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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11.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12.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13.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14.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15.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16.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17.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18.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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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분교 신축을 위해 신설한 도로
태기분교 신축을 위해 신설한 도로

 

■ 군부대와 태기리의 빛과 그림자

태기분교 신축으로 도로가 뚫리면서 태기산 정상으로 경비부대와 통신부대, 2개의 군부대가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내친 김에 도로를 넓히고 부분 포장까지 하고는, 이내 트럭들과 통신장비 차량의 출입이 빈번해집니다. 태기리 아이들에게 군부대는 새로운 추억의 마당이 됩니다.

“심심하면 트럭 뒤 얻어 타기도 하고, 놀러 가서 라면도 얻어먹고 그랬지. 통신부대 무전기로 노래자랑도 하고. 산꼭대기 군인들이 심심해 죽을 판에 애들이 놀러 와서 재롱을 떨어주니 반가운 거지.” (최춘수)

“테레비로 유재두 권투 중계도 보고, 전국노래자랑도 보고 그랬어요. 배터리로 보는 흑백 미니 테레비가 있었는데, 세 사람이 있어야 볼 수 있어요. 한 사람은 안테나 들고 전파 잡히는 방향 찾아다니고, 한 사람은 테레비 채널 돌리면서 전파 확인하고, 또 한 사람은 ‘쫌만 더 가봐’ ‘아니, 왼쪽으로’ 이러면서 조정해주고…….” (이기운)

그런데 군부대의 존재는 의외로 태기리 아이들의 인생에 긍정으로든 부정으로든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호르몬 과다 분출을 의식한 뜬소문이었습니다. 군대라는, 기운 뻗치는 장정들로 가득한 남초(男超) 지역. 그리고 방임하다시피 무방비로 웃자란, 호기심 만발하는 태기리의 여자애들. 마을 여기저기에서 여자애들 걱정하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반대로 당당하게 태기산에 근무하던 군인들과 결혼하여 마을을 떠나는 여자애들도 적지 않았고요.

“통신부대는 전문기술이 필요하다 보니, 지원병이 많았어요. 대학생 군인도 많았고. 그 대학생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태기리 청소년들을 상대로 중학교 과정 영어·수학 등 야학을 열어주었어요. 밤에 마을회관에서 호롱불 켜놓고…. 누가 제대를 하면 다른 군인이 새로 교대를 하며 꽤 여러 해 동안 수업을 해주었지요. 군부대 의료진들이 가끔 의료봉사를 해주기도 했고.” (박동호)

태기리 마을에 처음으로 구멍가게가 생긴 것도 군부대 덕분이었습니다.

“처음에 하사 가족이 구멍가게를 내고 몇 년 하다가 나중에 마을에서 공판장으로 이어받았어요.”(이기운)

처녀 선생님은 통신부대 소대장 부인들과 작은 사교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어떤 소위가 종친이라며, 항렬(行列)로 아줌마뻘 된다고 ‘아줌마, 아줌마’하고 부르면서 자주 찾아왔어요. 딸린 애기도 있고, 어울릴 사람들 별로 없고, 그러니 소위 부인들이 자주 들러서 같이 음식도 해먹고, 수다도 떨고 그랬지.”

■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는데

학교가 정식으로 개교를 하면서 새로 선생님들이 부임을 해왔습니다. 처음엔 혼자서, 다음엔 둘이서 1·2·3학년과 4·5·6학년으로 나눠 맡던 궁벽한 학교 살림이 교실 4개짜리 학교로 곱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섯 학년을 네 개 학급으로 나누는 건 어떻게 한 걸까요? 조금 궁금하지요? 그건 이렇습니다. 정신없는 와글와글 1학년 따로, 공부에도 진학에도 집중이 필요한 6학년 따로, 그리고 2·3학년과 4·5학년 분반(分班).

이제 학교도 나름 기틀을 잡아가고, 뭔가 신나는 발전이 시작될 장면인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학교도, 아이들도 생기를 잃게 되는 역효과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훗날 동창회 모임을 주도한 이상은 회장(61)의 회상이 당시 산골학교의 이면을 냉철하게 정리해줍니다.

