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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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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을 해도 학교를 찾는 아이들
앞서 말씀드렸듯이, 태기산 화전마을은 지독한 ‘겨울왕국’이었습니다. 10월이면 눈발이 비치기 시작하여, 서둘러 김장을 준비해야 할 정도입니다. 방학도 그만큼 빨라집니다. 태기리 학교도 관계자 협의를 거쳐 11월 말로 첫 학기를 마치기로 합니다. 산골학교 처녀 선생님에게는 엉뚱한 한파 피해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노트나 편지글은 펜으로 잉크를 찍어 썼는데, 잉크가 꽁꽁 얼어서 펜이 안 들어가는 거예요. 평균적으로 영하 25도쯤 했으니까.”
그런데 방학을 하고도 아이들이 계속 등교를 합니다. 당시만 해도 방학이라고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가족문화’라는 것 자체가 생소한 시절이었지요. 겨울철 농한기임에도 남자 어른들은 자기들끼리 술추렴으로 어울리기 일쑤였고, 아주머니들은 친한 이웃집으로 끼리끼리 모여서 도란도란 겨울 수다를 즐기곤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무관심을 서운해 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산등성이로, 골짜기로 ‘무신경 해방구’에 아주 살판이 났더랬지요. 이야기 맨 앞부분에서 소개한, 태기산 아이들끼리 물푸레나무를 깎아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태기산표 지겟작대기 스키’도 있었고요. 학교는 저 개구쟁이들이 모여들어서 슬슬 눈을 맞추는 놀이패 집합소였던 셈입니다. 끼니 때를 잘 겨누다 보면 선생님 밥상에 살짝 끼여 앉는 행운을 맛볼 수도 있었고요.
그러고 보니 이명순 선생님도 이상합니다. 교사들이 다른 직업에 비해 질투 어린 시샘을 받는 가장 부러운 요소가 바로 방학이라는 특수성인데, 우리 처녀 선생님은 황금 같은 방학 기간에 왜 집에도 가지 않고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었을까요? 고향집 아버지의 함경도 쌍욕이 걱정되어서였을까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머릿속은 온통 ‘번듯한 학교 만들기’ 궁리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학교에 머무르는 낌새를 눈치 챈 아주머니들의 안타까운 부탁도 있었습니다. 당시는 남존여비의 편견이 심한 시대여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해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던 여성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태기리 주민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주머니들의 청으로, 학교 근처 ‘2반’의 한 집을 교실로 정해 ‘아주머니 미니 야학’이 탄생하였습니다.
“한글 모르는 아주머니들이 저녁 식사 후 4학년 진병호네 집에 모여서 두어 시간씩 가나다라 수업을 했어요. 다들 어찌나 열심인지 금방 이름도 쓰고 편지도 쓰고 그랬어.”
■ 태기산의 비밀 파티 ‘노루 바비큐’
처녀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올린 도움의 손길은 고등학교 때 신문배달로 인연을 맺은 ‘국민일보’[footnote]요즘 발행되는 국민일보가 아니라, 당시 강원도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발행하던 지역신문.[/footnote] 원주 지국장님과 육민관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그때 신문 보급소가 극장 건물 2층에 있었어요. 군인들 단체관람을 주로 하던 극장이었지. 한번은 어느 골목 집에서 신문 받아보던 매춘부가 나보고 “어린애가 신문 돌리는 게 불쌍하다”며 용돈을 주던 기억이 나네. 얼떨결에 받긴 받았는데 ‘누가 불쌍한 건가’ 싶은 생각을 했었어.”
처녀 선생님은 두 분 은인을 찾아뵙고 이런저런 상의를 합니다.
“두 분이 많이 도와주셨지. 특히 육민관 설립자 홍범희 선생님은 나중에 국회의원을 12년이나 할 정도로 지역 유지여서 인맥이 좋았어요.”
감사의 뜻으로 멋진 파티도 준비를 합니다. 당시 태기리 마을은 하도 형편이 궁핍하여 김장 김치조차 제대로 담가 먹지 못하는 지지리 궁상의 처지였지만, 거꾸로 산 아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태기산 주민들만의 호사가 있었습니다. 올무와 덫, 구덩이 함정 등으로 사냥하는 노루와 고라니, 멧돼지, 토끼 따위가 여간 풍작이 아니었습니다.
“큰 짐승이 잡히면 사냥한 사람들끼리 고기를 나누기도 하고, 가끔은 공터에 불판을 만들고 나무로 틀을 세워서 요즘 ‘바베큐’처럼 통째로 구워 잔치를 벌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노루나 멧돼지가 걸리면 통구이 준비를 해달라고 돈을 좀 주고 부탁을 했어. 그리고는 선생님들을 초대했어요. 너무들 좋아하셨지. 친구들도 불러서 함께 놀러오기도 하고…. 나중에는 ‘노루 잡힌 거 없냐’고 물어보시더라니까.”
■ “주문진 읍장님 : 중고 신발 10켤레”
먼저 지국장님의 주선으로 ‘산골학교’ 이야기가 국민일보에 실렸습니다. 곧 이어서 다른 신문들에도 ‘산골학교’ 이야기가 이리저리 옮겨 다닙니다. 얼마 후에는 원주 KBS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며칠 동안 찾아와서 카메라를 막 여기저기 들이대며 취재를 하고, 인터뷰를 하는데…, 아유,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근데, 재밌었어요. 아이들도 신나하고.”
