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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 부자가 되는 한 가닥 비밀통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들 합니다. 오죽하면 한 평생 살아내는 ‘한살이’를 두고 ‘고통의 바다’라고 표현했을까요. 하물며 척박하기 짝이 없는 ‘태기리 화전농장’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겠지요. 그런데 인생사 신기한 것이 궁즉통(窮則通)이라. 저 궁핍한 태기리 화전마을에서도 부자가 되는 한 가닥 비밀통로가 숨겨져 있었더랍니다.

땅을 파내고 나무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초기 움막집에서 시작하여, 매일 나무를 베어내고 골짜기에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며 일당으로 밀가루를 타서 목구멍을 속이는 일일생활자들이, “나중에는 밀가루에서 비린내가 나더라”는 절대 곤핍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돈을 모아서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저렇게 일군 땅도 경작권만 있을 뿐, 소유권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는데 말이지요.

태기산 전경

태기산 전경

비결의 첫 실마리는 약초 재배였습니다. 개간한 계단식 화전의 경작권을 나누어주는 데까지가 정부의 역할이었다 합니다. 개간이 끝나면서 밀가루며 깡통 분유 등의 배급도 종결됩니다. 누구네는 감자·옥수수·배추 같은 고랭지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약초를 심습니다. 여기서 1차로 승패가 갈립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태기산은 감자·옥수수·배추 같은 고랭지 농사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콩이며 고추 같은 환금성 작물도 맥을 못 추었고요. 많은 사람들이 지독한 추위와 짙은 안개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천궁(川芎)·당귀(當歸) 등이 가장 많이 재배된 약초였습니다. 단삼(丹蔘)·만삼(蔓蔘)·사삼(沙蔘) 같은 인삼 사촌들도 효자 노릇을 하였고, 백출(白朮)·속단(續斷)·진범(秦汎) 따위 이름도 낯선 약초들이 태기산의 정기를 흠뻑 받고 자랐다지요. 저렇게 재배한 약초들과, 산에서 채취한 다른 약초들을 일 년 동안 꾸덕꾸덕 말려서 다발로 포장을 해두면, 봄마다 약초 상인들이 줄지어 태기리를 찾아왔다 합니다.

“돈 굴러오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씨 살 돈이 없어서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어요. 약초 공부도 해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 “소를 타고 앞장서면 동네 소들이 줄줄이…”

그렇게 시나브로 1차 빈부게임의 결과가 나뉘어집니다. 그래도 약초만으로 어디 부자가 쉽게 될 수 있나요. 그랬다면 대학에 ‘심마니학과’라도 생겼겠지요. 또 하나의 비결이 바로 ‘소’였습니다. 태기리 화전 개간 2~3년쯤 되면서 몇몇 집에서 송아지를 사다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목재가 지천이었으므로, 집 뒤켠에 붙여서 외양간을 이어 짓는 건 일도 아니었지요. 차츰 송아지를 키우는 집이 늘어갑니다.

“옆집 최 씨네는 40마리도 넘게 키웠어요. 차도 제일 먼저 샀지. 아마 태기리 최고 부자였을 걸.” (최개동)

인터뷰한 사람들 가운데서만도 소를 십여 마리 정도 키웠다는 분들이 꽤 여럿이었습니다.

“집집마다 다들 한두 마리는 키웠어요. 우리 집도 너댓 마리는 길렀고”(구종호).

마릿수가 늘어나면서 집단 방목으로 축산 방식이 바뀌어갑니다. 외양간에서는 기본 끼니와 겨울철 쇠죽을 쑤어 주는 정도였고요. 소떼 관리는 자연스레 아이들 몫이 되었지요. 아침 일찍 소를 몰고 나가서 밤 되기 전에 돌아오는 목동의 생활, 공부 재촉도 지청구도 없으니 아이들 입장에서도 천국 같은 시절이었을 터이고요.

“늦은목 방면 골짜기로 가려면 소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서 갔어요. 우리도 일곱 마리 키웠고. 그러면 내가 소를 타고 앞장을 섰어요. 뒤로 동네 소들이 줄줄이 따라오고.”