처녀 선생님은 태기분교를 세운 설립자였지만, 임용고시를 통과한 정식 교사가 아니었으니까요. 학교가 정식으로 개교를 하니까, 정식 교사를 보내야 하는 상황인데, 어떤 교사가 교통도 숙박도 먹통인 산꼭대기 분교로 가고 싶겠어요. 결국 이래저래 책잡힌 사람의 징계성 발령이나, 끝수에서 밀리는 ‘줄 없는’ 교사들의 좌천성 부임이 된 셈이죠. 폐교 때까지 10여 분이 다녀가셨는데, 두세 분 말고는 열의가 전혀 없었어요. 애정도 없고, 성실하지도 않고, 그냥 ‘시간만 때우자’는 느낌이었어요.”

행복했던 수업 풍경
행복했던 수업 풍경

그런데 당시 태기분교의 분교장(分校長)은 임용고사 합격증이 없는 이명순 강사(당시 개교 관련 기사들에서 ‘정호봉 교장’이라는 표기가 자주 보이는데, ‘나이 지긋한 좌장(座長) 남자 선생님이 교장일 것’이라 짐작한 선입견 성향의 오보(誤報)). 그동안 산골학교의 설립에서 신축까지 온갖 일을 도맡아 처리해온 사람으로서, 업무의 효율성 및 일관성에서 분교장은 이명순 설립자가 적임으로 보입니다. 전국에서 답지하는 온갖 위문품과 위문편지의 수신자이고, 도청·군청·교육청 등에서 행정적으로 업무가 발생하였을 때 ‘0순위’로 찾는 담당자이자 책임자가 바로 처녀 선생님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새로 부임한 ‘정식 합격증’ 교사들에게는 무언가 못마땅한 상황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분교장이 ‘교사 자격증’도 없고, 나이도 어리고, 심지어 여자(남존여비(男尊女卑 )분위기가 강한 시대)이고…. 그렇다고 임기 채우고 떠날 사람에게 분교장을 맡기는 것은 너무 불합리한 모양새가 되겠지요. 결국, 모든 실무는 다시 ‘처녀 선생님’에게 ‘지시’로 내려올 테니까요.

그러면서 학교 분위기는 묘하게 꼬여갑니다.

“자네 ‘분교장’은 ‘어른 장(長) 자’가 아니라 ‘마당 장(場) 자’여. 마당 장.”[footnote] ‘분교장(分校長)’은 ‘분교(分校)의 책임자’라는 뜻의 단어이고, ‘분교장(分校場)’은 ‘본교와 떨어진 다른 지역에 따로 설치하여 가르치는 곳’이라는 뜻의 별개 단어이다. 한자를 가지고 처녀 선생님을 낮춰 대하려는 농담을 한 것이다.[/footnote]

그중 편하게 지낸 정호봉 선생님이 웃으며 건넨 농담이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아서 힘들다고 드러누운 채 ‘이선생, 나 물 좀 떠다줘’…, 이런 적도 많았어요.”

고진감래, 교육장 표창장(1968)
고진감래, 교육장 표창장(1968)

■ 학생들도 울고, 선생님도 울고

“‘공연히 산꼭대기에 학교는 만들어가지고 이런 고생을 시키나’ 싶은 생각들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중에는 소사(小使 )[footnote]관청이나 회사, 학교,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footnote]취급을 하지를 않나, 대놓고 깐족거리고, 무시하고, 따돌리고….”

설립자와 신규 부임 선생님들 사이는 점점 더 헝클어집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30대 초반 총각 선생님의 주사(酒邪)까지 벌어집니다. 처녀 선생님의 고민이 깊어갑니다. 처음에는 옆집 사는 최춘수, 늦은목 제재소 아들 이성준 등에게 눈치를 줘서 방패막이를 해보지만, 주사가 영 불편합니다. 학교가 정식으로 자리를 잡은 뒤로는 주민들이 학교 일에 함부로 너나들이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게는 가재 편’인 건지, 나날이 영 가시방석입니다.

“그때는 궂은 소문나면 시집도 못 가던 시절이에요. 내가 이러려고 학교를 세웠나 하는 자괴감이 들고…….”

결국, 처녀 선생님은 69년 겨울방학을 끝으로 70년 2월에 사표를 내고, 3월 개강일 아침조회에서 이임사를 합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됩니다.

