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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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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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 시큰한 감동의 입학식

1966년 3월 15일 태기산 산마루에서는 눈물 시큰한 감동의 입학식이 열립니다.

지난해(1965) 9월부터 주민들을 설득하여 10월 1일 학생 8명을 모아 첫 수업을 하고, 10월 5일 학교 인가를 받고, 11월 말 방학을 하였으니, 휴일 빼고 수업일수 50일을 겨우 넘긴 산골학교의 새 학기 입학식에 72명의 학생들이 와글와글 모였습니다. ‘본가’에 해당하는 봉덕국민학교에서 정덕영 교장선생님이 왕림하여 멋진 축사로 격려를 해주시었고, 군수님과 경찰서장, 도 교육청 관계자 등도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태기산에는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었어요. 무슨 피난민 행렬 같았어. 보따리를 이고 지고 애 업고 손 붙들고 사람들이 날마다 계속 올라와.”

그렇게 불어나는 신입 주민의 아이들이 추가되면서, 보름 뒤인 4월 1일에는 봉덕국민학교 태기분실 학생이 84명이 되었고, 가을에는 105명으로 늘어났으며, 2년 뒤에는 최대 150명을 기록할 정도가 됩니다.

■ 아이들의 천국, 천막학교 해방구

마침 입학식에 참석한 경찰서장님이 마을회관 구석에 딸린 ‘거적문 교실’을 보시고는 “야, 이건 좀 너무하구나” 하십니다. 요행히도 경찰서에 여분의 천막이 있었다 합니다. 덕분에 마을회관 앞 길 맞은편의 맞춤한 평지에 30평쯤 되는 ‘천막교실’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을회관이라는 공간의 특성과 관련하여, 미묘한 갈등이 막 생겨나던 참이었습니다. 말이 학교이지, 교실도 책걸상도 무슨 시설이랄 것도 없이 마을회관 구석의 임시 공간을 빌려 칠판만 덩그러니 걸어둔 모양새다 보니, 주민들도 아이들도 은연중에 서로 불편한 상황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술자리 문제가 심각하였습니다. 마을에 이렇다 할 편의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보니, 몇몇이 술잔이라도 기울이려면 무심결에 남정네들의 걸음이 마을회관으로 모이게 되는 까닭이었지요. 애초 마을회관의 터줏대감은 ‘주사파’ 주민들이었으니까요.

어른들과의 미묘한 분위기를 의식하여, 날씨라도 좋은 날이면 처녀 선생님과 아이들은 공터나 뒷산의 아름드리 나무 아래를 찾아가 동화도 읽고, 노래도 부르며 소풍 같은 수업을 하였다지요. 그마저도 바람이 차가워지고 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영 답답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른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놀고, 노래하고, 소리치며 까불 수 있는, 온전히 아이들이 주인인 ‘해방구’가 생긴 것입니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시끌벅적 이사를 합니다. 이사래야 칠판 옮기고, 문방구들과 잡동사니 짐 꾸러미 조금 옮기면 그만인 소꿉놀이 수준이었지만 말이에요.

‘셋방살이’에서 탈출하였으나 산골학교의 실상은 여전히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30평 널찍한 천막 바닥에는 줄 맞추어 가마니가 깔려 있습니다. 구석에는 사람들이 보내준 교과서와 공책들, 학용품과 구호물품들이 정리된 채 쌓여 있습니다.

태기리의 3월은 아직도 한참 ‘겨울왕국’입니다. 눈보라가 매섭게 천막학교의 문틈을 파고듭니다. 구석에 정리해둔 교과서와 위문품들이 돌풍에 휙 넘어갑니다. 정 추위에 쫓기는 날은 돌아가면서 빈 집을 물색하여 구들에 장작을 지펴 넣고 수업을 하기도 하였답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책상입니다. 그동안은 가마니 위에 학년별로 줄지어 방석을 놓고 무릎 꿇고 앉아서, 허벅지 위에 공책을 올려놓고 책상을 삼았다 합니다. 간혹 사과 궤짝 위에 달력종이를 붙여서 책상을 삼은 아이도 있었고, 아버지가 잣나무 토막을 엮어서 만들어준 책상을 짊어지고 와서 사용하는 학생도 있기는 하였습니다.

