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box type=”note”]

#. 알파벳과 여신

  1.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2.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3.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4.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5.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6.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7.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 혐오, 강간, 동성애
  8.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9.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10.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11.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12.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13.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14.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15.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16.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17.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18.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19.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20. 종교전쟁 혹은 대학살: 프랑스, 이탈리아, 플랜더스

[/box]

 

인쇄 기술의 보급과 함께 프로테스탄트(가톨릭에 대비해 ‘(개)신교’, 당연히 가톨릭은 ‘구교’)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문맹이 절대다수였기 때문에 초기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농부들은 여전히 가톨릭을 고수했다. 온통 하얀색 페인트를 칠한 무표정하고 휑한 교회와 칼뱅의 엄격한 예정설은, 화려한 미사와 축제로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는 기존의 신앙을 포기할 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장 칼뱅(1509 – 1564) 개신교의 아버지.

프랑스의 종교전쟁

유럽 최대의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도 위그노(Huguenots)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가 점차 세력을 펼쳐나갔다. 1535년 프랑수아 1세는 이단을 뿌리 뽑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위그노들을 무더기로 잡아다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위그노는 물론, 그들을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이런 탄압에도 위그노는 계속 늘어갔다. 특히 300년 전 이단의 소굴로 지목되어 가톨릭 십자군에 의해 집단 학살이 벌어졌던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는 번성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은 물론 종교적인 갈등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경제적, 정치적 요인도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앙부아즈 암살 모의 사건(1560) 

샤를 9세가 왕위에 오른 뒤 위그노 지도자들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기즈 가문의 핵심 인물인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François de Guise, 1519-1563)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바로 전 내부자의 배신으로 인해 작전이 탄로나고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샤를 9세(재위: 1560-1574). 10살에 왕위에 올라 24살에 죽었다. 국정은 대부분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가 대신했다. 카트린은 당시 권력을 장악한 기즈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위그노를 중용하였고, 이들 간의 권력 다툼은 결국 대학살로 이어진다. (그림: 프랑수아 클루에)

역시 기즈 가문 출신이었던 프랑스의 추기경은 곧바로 왕실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이 더는 반란을 꿈꾸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기로 한다. 앙부아즈 성(Château d’Amboise)의 권력자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빨리 죽이기 위해 사람들을 한꺼번에 몰아서 재판하고 선고를 내린 뒤, 커다란 부대 자루에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넣어 루아르강에 집어넣었다. 강 하류에는 사람들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앙부아즈 암살 모의 사건(Conspiracy of Amboise, (1560) 이후 처형되는 위그노 교도들

처음에는 방조하는 듯하다가 심각해지는 상황에 놀란 카트린은 중재 법관으로 미셸 드 로피탈(Michel de L’Hôpital)을 임명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한다. 중재 법관은 다음과 같은 말로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당신은 당신의 종교가 더 낫다고 말합니다. 나는 내 종교가 더 낫다고 말합니다. 당신들이 내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당신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일까요? 루터, 위그노, 가톨릭… 이 악마의 이름들은 더 이상 쓰지 맙시다. 이제 모두 크리스찬이라고 부릅시다!” (John William Allen,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in the Sixteenth Century’, 295)

하지만 반응은 시들했다. 파리대학 신학부의 학과장은 모든 이단을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교황 대사는 위그노의 협상 대표들을 깡그리 붙잡아 화형시키라고 다그쳤다.

위그노 전쟁의 시작: 바시 학살(1562) 

1562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프랑수와 드 기즈 공작은 바시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미사에 참석한다. 성당에서 가까운 곳에서 위그노들이 모여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드렸는데, 공작의 수행원들이 이들을 찾아가 미사에 방해된다며 노래를 멈추라고 지시한다. 곧바로 말싸움이 시작되었고 결국 수행원들은 칼을 뽑아든다.

결국, 이날 하루 동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위그노를 학살한다. 이 사건으로 74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오늘날 ‘바시 학살’(1562)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참고로, 프랑스의 종교전쟁인 ‘위그노 전쟁’은 바시 학살을 시작으로 1598년 위그노 수장이었던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국왕에 즉위한 후, 1598년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낭트 칙령을 선포하면서 일단락된다. -편집자)

바시 학살(Massacre of Vassy) 1562년 3월 1일  (그림: Hogenberg)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1572)

위그노는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프랑스의 몇몇 지방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위그노는 지방정부를 장악하자마자 그 지역의 가톨릭교회를 폐쇄하고 성상과 성화를 모조리 파괴했다. 수녀, 수도사, 사제들을 도시 밖으로 내쫓고, 시민 모두 예외 없이 자신들의 예배에 참석하라고 명령했다.