“갑작스런 이임사에 학생들도 울고 선생님도 울고…. 선생님 떠나신 뒤로 수업이 영 재미없어졌어요. 학교 전체가 생기를 잃고 시들해지더니, 몇 년 뒤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이상은)

해발 1,200m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하늘 아래 첫 학교’는 65년 10월 1일 횡성군 갑천면 ‘봉덕국민학교 태기분실’로 문을 열었다가 73년 7월 1일 태기리 화전마을의 행정구역이 갑천면에서 둔내면으로 전환되면서 ‘덕성국민학교 태기분교’로 소속이 바뀌었고, 76년 4월 30일 8년 만에 영구 폐교되었습니다. 횡성군이 생긴 이래 최초의 폐교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하늘 아래 첫 학교’ 폐교를 다룬 기사에 재고할 만한 대목이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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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생들 대부분이 도시 구경 한 번 해보지 못했고, 심지어 돈을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어린이가 많다. 화전민 자녀의 특수한 내성적 성격 때문에 교육상 어려움이 많다’고 이 분교를 거쳐 간 교사들은 입을 모은다.”(‘경향신문’  1976년 4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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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교를 거쳐 간 교사들’과 ‘태기리 화전마을 아이들’의 심리적 ‘크레바스’[footnote]크레바스(crevasse):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footnote]가 이다지도 딴판이었습니다.

즐거운 율동시간
즐거운 율동시간

산꼭대기 미니학교의 내막을 알 길 없는 기자는 그날 만난 교사들의 인터뷰 대사를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실은 듯합니다. 이어지는 인용구는 ‘분교를 거쳐 간 교사들’의 견해를 전해들은 당시 횡성군교육장의 ‘확증편향’[footnote]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footnote]을 한 번 더 확인시켜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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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를 불과 며칠 앞둔 지난 17일 채규대 횡성군교육장이 이 분교에 들려 학생들을 모아놓고 위로하며 과자 한 통씩을 선물로 주자 산골 어린이들은 부끄러워 받지 못하고 달아나는 등 도시 아동들과는 극히 대조를 보였다. 채교육장은 ‘이들 어린이가 앞으로 부모들을 따라 하산, 타교에 편입될 경우 환경 적응이 큰 문제’라면서 ‘화전민 자녀들에 대한 교육상의 문제점을 재검토해야겠다’고 말했다.”(위 ‘경향신문’ 같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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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교육 기사
횡성교육 기사

■ 떠날 때는 말없이

학교를 그만둔 이명순 선생님은 이후 아이들 과외수업을 하다가 1년 뒤인 71년 2월 중매결혼을 하고, 교육자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갑니다.

태기리 화전마을도 사양길로 접어듭니다. 전성기 때 120가구(주민 수 4백여 명, 태기분교 학생 수 150명)에 달했던 화전마을은 결국 문을 닫고 맙니다. 편평한 태기산 고원의 지형을 활용한 약초단지는 강추위와 짙은 안개 등 기후가 맞지 않아 실패하였습니다. ‘65 화전민 집단농업단지’ 프로젝트를 위해 태기산 정상을 불태워 대대적으로 화전을 만들기 시작한 지 5~6년 만에 빗물에 씻겨 내린 토사가 하류의 강들을 메워 심각한 생태변화를 일으킨 것도 주요 문제가 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72년부터 단호하게 ‘화전금지’ 발표를 하고, 태기리 주민들에게 40만 원씩(요즘 시세로 대략 5천만~1억 원 사이) ‘이주지원금’을 제안하면서 ‘태기리 마을 철거’를 추진하였습니다. 이주 시작 초기부터 태기산 화전 계단밭과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산림녹화를 위해 일당 700원(요즘 시세 10만 원 내외)을 걸고 일괄적으로 잣나무를 심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태기산 정상부의 겨울철 항공사진이나 드론사진을 보면 다양한 수종이 자연스럽게 어울린 지역과 유독 잣나무가 밀집하여 푸르른 지역이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 시퍼런 잣나무 지대가 바로 아름드리 원시림을 불태워 만든 태기리 화전의 영역입니다.

잣나무 무성한 지역이 전부 태기리 화전 영토
잣나무 무성한 지역이 전부 태기리 화전 영토

태기산 약초단지의 실패로 앞날이 막막하던 사람들은 이주지원금에 희망을 걸고 차례로 자리를 뜹니다. 73~74년에 엑소더스(exodus)[footnote]사람, 자금 따위가 어떤 지역이나 상황에서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일.[/footnote]가 절정을 이루었고, 76년 4월 30일을 기점으로 마침내 태기리는 행정구역으로만 존재하는 ‘무인(無人) 법정리(法定里)’[footnote]실제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법으로만 정해진 행정구역으로서의 리(里).[/footnote]가 되어, 옛 주민들의 가슴 속에 추억의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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