했습니다.
명예퇴직 많이들 했지요. 까짓 거 위로금 더 받고 나가 장사하면 굶어 죽기야 하겠나 하는 심정도 있었습니다. 아 그런데 그렇지 않았지요. 너도나도 직장 그만두고 나와 일거리를 찾는데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지요. 가게 차렸다가 퇴직금 다 날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정은 금방 들통 나는 것이어서 직장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든 잘리지 않으려고 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나가면 죽는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존심의 대명사인 간과 쓸개는 출근할 때 집 냉장고에 보관하고 나갔지요. 임금을 동결하거나 삭감해도 끽소리도 안 했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은 일자리가 없습니다. 생활비는 늘어나는데, 수입은 반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니 집에 있던 가정주부도 생업전선에 나갔습니다. 어려서는 식모, 나이 들어서는 가정주부로 조금 사는가 싶더니 식당 파출부로. 이게 뭡니까.
노무현 시대, 구조조정은 계속되고…
아, 50대라는 연령층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니 계층적으로 다양한 층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최대한 단순화시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점을 이해하세요. 지금은 우리 세대가 어떠한 시절을 살았는가를 주로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우리 세대들 노사모 많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당내에 뭔 기반이 있었습니까? 다 민주당 바깥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요. 16대 때 우리 세대의 투표율이 당시 50대의 83.7%보다는 떨어졌지만 76.3%로 그리 낮지 않습니다. 그러니 뭐합니까. 노무현 정부 때 구조조정이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습니다. 탄핵 열풍도 불고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민주화되었지만, 살기는 더 지랄 맞았단 말입니다. 애들은 커서 대학 들어갈 나이가 되었는데 수입은 줄어들었으니 무슨 낙이 있단 말입니까. 자살도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이명박을 선택한 겁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먹고 살 길만 있으면 그 길을 택하겠다는 심정이었단 말이에요. 이명박? 도둑놈이라는 것 알지요. 그거 모르고 찍었겠습니까? 알고도 찍었단 말이에요. 기업 경영해본 사람이 경제 살리는데 더 낫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한 거지요. 우리 세대만 그리 생각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동영 후보가 26%밖에 얻지 못한 걸 생각해 보세요.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는 광고가 있었어요. 부자 되기 쉽습니까? 한밑천 있는 놈이 부자 되는 거죠. 맞아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림이 어려우니까 그 말에 그냥 녹아버린 거예요.
그래서 선택한 이명박, 하지만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한 게 뭐가 있나요? 4대강 외에 기억나는 게 뭐가 있지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업 해 봤다고 나라 살림 잘 챙기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되었지요. 안보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어요. 목소리만 높였지 천안함, 연평도 등 제대로 대응한 게 없어요. 사전에 막았어야지. 이명박도 실패한 정권이었어요. 그러고 보면 15년을 힘들게 살아오고 있는 거예요.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가 남북관계와 민주화에서 진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박근혜에 대해 기대를 할 수밖에 없지요. 그게 우리 50대만 그러했나요. 안철수 후보가 등장하기 전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을 보세요. 대단히 높았어요. 민주당도 실패하고, 이명박도 실패하고, 그러니 박근혜 후보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지 않았겠어요? 독재자의 딸이라 그러는데, 시절이 바뀌었잖아요. 오히려 아버지 밑에서 보고 배운 것이 많아 통치를 잘할 수도 있지요. 막말로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는 제대로 성장시켰잖아요. 말없이 성공하게 하는 카리스마가 필요합니다. 방송 토론에 박근혜 후보 말 잘 못했지요. 그렇다고 다른 후보가 잘한 건 또 아니잖아요. 말 잘한다고 대통령 잘하는 건 아니지요. 그리고 이정희 후보는 뭡니까?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려고 나왔다니. 결국, 문재인 후보와 이정희 후보는 한 몸으로 보였어요.
박근혜는 이명박과 다르다(!)는 이미지…
정권교체 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한 걸 가지고 박근혜 후보한테 책임지라고 할 수 있나요. 박근혜 후보와 이명박 대통령은 서로 많이 싸웠잖아요. 그러니 이명박의 잘못을 박근혜한테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문재인 후보도 개인적으로 보면 성실한 사람으로 보여요. 거짓말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책임을 같이 지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민주당이 정국을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총선에서 민주당이 참패했는데, 반성하는 모습이 없어요. 문재인 후보가 민주당을 확실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도 별로 안 들어요.
안철수 후보는 새 정치를 하겠다고 했지요. 솔직히 그 새 정치가 밥 먹여 살려 줄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처음에는 성공한 기업인이기도 하고 통 큰 사람으로 보여서 많은 관심이 갔습니다. 그러나 기존 정치권이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좋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다음에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결국, 문재인 후보한테 양보하고 말았잖아요. 그것도 별로 흔쾌하게 양보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결국, 국민들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 민주당한테 밀린 거죠.
결국, ‘불안’이 이번 대선의 키워드
길게 이야기했네요. 핵심은 이거에요. 우리는 너무 불안하다는 겁니다. 지금 50대면 한창 일할 나이에요. 은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자식들 등록금 내기도 벅차고, 졸업했다 해도 내가 벌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나마 집 한 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달랑 집 한 채 있을 뿐이지 생활이 안 돼요. 박근혜 후보가 복지를 먼저 이야기했지요. 경제민주화도 이야기했어요. 완벽한 걸 바랄 수 있나요. 조금씩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게 중요하지요. 당 이름도 바꾸고, 박근혜 후보는 원칙과 약속을 중시한다고 하잖아요. 물론 또 속았다고 한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일을 누가 쉽게 예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경험을 따를 수밖에 없지요. 대통령을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세력을 보는 것이지요. 민주당을 믿을 만한 일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그 난리 친 진보정당을 찍겠어요.
50대만 아니라 2030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우리만 아니라 20대 30대들도 불안하겠지요.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2~30대들은 불안하니까 문재인 후보를 찍었으리라고 봐요. 하지만 58년 개띠들이 90년대 말에 겪었던 단절의 기억은 뼈아픈 것이었답니다. 평생직장에서 임시직으로, 퇴직금도 중간정산으로 다 사라졌고, 집 한 채 가지고 있어봐야 그것도 불안하고,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수입은 줄고, 가장으로서 자식들 걱정은 더욱 심해지고, 이런 것들이 우리의 불안이랍니다. 청년들에게는 이러한 사실들이 단절이라기보다는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겠지요. 선배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억울한 현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이 서로 달랐던 것 같아요. 여러분은 미래의 변화를 위해 선택한 것이고, 우리는 과거의 경험으로 선택한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 일이 변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정치세력이 나와야 한다고 봐요. 보수는 대연합했어요. 앞으로 오래갈 겁니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겠어요. 그러니 최대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갈라서지 않고 현재의 체제를 공고하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다면 그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어찌해야겠어요. 반사이익만 얻으려 해서는 큰 코 다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봅니다. 그걸 이해 못 하면 예전 일본처럼 자민당 장기집권의 시대가 오겠지요.
[box type=”info”][알림] 본문에서 18대 대선의 출구조사결과의 수치 인용에 있어 ’40대 지지율’ 수치가 잘못 표시되었었습니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수치가 뒤바뀌어 표시되었는데 이를 정정했습니다. 최종 수정일시: 2013년 1월 14일 오전 11시 1분. [/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