위그노를 이끄는 대표적인 지도자는 가스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 1519-1572) 제독으로, 샤를 9세의 친구였다. 하루는 왕을 접견하기 위해 호위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하였는데, 루브르 궁전 근처를 걷고 있을 때 누군가 쏜 총탄이 그의 팔꿈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위그노  전쟁 초기 개신교 지도자 역할을 한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Gaspard de Coligny, 1519-1572)

콜리니는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것은 약 10년 전 위그노에게 맞은 총상이 악화해 끝내 숨진 프랑수아 드 기즈의 아들,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Henri Ier de Guise, 1550–1588)일 것이라고 확신했고, 기필코 복수하겠다고 다짐한다. 파리는 흉흉한 괴소문에 휩싸였다. 양쪽 모두 서로 이를 갈며 쉬지 않고 무기고를 채워나갔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기즈 공작이었다. 위그노들이 파리에 쳐들어와 왕과 그의 어머니를 납치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서, 콜리니를 먼저 쳐들어가 쿠데타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고 탄원했다. 하지만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충실한 신하들 중에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가 많았기 때문에 왕은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22살 밖에 되지 않은 미숙한 왕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주저했다. 가톨릭 귀족들은 비밀리에 작전을 세우고, 왕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집요하게 매달린다. 자정이 다될 때까지 버티던 왕은 결국 반역 공모 혐의로 콜리니를 포함한 위그노 6명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데 동의한다. 이에 귀족들은 한발 더 나아가 위그노를 모두 처형하라는 명령까지 받아낸다.

“오 하느님, 당신이 제독을 죽여야 한다고 사정하기에 나는 수락했소! 그런데 이제 다시 프랑스의 위그노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니,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한 명도 남겨둬선 안 된다니… 죽이시오. 모두 죽이시오. 모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1572)을 주도한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Henri Ier de Guise, 1550–1588)

귀족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를 지른 뒤 샤를 9세는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시간은 자정을 넘겨 1572년 8월 24일이 되었다. 일요일이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이었다. 기즈 공작은 파리 성밖에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민병대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파리로 진입해 성문을 닫고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은 뒤 위그노를 색출하여 도륙하라는 것이었다.

새벽 3시 소수의 선발대가 콜리니의 아파트를 습격하여 무릎꿇고 기도하고 있는 그를 칼로 찔러 죽인 다음 시신을 창 밖으로 던졌다. 아파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앙리 1세 드 기즈는 콜리니가 죽었다는것을 확인한 뒤 외친다.

“죽여라! 죽여! 왕의 명령이다!”

왕실군의 위그노 학살이 시작되었다. 가톨릭을 믿는 일반시민들도 떼거지로 몰려나와 군인들과 합세하여 인간 사냥에 동참했다. 수천 명이 동료와 이웃의 손에 죽었다. 제빵사가 제빵사를 죽이고, 의사가 의사를 죽이고, 아이들이 자신의 친구를 죽였다.

위그노 전쟁은 종교전쟁의 이면에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엉켜있었다.

군중은 위그노를 숨겨주고 있다고 의심되는 집에 쳐들어갔다. 그 집에 사는 가족도 모두 차례대로 도살했다. 남편, 아내, 그리고 아이들을 죽였다. 부녀자를 강간한 다음에 죽였다. 죽어가는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벽에 내려치기도 했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카트린은 왕명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학살된 뒤였다. 정오가 다가올 무렵 처참한 살육 행위를 막기 위해 급조된 시민대표단이 왕을 찾아와 탄원을 제출한다.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으로 침실에서 나온 샤를 9세는 학살을 멈추라고 명령한다. 오후 들어 학살은 겨우 잦아든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St. Bartholomew’s Day massacre, 그림: 프랑수와 뒤부아. 아파트 2층 창문에 늘어져 있는 시신은 콜리니 제독을 표현한 것이며, 뒤쪽에 검은 옷을 입고 시신더미를 쳐다보고 있는 여자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표현한 것이다.

다음날 월요일, 파리 전역의 교회들은 일제히 기쁨의 종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리 사람들은 이 종소리를 살육의 축제를 다시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곳곳에서 다시 살인이 벌어졌고 금방 학살로 이어졌다. 정부의 통제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데에는 수일이 걸렸다.

루브르 궁전에서 나와 시체더미를 살펴보고 있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 (그림: 에드와르 드바 퐁상, 위 뒤부아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후대의 작품이다. 1880년 작).

파리의 학살 소식은 지방으로 퍼져나갔고 이에 ‘영감’을 받은 프랑스 전역의 가톨릭교도가 일제히 일어났다. 리옹, 디종, 오를레앙, 블루아, 투르, 트루아, 모, 부르주, 앙제르, 루앙에서도 위그노가 수천 명씩 살해된다.

이 소식을 들은 바티칸은 환호와 갈채로 들끓었다. 교회는 기쁨에 겨워 종소리를 울려댔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하느님이 “기독교도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호의”에 감사하는 특별 미사를 열었다.

1572년 교황청에서 발행한 위그노 학살 기념주화

학살의 신호가 되었던 콜리니의 시체는 폭도의 손에 넘어갔다. 그의 머리는 말뚝에 꽂아 루브르 궁전 문 앞에 전시되었고, 생식기와 손가락은 잘라서 기념품으로 팔았다. 그 시체 토막을 보고 가톨릭 교도는 기뻐 외쳤다.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프랑스는 구원받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종교전쟁

휴머니즘 운동의 진원지 이탈리아도 테러 정치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종교개혁이 한창 타오르던 1555년, 79살 조반지 카라파(Giovanni Caraffa)교황 바오로 4세(재위: 1555-1559)에 즉위한다. 그는 가혹한 종교재판 규정을 선포한다.