어느 날 문득 소가 타고 싶어져서 고삐를 잡고 올라타려는데, 어찌나 펄쩍거리던지 크게 차일 뻔했던 기억이 짜릿하다는 이상은 씨.

“그래서 마음먹고 볼 때마다 달래주고 자주 긁어주었더니, 나중에 타도 그러려니 해요. 훗날 기타를 배운 뒤로는 소 등에서 고즈넉이 기타를 퉁기고 노래도 부르고.”

횡성 한우 축제장

횡성 한우 축제장

■ 폭설 내리면 소들이 뿔로 길을 뚫어

해발 1,200m 고지대, 차도 경적 소리도 없이, 오직 태기리 주민들만 계단밭을 일구며 사는 고요한 산간마을. 소들도 태평하게 자율 방목의 경지에 눈을 뜹니다.

“처음에는 멀리 골짜기로 몰고 가서 줄을 나무에 매어놓았는데, 어쩌다 줄이 풀려도 도망을 안 가요. 그냥 자기들끼리 어울려서 실컷 풀을 뜯어먹더라고.” (박동호)

“우리도 열댓 마리쯤 길렀어요. 게다가 우리 암소가 우두머리였어요. 우두머리 소를 끌고 가면 우르르 다들 따라와요. 그래서 널찍한 곳에 매어두었다가 데리고 오면 끝이에요. 동네 소가 다 우리 암소를 따라다녔지. 한 번은 우두머리 고삐가 풀렸는지, 해 질 녘에 자기들끼리 어울려서 동네로 돌아오는 거라. 소들이 다들 알아서 제 집으로 찾아 들어가요. 그래서 나중에는 고삐를 두 뿔 위로 둘둘 감아서 묶어둔 채 그냥 풀어놓고 키웠어요.” (이봉선)

태기리의 방목은 겨울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눈이 오면 보통 지붕까지 덮을 정도로 쌓여요. 그 사이로 길을 뚫어주면 우르르 나가서 자기들끼리 골짜기를 찾아가. 나중에는 그냥 자기들이 눈 속을 뿔로 밀고가면서 길을 뚫기도 하고요.” (김광일)

태기산 골짜기에는 유난히 산죽(山竹)이 많았는데, 소들이 특히 눈 위로 삐져나온 조릿대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농사짓다 남겨놓은 무 대가리도 최고급 식사였고요.

“산죽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소들마다 털에 기름기가 자르르 돌았어요. 보통 소들 엉덩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똥딱지도 없이 매끈하게.”

태기산 산죽

태기산 산죽

저녁이면 자기들이 알아서 마을로 돌아옵니다. 그리곤 각자 자기 외양간을 찾아 돌아갑니다. 참 똑똑한 소들입니다.

“안 오면 발자국 보고 찾으러 가는데, 새로 눈이 내려서 흔적이 덮이면 골치 아프지. 그래도 워낭소리 들어가면서 다 찾았어요. 안개가 심한 날은 못 찾고 이튿날 가서 찾기도 했고요.” (함재문)

■ 벼랑에 떨어져 죽은 송아지도 여러 마리

해마다 송아지를 한두 마리씩 늘린 집도 있었고, 남의 집 송아지를 몇 년 위탁받아 길러주면 새로 낳은 송아지 한 마리를 대가로 받기도 했다 합니다. 자격증은 없었지만 ‘야매 수의사’ 노릇을 맡았던 소 전문가도 있었습니다. 이상은씨의 선친은 태기산 아래 둔내 우시장에서 소 중개상을 오래 하셨는데, 소에 관해서는 어지간한 질환은 직접 치료를 하였다 합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광우병이라는데, 소가 빌빌대면서 자꾸 쓰러지려고 해요. 그러자 소 입을 벌려보고 눈꺼풀을 까보고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어디서 뱀을 한 마리 구해 와서는 껍질을 벗기고 약초에 싸서 소에게 먹이는데, 진짜 빌빌대던 소가 쌩쌩해지는 거예요. 구제역도 금방 치료했어요. 발굽이 썩어서 고름이 줄줄 흐르는데, 숟가락 자루를 뾰족하게 갈더니 침을 만들어서 고름을 빼고는 보리밥과 약초를 함께 다져서 고름 뺀 자리에 붙여요. 그러면 며칠 사이에 소가 멀쩡하게 걸어다녔어요.”

