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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을 접하고 기쁨을 느낀 적 있는가? 나는 종종 이 감정을 느낀다. 미디어가 가장 열정적으로 어쩌면 진심을 다해 ‘우리 대신’해 주는 일은 유명 정치인과 기업인,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타락과 추락 그리고 불행을 추적하는 일이다.

타인의 불행과 피해가 명백한 범죄와 비행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정의감을 결부해 만족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딱히 범죄와 비행에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 불행과 피해가 딱히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데도 우리는 때로 그 타인의 불행에 ‘기쁨’을 느낀다. 안 그런 사람이 오히려 더 드물 거다. 독일어에는 이런 감정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다.

타인의 피해, 불행이 가져오는 기쁨 ‘샤덴프로이데’


‘샤덴프로이데’를 처음 접한 건 [보스턴 리걸] (2004~2008, ABC)이라는 미국 드라마였던 걸로 기억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변호사 앨런 쇼어. 제임스 스페이더가 연기한 이 희대의 ‘말빨러’는 돈만 보고 늙은 남편과 결혼한 뒤에 젊은 남자와 바람피우고, 남편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는 한 비호감 여성을 변호한다. 모두에게 미움받는 피고인을 위한 변호인 앤런의 최후변론은 이렇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독일어로 ‘피해’와 ‘기쁨’을 뜻하는 ‘샤덴'(Schaden)과 ‘프로이데'(freude)에서 나온 말입니다. 남의 불행을 보고 느끼는 심술궂고 악의에 찬 기쁨을 말하죠.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인간 본성의 악한 면으로 치부하곤 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난 것입니다.

최근, 스탠퍼드의 한 교수가 뇌 촬영으로 샤덴프로이데를 실제로 잡아냈습니다. 생리학적이자 의학적인 현상이라는 거죠. 남이 무너지는 것을 볼 때 뇌의 등 쪽 선조체에서 화학 물질을 분비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기쁨을 느끼게 하는 물질이죠.

여러분이 뉴스나 신문을 보셨다면, 물론 판사님이 금지했으므로 못 보셨겠지만, 만약 보셨다면 켈리 놀런(극 중 피고인)이 궁지에 몰렸을 때 언론과 대중이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똑똑히 보셨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 역시 켈리 놀런이 처벌받길 원한다고 확신합니다. 돈을 보고 결혼한데다 바람까지 피웠죠. 남자 친구와 수영장에서 벌거벗고 뒹굴었죠. 차갑고, 물질적이고, 호감이 안 가는 인물이지요. 그래서 켈리가 감옥에 가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이 기쁨을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켈리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없앨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켈리가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샤덴프로이데입니다.”

(보스턴 리걸, S02E02, ‘샤덴프로이데’, ABC: 2005. 10. 중에서)

언론에 의해 악녀(‘블랙 위도우’; 교미 후 숫거미를 먹이로 삼는 암거미, 검은과부거미) 딱지가 붙은 피고인과 그를 변호하는 변호인. (출처: 보스턴 리걸, S02E02, ‘샤덴프로이데’, ABC: 2005. 10. 중에서)

우리는 저 드라마 속 변호인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면 미디어의 위선적인 시선처럼 돈 많은 늙은 남자와 결혼한 저 여성 피고인을 향한 여론재판을 유도하며 그 추락과 고통을 즐길까. 결국, 드라마 속 배심원은 결국 어떤 결정을 했을까.

우선 ‘샤덴프로이데’에 관한 논문들을 참고해 샤덴프로이데의 몇 가지 얼굴을 살펴보자.

샤덴프로이데의 몇 가지 얼굴


1. 샤덴프로이데를 강화하는 것, 약화하는 것 (경향성 척도)

안도연, 조명현 (2022)의 연구에 따르면, 샤덴프로이데는 무직 상태일 때 직업적 상태일 때보다 강하게 나타나고, 우울과도 비례적 상관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시기심과도 정적 상관(긍정적 비례)을 보였다.

혹시 형제자매의 수가 영향을 미칠까? 그렇다. 외동 또는 형제자매가 3명 이상인 경우보다 형제자매가 1~2명일 때 샤덴프로이데 성향은 높아졌다. 공감과 연민의 감수성은 당연하게 샤덴프로이데의 ‘항체’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공감적 행복과 연민은 샤덴프로이데를 약화했다. 그런데 의외로 삶의 만족도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결국, 샤덴프로이데는 자신에 관한 부정적 감정과 관련되며 삶의 만족 여부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2. 상사가 직장동료를 괴롭힐 때 기쁨을 느끼는 이유

동료직원을 괴롭히는 상사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기뻐한 적은 없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그 상사와 친한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

정지은(2020)의 연구에 따르면, 직장 내에서 상사의 ‘비인격적 감독'(abusive supervision)을 당하는 동료직원들을 목격하면서 샤덴프로이데를 느끼고, 동료 배제 행위를 하는 직원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상사의 행위가 잘못에 대한 마땅한 행위이기 때문에 샤덴프로이데를 느끼고, 동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사와의 유사성까지 느끼는 경우에만 그런 적극적인 목격자 반응을 나타낸다.

참고로 2019년 7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규정한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됐고, 비인격적 감독’(abusive supervision)이란 상사가 신체적 접촉을 제외하고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으로 부하 직원에게 지속적이고 공격적이며 폭력적으로 적대적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 내 괴롭힘에 샤덴프로이데를 적용하면, 상사의 비인격적 감독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느끼는 만족감이라 할 수 있다.