‘태기리 화전마을 산골학교’ 이야기가 방영되자마자 난리가 났습니다. 성금과 위문편지, 각종 구호품들이 무더기로 밀려들었습니다. 학용품과 문방구들 말고도 쌀·보리 등 양곡류, 신발·장갑·모자 등 의류, 고무장갑·가위·재봉틀 따위 생활용품과 의약품 등 다양한 정성들이 답지합니다. 농구공, 배구공, 네트 같은 운동기구도 갖게 됩니다.
한번은 탁구 라켓을 무더기로 보내주어서, 태기산 아이들이 도회지 아이들보다 탁구를 훨씬 더 많이 즐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해드렸고요. “선생님 때문에 저는 죽을 것만 같아요”라고 원망을 토로하며 자전거를 힘겹게 끌고 가던 우체부의 표정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받았던 위문품들을 시시콜콜 육필로 정리한 일지의 한 페이지가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맨 처음 받았던 위문품 목록 몇 줄을 참고삼아 추려서 정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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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위해 들어온 것 (기부)
1966년
- 1월 2일: 둔내국민학교 교감선생님께서 노트 40권, 교과서 450권, 백묵 2통, 교육청 칠판 대형 1개, 시험지 1권, 출석부/학교일지, 교과서 150권, 갑천면 현금 100원, 이서기 칠판 소(小) 1개
- 3월 28일: 원주 육민관고등학교/범문중학교 학생 일동 노트 90권, 연필 140자루, 칼 11개, 고무 7개
- 4월 15일: 경북 울진군 울진면 읍내리 김영자 씨 소포로 노트 40권
- 4월 22일: 갑천국민학교 교과서 194권
- 5월 5일: 둔내 면장님 노트 70권, 연필 7타스
- 5월 28일: 주문진 읍장님 연필 OO자루, 중고 신발 10켤레, 헌책 등, 갑천 감리교회 복음명작동화 30권
- 5월 13일: 황호현 영감님[footnote]당시 횡성 지역 국회의원.[/footnote] 연필 10타스
- 6월 18일: 횡성군 여직원 일동 칼 130개, 연필 11타스
- 6월 20일: 송림상회 모자 38개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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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학교 이야기가 다른 신문에 새로 실릴 때마다 위문편지와 성금, 구호물품들이 바리바리 산을 올라옵니다. 놀 궁리로 방학도 무시하고 학교로 모이던 개구쟁이들이 이제는 구호물품을 정리·분류하고 사람 수에 맞추어 집집마다 나누어주는 봉사단원들이 되었습니다.
■ “그래. 우리 서로 ‘동지’라고 합시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1월 중순 어느 날 처녀 선생님은 대두병(大斗甁)[footnote]한 되를 받을 수 있는 분량의 병.[/footnote]으로 꿀을 한 병 준비하여 새벽부터 길을 나섰습니다. 춘천으로 도청을 찾아가 도지사님을 만날 작정입니다. 하필이면 눈치 없는 눈이 간밤에 가슴 높이로 쌓였습니다. 눈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린다고 녹아줄 눈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쌓이면 진짜 낭패입니다. 어깨로 한쪽씩 눈을 밀어가며 갈지자(之字)로 길을 뚫고 나아갑니다. 잔 다르크 선생님의 뚝심을 막아설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직원이 또 이것저것 물어봐. 어디서 왔느냐, 누굴 만나러 왔느냐, 약속은 했느냐……. 그런데 다행히 그 날은 운이 좋았어요. 3시간쯤 기다리니까 들어오라 그래. 도지사님이 신문에서 태기산학교 이야기를 읽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직원들 책상이 죽 늘어선 사무실을 지나서 안쪽 방으로 가니까, 생전 처음 보는 가죽의자가 있어. 아주 반짝반짝해. 아, 도지사는 이만큼 높구나 싶어서 내심 긴장이 되데요. 그래 잔뜩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옆문이 열리더니 멋진 신사분이 성큼 다가오시면서 커다란 손을 쑥 내미는 거라.”
당시 도지사는 박경원. 의외로 이야기가 술술 풀렸습니다. 강원도 지역에서 활발했다는 상록수 운동 ‘동각(同覺)’이 의외의 매개가 되어주었습니다.
“동각을 하셨다고? 나도 동각을 했지. 그래, 우리 서로 ‘동지’라고 합시다. 이동지! 학교 짓는 거, 좋지. 그런데 알다시피 예산이 문제라…….”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미국의 구호단체 케어[footnote]세계빈곤퇴치 국제원조구호기구 CARE : Cooperative for Assistance and Relief Everywhere.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교전국의 국민을 구제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 민간구호단체. 뉴욕에 본부가 있다.[/footnote]를 찾아가보라고 추천을 해주었습니다.
“특정 학교에만 예산을 지원해주면 다른 데서 말들이 많아요. 그런데 케어 같은 미국 단체의 원조 승낙을 받아오면, 도에서 예산 풀기가 좋지. 아, 서울 갈 때 신문 꼭 챙겨가고. 이동지 이야기 대문짝만 하게 실린 걸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