  • 신앙이 의심되는 경우 지체없이 고발한다.
  • 군주나 고위성직자라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 극도로 가혹한 처벌을 한다.
  • 이단, 특히 칼뱅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교황 바오로 4세(재위: 1555-1559). 엄격한 금욕주의와 프로테스탄트, 특히 칼뱅주의자에 대한 불관용을 원칙으로 삼았다. 유대인 격리 구역(게토)을 지정해 유대인을 철저하게 통제하기도 했다.

바오로는 더 나아가 나체를 묘사한 그림과 조각상들을 없애라고 명령한다. 시스티나 예배당 안에 거대한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가설물)가 설치되었고, 교황청이 고용한 화가들이 미켈란젤로의 ‘난잡한’ 그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대리석 조각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 입혀졌다. 1559년에는 불경한 책은 모두 불태우라고 지시한다. 베니스에서만 하루에 1만 권이 불타 사라졌다.

동성애를 저지른 성직자와 소년을 광장에서 산 채로 불태웠고, 간음을 저지른 수녀 역시 그 상대 남자와 함께 불태웠다. 교황의 공포 정치로 로마는 공포에 휩싸였고, 르네상스의 정신은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플랜더스의 종교전쟁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위치한 플랜더스(영어: Flanders, 네덜란드어: 플란데런 Vlaanderen, 프랑스어: 플랑드르 Flandre , ) 지역은 종교개혁이 시작될 무렵인 16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상업의 중심지였다. 안트베르펜과 브뤼셀에서는 인쇄기 수백 대가 쉴 새 없이 덜컹거리며 돌아갔으며, 이에 따라 프로테스탄트도 급속히 퍼져나갔다.

영국의 아동문학가 위다(1839 ~ 1908)가 쓴 소설 ‘플랜더스의 개’ (A Dog of Flanders)의 공간적 배경이 오늘날 벨기에 북부에 위치한 플랜더스 혹은 플란데런이다. (그림은 ‘플랜더스의 개’ 삽화)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 궁정은 서둘러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이단들을 사정없이 화형에 처하기 시작한다. 시체 타는 냄새가 그칠 날이 없었으며, 도시 전체가 황폐해지었다. 이 와중에 프로테스탄트는 반란의 기회를 잡는다. 이 지역의 실권자였던 윌리엄 더 사일런트(William the Silent, 1533–1584)가 프로테스탄트의 편에 선 것이다. 가톨릭 못지 않게 프로테스탄트도 잔인하고 악랄했다.

“적군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목매다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스페인 사람은 그들의 눈에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한번은 한 외과의사가 포로로 잡힌 스페인 사람의 심장을 도려내 뱃머리에 못으로 박아 걸어놓고는 주민들에게 이빨로 깨물도록 했다. 많은 이들이 그런 행동에서 야만적인 만족을 느꼈다.” (J.R.Motley, *Rise of the Dutch Republic*, 2:40)

프로테스탄트는 승승장구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한다. 내부의 급진적인 칼뱅주의 일파들이 신앙심이 부족하다면서 윌리엄 더 사일런트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1년에 겨우 한 번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윌리엄 더 사일런트(William the Silent, 1533–1584) 혹은 오라녜의 빌렘(William of Orange).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아서 침묵공(the Silent)라는 비꼬는 닉네임이 붙었다. 오늘날 네덜란드 건국의 아버지로 받들어진다.

가톨릭을 지원하는 스페인을 자신들의 땅에서 몰아내고 종교적인 자유를 얻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던 전쟁은, 갑자기 나타난 소수의 원리주의자들로 인해 이제 자신들끼리 싸우는 전쟁이 되었다. 원리주의자들은 관용을 중시하는 에라스무스와 같은 휴머니스트나 이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교황청 프락치(secret papist)’라고 몰아붙였으며,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방탕꾼(Libertine)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광신도는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 반군 중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은밀하고 끈질긴 결연함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1618년 급진 광신도는 결국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자신들 교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내용을 설교하는 이들은 모두 잡아다 사형에 처했다. 결국 플랑드르 독립전쟁은 프로테스탄트들끼리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발전한다. 양쪽 모두 끔찍한 처벌을 주고받았으며, 이 모든 행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윌리엄 더 사일런트는 각고의 노력으로 이뤄낸 자신의 업적이 혼돈과 증오와 분열로 끝을 맺는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몹시 괴로워했다. 결국, 윌리엄 더 사일런트도 광신도에게 암살당하여 생을 마감한다. 암살범은 가톨릭 신자였고, 암살 대가로 스페인 정부로부터 엄청난 현상금을 받았지만, 그 돈을 모두 성모 마리아에게 헌금으로 바쳤다.

[divide style=”2″]

[box type=”note”]

이 글은 출판사 크레센도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box]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