소꿉놀이 같은 학교생활이 궁금하였는지, 호기심에 어른들이 천막학교 안을 힐끗힐끗 들여다봅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도 천막학교의 썰렁한 가마니 바닥이 안쓰러웠던 모양입니다. 마을 목수님 한 분이 통나무를 제재하고 남은 죽데기[footnote]통나무의 표면에서 껍질째 잘라낸 널조각.[/footnote] 가운데 쓸 만한 것들을 추려서 앉은뱅이책상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일인용 책상이 아니라, 서너 명이 함께 사용하는 길쭉한 책상입니다. 죽데기 책상을 가지런히 줄 맞추어 놓으니, 어느덧 그럴듯한 교실의 분위기가 풍겨나는 것이었습니다.

■ 아이들은 ‘보물찾기의 달인’

5월에는 봄 소풍이 있었습니다. 아, 틈만 나면 공터랑 뒷산에서 ‘소풍 같은 수업’을 하였다면서 무슨 소풍을 또 가느냐고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초청 소풍’인 셈이지요. 본교 정덕영 교장선생님이 ‘이제부터 소풍에 꼭 참가하라’고 새로 태어난 ‘막내 분교’를 묵직하게 힘주어 챙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산골학교 아이들은 산 아래 본교의 소풍에 ‘꼽사리’를 끼는 조금 이상한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선생님하고 아이들이 아침 일찍 천막학교에 모여서 산등성이를 따라 두세 시간을 걸어서 본교로 합류합니다. 어깨에서 허리로 가로질러 맨 보따리에는 김밥과 감자버무레기, 도토리가루로 앙꼬를 삼은 찐빵 따위가 따끈따끈하게 등을 간지럽혀주었지요.

본교 학생들 소풍 행렬의 앞머리는 진작 출발해서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분교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본교 소풍 행렬의 꽁무니를 잇습니다. 걷는 거리로 따진다면, 산골학교 아이들은 하루에 소풍을 두 번 간 셈이 됩니다. 태기산에서 산 아래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서 본교에 합류한 뒤, 다시 두세 시간을 걸어서 소풍을 갔으니까요.

“멋진 폭포 아래로 소풍을 갔어요. 아, 가물가물한 게 폭포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아이들끼리는 본교와 분교 구분 없이 잘 어울렸어요. 그런데 눈치도 없이 우리 아이들이 보물찾기의 보물을 다 찾아버린 거예요. 어렵게 자라서 몇 년씩 늦게 학교를 다니다 보니 나이들을 많이 먹어서 요령을 먼저 익힌 탓인 게지. 본교 아이들이 양보한 느낌도 들고. 아마 선생님들이 언질을 주신 게 아닐까 싶어.”

■ 잔 다르크 선생님의 우공이산

[footnote]우공이산(愚公移山)은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고사성어로서,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서 유래한다. 중국 북산(北山)에 살고 있던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집을 가로막고 있던 ‘태행(太行)’과 ‘왕옥(王屋)’이라는 두 산맥으로 인해 불편이 극심한 나머지 대대손손(代代孫孫) 삽과 삼태기로 흙을 퍼서 산을 옮기기로 작심을 하자, 이에 감동한 옥황상제가 발해만으로 산을 옮겨주었다는 우화이다.[/footnote]

천막학교에는 새로운 숙제가 생겼습니다. 마을회관의 길 맞은편에 아담한 공터가 있었는데, 마을회관 교실 때는 이 공터를 운동장처럼 사용했었지요. 그런데 그 공터를 천막학교가 깔고 앉아버렸기 때문에 새로 운동장이 아쉽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은 계단밭 일구는 것만으로도 파김치였으니, 도움을 받을 일손도 없었고요. 이럴 때 바로 잔 다르크 선생님의 특기가 발휘되지요. 두 팔을 걷어붙이는 특기 말이에요.

천막학교 앞쪽으로 펼쳐진 울퉁불퉁하면서 완만한 경사지를 운동장으로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이렇게 힘쓰는 일이 필요할 때는, 오히려 산골학교의 웃자란 만학도(晩學徒)[footnote]나이가 들어 뒤늦게 공부하는 학생.[/footnote]들이 도움이 됩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이 솔선하여 괭이·삽·호미 따위를 들고 앞장을 섭니다. 아이들도 따라나섭니다. 괭이질이며 삽질도 장난 같고 놀이 같습니다.