태기리가 가장 활발했을 당시 전체 가구 수가 120호에 달했으니, 넉넉잡아 집집마다 평균 두세 마리로만 계산을 해도 대략 240~360마리의 소가 태기리 골짜기에 방목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엄청난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처럼 멋들어진 장관이 사진 한 장 없이 말로만 전해집니다. 카메라가 귀한 시절이기도 하였고, 방목지가 서너 곳(지금의 태기산 정상 휴게소에서 반대쪽인 늦은목 방향 북서쪽 골짜기들과, 산 중턱의 태기산성과 돌문 주위로 널찍하게 발달한 골짜기들)으로 나뉘어져 웅장한 소떼들의 풍경이 실감나게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횡성한우 (설성목장)

횡성한우 (설성목장)

사실 태기산은 소를 방목할 만한 목장지로는 매우 위험한 지형이었습니다. 중간중간 평평한 골짜기가 발달해 있고, 수풀이 우거지고 각종 약초와 억새·산죽 등 식용 식물이 무성하다는 점은 빼어난 장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골짜기 가장자리는 대부분 깎아지른 벼랑처럼 위태로운 지형이에요. 그래서 실족 사고로 죽은 송아지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렸다 합니다.

“한 번은 송아지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어요. 아버지 고향이 이북인데, 송아지 고기를 날로 장에 묻어서 장아찌로 만든 이북식 음식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김광윤)

마을에서 멀어 떨어진 곳은 멧돼지와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위험한 지역이었지요.

“아버지께 들은 이야긴데, 하루는 산에서 호랑이랑 딱 마주쳤는데 오금에 힘이 풀리면서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요. 그 상태로 눈을 부릅뜬 채 낫인지 삽인지를 움켜쥐고 호랑이를 노려보았대요.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호랑이가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그래도 다리가 풀려서 다섯 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다 하고요.” (최개동)

호랑이 이야기는 조금 묘합니다. 목격담은 꽤 여럿 있는데, 피해 사례나 피해 목격담은 없습니다. 호랑이 피해로 짐작되는 사례 하나만 소개합니다.

“어느 날 송아지가 없어졌어요. 벼랑에 떨어져 죽은 적도 있어서,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떨어진 흔적이 없어요. 며칠 찾다가 포기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다들 호랑이가 물고 갔나보다 그렇게 생각들을 해요.” (김광일)

어쨌거나 가난과 궁핍으로 지친 ‘겨울왕국’ 태기리에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준 꼬마 목동들의 100% 친환경 순수 방목 한우목장. 이곳에서 꼬마 목동들과 어울려 자란 소들은 ‘태기리 약초 한우’라는 칭송과 함께 명품 대접을 받습니다. 당시 태기리 한우는 주로 태기산 아래 ‘둔내 우시장’에서 거래되었는데, 한창때에는 둔내 우시장이 횡성읍 우전(牛廛)보다 규모가 커서 “강원도에서 소가 가장 많이 모이는 장”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한우축제’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횡성 한우의 뚝심이 저 시절, 태기산 약초 한우의 정기를 이어받은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횡성 우시장에 나온 소

횡성 우시장에 나온 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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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송준
초대필자. 작가. 건축 칼럼니스트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글쓰기를 시작해 어언 30년째 글밥을 먹고 있다. 1995년 무렵부터 건축 분야를 맡게 되면서 늦깎이로 독학의 계단을 올랐다. 『공간Space』, 『건축인Poar』, 『플러스Plus』 같은 건축 전문지에 인터뷰 원고와 리뷰·건축 칼럼을 썼고, 집도 직접 두어 채 지어보았다. 2010년에는 서울시가 주최한 [서울건축문화제Seoul Architecture Festival]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저서로 영국 건축문화기행 『건축의 표정』(글항아리, 2017)과 예술인 에세이 『바람의 노래』(동녘, 2010), 영화 이야기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심산, 20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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