3. 샤덴프로이데와 사이버불링 가해 가능성의 관계

타인의 불행에 대해 유쾌한 감정을 가지는 청소년들이 사이버불링을 하는 정도는 높을까?

조명현, 안도연 (2022)의 연구에 따르면 그 답은 ‘그렇다’이다. 이는 청소년의 샤덴프로이데가 단순히 타인의 불행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정서적인 측면에서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상대방의 불행을 유도하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편 내적 자기인식이 평균 이상인 경우 샤덴프로이데와 사이버불링 간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는 자기인식이 긍정적인 행동 변화를 촉진하고,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을 유도한다는 기존 연구와는 배치되는 결과다. 단, 여기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면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 인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이 갖고 있는 일정한 기준을 의미하며, 여기에 부합하는 행동을 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렘브란트, 1630년 작

한편, 공감은 공격행동을 줄이는 기능이 있고, 공감 정도가 높은 아이들은 신체적 공격은 물론 언어적 공격의 정도 역시 낮았으며, 평소 일상생활에서 문제행동을 덜 일으키고 비행행동이 발생하는 경우도 낮은 것으로 보고된다. 이는 공감을 잘하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죄책감을 더 잘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공감력을 키우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4. 스포츠 마케팅에 이용하면 도움이 될 거야!

샤덴프로이데는 라이벌 팀의 경기 관람 의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지현, 김유겸 (2020)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샤덴프로이데는 경기 관람 의도를 만들어 스포츠 활성화에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샤덴프로이데를 잘 활용하면, 라이벌 구도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을 활용하여 스포츠 경기 관람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샤덴프로이데 권하는 사회


샤덴프로이데는 경쟁사회가 만들어 낸 병적 감정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감정일까. 샤덴프로이데는 일견 대면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어두운 이면에 도사린 감정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감정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다. 리사 팰드먼 배럿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019)에서 책상이나 주전자처럼 감정이라는 건 객관적인 실체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우리가 각자의 상황 속에서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속한 문화권 안에서 경험을 통해 (재)구성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감정은 주전자나 책상, 자동차와 같은 객관적 실재라기보다는 화폐와 같은 사회적 실재라고 리사 팰드먼은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외부의 자극을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긍정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해도 외부의 자극 그 자체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극도로 경쟁적이고, 극도로 불공정한 사회에서 나 혼자 ‘공감’과 ‘연민’을 가지려 노력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은 샤덴프로이데 권하는 사회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타인의 상처에 관해 연민을 느끼고, 공감하며, 함께 슬퍼하고, 그것을 보듬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나와 (잠재적인) 경쟁 관계에 있는 타인의 피해, 불행에 기쁨과 안도감을 느끼도록 사육된다. 미디어는 정의감의 가면을 쓰고 매일매일 그런 가학적인 불행사냥과 손쉬운 마녀사냥을 정당화한다.

입시교육은 그 반인격적인 경쟁을 상징하는 시스템이자 문화의 핵심 그 자체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나조차도 입시교육의 무자비한 관성을 떨쳐내지 못했다. 나는 내가 때때로 18살 고등학생 같다. 그러니까 나는 18살 ‘고딩’처럼 생각하고 판단한다(여기에선 좋은 의미가 아니라 그 반대 의미다).

정윤성(정순신 아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그 피해자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보다 더 중요한 건 정윤성을 서울대에서 퇴출시키는 일이다. 정순신 아들 사태와 같은 막대한 사회적 공론의 비용을 치른 결론은 어떻게 하면 학폭 피해자를 좀 더 안전하게 보호할까, 어떻게 하면 학폭을 미리미리 예방할까가 아.니.라. (깨몽하시고) 어떻게 하면 저 녀석(정윤성)을 서울대에서 퇴출시킬 수 있겠느냐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모습, 나 자신의 내면에서조차 느껴지는 그런 감정은 공정을 추구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성숙한 모습으로 보인다기보다는 기득권의 타락과 탈선을 그 자체로 게임처럼 즐기는 경기의 관중 같다. 싫든 좋든 (나를 포함한) 대중의 감정 밑바닥에는 그런 감정이 존재하고, 그 감정의 정치적 표현 형태가 학폭 예방이나 피해자 보호에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4.12 학폭 종합대책이다. 그건 샤덴프로이데 사회의 어두운 이면 같다.

감정 단어는 그 감정이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하게 한다. 샤덴프로이데의 사촌격(?)에 해당하는 우리말 속담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도 마찬가지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내 마음을 이 속담은 다소 풍자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속 좁은 내 자신아!

샤덴프로이데 권하는 사회 대한민국. 그걸 거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나 자신까지 너무 부정하지는 말고, 가끔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한마디 하면 어떨까 싶다: ‘이런 ### 사건을 접하고 나니 샤덴프로이데가 느껴지는구먼. 좀 자제해야겠어.’


참고문헌

– 오지현, 김유겸 (2020), 스포츠 라이벌 요인과 샤덴프로이데(shadenfreude)가 라이벌 팀 경기 관람의도에 미치는 영향.
– 정지은(2020), 비인격적 감독 목격에 따른 구성원의 반응 : 공감, 샤덴프로이데, 상사와의 유사성의 효과
– 안도연, 조명현 (2022), 성인을 대상으로 한 샤덴프로이데 경향성 척도의 타당화 연구
– 조명현, 안도연 (2022), 청소년의 샤덴프로이데가 사이버불링 가해행동에 미치는 영향: 자기인식의 조절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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