먼저 여기저기 산만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잡목들을 정리하고, 깔끔하게 뿌리까지 제거합니다. 다음으로 작은 바위와 돌들을 캐내서 바깥쪽으로 치워둡니다. 경사지이다 보니 높은 쪽을 까서 낮은 쪽으로 보냅니다. 중간중간 움푹 패여 있는 웅덩이들도 다 메워줍니다.

한참 작업을 하다 보니 낮은 쪽 한 켠의 풀숲에 물이 솟아나는 질퍽질퍽한 수렁이 숨어 있었습니다. 갑작스레 몰려온 사람에 놀라 뱀 몇 마리가 순식간에 도망을 갑니다. 뱀 이야기를 듣고는 개구쟁이들이 사냥을 하겠다며 우르르 달려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달래어 연못을 만들기로 합니다. 풀들을 뽑고 들쭉날쭉한 모양새를 가지런하게 타원으로 정리를 합니다. 수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제법 널찍한 ‘둠벙’(웅덩이)이 탄생하였습니다.

운동장 공사 이야기만 모아서 정리하니 한 번에 뚝딱 만든 것처럼 읽히지만, 이 작업은 그해 가을까지 반 년 가까이 계속된 것이었습니다. 방과 후 매일 두어 시간씩 고사리 같은 손들이 선생님을 따라 손수 100평 정도 되는 자기들의 운동장을 만들었습니다. 둠벙은 나중에 빨래터와 세면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듬해 학교 공사 때 인부들이) 7m 정도를 파내고 펌프를 박은 뒤, 둠벙을 메우고 돌을 깔아서 아이들이 매일 씻고 빨래를 하는 곳으로 환골탈태를 하였습니다.

“물이 차고 맑아서 마을 사람들도 학교 펌프를 즐겨 이용했어요.”

■ “어찌나 쪽팔리던지 눈물이 왈칵”

그렇게 한창 학교의 꼴을 갖추어가는 와중에 태기리 산골짜기를 발칵 뒤집는 엉뚱한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66년 5월 초인가 중순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주 난리가 났었어. 방과 후에 학교에서 무슨 정리를 하고 있는데 애들이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선생님 집에 불 났어요!’하고 막 소리를 질러. 그때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2반의 어느 문간방에서 자취를 했었어.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나 살던 집하고 옆집하고 두 채에 불이 붙었는데 벌써 불길이 지붕까지 치솟아서 타닥타닥 조릿대 타는 소리가 요란해요. 더구나 두 집 다 구조가 토막집[footnote]태기분교 이야기 5화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참조. 일종의 ‘통나무집’이나 오늘날의 ‘통나무집’처럼 교차 부분을 파내어 이가 맞물리도록 조립한 북유럽식과 달리, 성냥개비를 겹겹이 쌓아올리듯이 그냥 통나무를 거칠게 쌓아올려 지은 ‘원시 통나무집’이다. 교차 부분 중간의 텅 빈 공간은 흙으로 메우는 방식.[/footnote]이었으니 불길이 아주 대단했지.”

불길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도 워낙 엄청난 불길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랴부랴 양동이로 물을 퍼다가 인접한 집에 뿌리며, 그나마 불길이 번지지 못하게 애를 쓸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화재가 난 두 집이, 여러 채가 한데 몰려 있는 2반 중심으로부터 작은 도랑을 사이에 두고 모퉁이 쪽으로 떨어져 앉은 덕분에 대형화재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해서는 사람들로부터 간단한 진술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더니 며칠 후 엉뚱하게 처녀 선생님에게 ‘출두하라’는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갑천면 파출소로 찾아가니까 그냥 죄인 취급이야. 평생 표창장만 받고 살아왔는데 이게 웬 봉변인가 싶고……. 젊은 순경들이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어찌나 쪽팔리던지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거라.”

처음에는 구석 자리에 한참을 앉혀두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방치해두었다가, 조그마한 보호실로 데려가서 조사를 하였습니다.

“조사할 게 뭐 있어. 학교에 있다가 애들 얘기 듣고 가 보니 집이 활활 타고 있더라, 그게 전부인데…….”

그러나 그날 선생님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살다 살다 경찰서에서 잠을 얻어자다니 그런 망신살이 없었어요. 이튿날은 본교 정덕영 교장선생님까지 소환돼서 오셨어. 어휴, 민망해서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어요. 결국 그 집 애들이 불장난하다가 불을 낸 것으로 밝혀졌는데, 교장선생님하고 나하고 시말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났지. 사고 재발 때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