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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대통령 푸틴(왼쪽)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블라디미르 젤렌스키(오른쪽,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4.0)
러시아 대통령 푸틴(왼쪽)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오른쪽,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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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권위주의 통치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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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갈등을 잘 살펴보기 위해서 한 가지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는데, 이는 러시아가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는 와중에 소비에트 연방(USSR) 독립국가연합(CIS)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최후의 몸부림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제로 우리나라의 90년대 초반 출판된 세계 지도에는 러시아가 ‘독립국가연합’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때 러시아 연방과 함께 독립국가연합을 구성했던 최초의 멤버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였다는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CIS를 탈퇴한 상황이지만, 아무튼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영역권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자 하는 러시아 입장에 그나마 동참을 하는 쪽이었다. 물론 역사적 맥락상 반러 민족주의가 공존하는 우크라이나의 상황에서 친-반러 갈등은 예정된 일이었지만 말이다.

‘줄타기’ 친러와 반러 사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역대 대통령들은 사실 친러와 반러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 왔다. 2대 대통령인 레오니트 쿠치마, 3대 대통령인 빅토르 유셴코 모두가 친러와 반러로 분열된 나라를 어떻게든 통합하려고 애써 온 흔적들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셴코가 민주화 투사이자 친서방 인사인 것만으로 알려져 있으나 유셴코는 반러 민족주의 세력의 독극물 테러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위해 힘쓴 사람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이들 역시 과거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시절의 부패조차 청산하지 못하고 차례차례 선거에서 패해 물러났지만 말이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친러 성향의 4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집권(2010. 2. 25.–2014. 2. 22)하던 2010년 이후 시기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의미가 희미해져 가던 독립국가연합에 대한 협력을 강하게 추진하는 등의 변화는 주었지만, 사실 벨라루스처럼 완전히 친러로 기운 것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우크라이나에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러시아와 서방이 동시에 구제 금융을 제안했고, 사실상 재앙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블라디미르 푸틴 (2006년 회담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4.0)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블라디미르 푸틴 (2006년 회담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4.0)

당시 러시아는 조건 없는 150억 달러의 차관 제공, EU는 강도 높은 경제 개혁을 선결조건으로 내건 20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EU가 강도 높은 경제 개혁을 선결조건으로 내건 것에 대해 IMF에 감정이 좋지 않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소 탐탁치 않을 수 있으나, 당시의 우크라이나는 이미 IMF로부터 여러 차례 차관을 제공받고도 제대로 상환하지 못했던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 서방으로서는 당연한 조건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여기서 야누코비치가 갈등을 하는 사이 이러한 조건이 제시되었던 것 만으로도 우크라이나 내 친러-반러 세력의 갈등이 폭력적으로 비화되었다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불운이었다. 당연히 야누코비치의 입장에서는 연금도 깎고 경제도 개혁하라는 EU보다 천연가스 가격도 내려 주고 무조건 150억 달러를 꽂아 주겠다는 러시아의 제안이 더 매력적이었을 테지만, 반러 민족주의 세력이 나라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정권의 유지를 위해 쉽게 러시아를 선택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를 선택하기는 했다. 그리고 EU 역시 이 시점에서는 ‘음… 어쩔 수 없지’ 수준으로 입만 닦고 물러났다. 문제는 야누코비치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 그 자체였다. 서방의 손을 놓고 유라시아 경제 연합에 편입되어 러시아에 종속당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으면 국민에게 충분한 설명이 있었어야 했지만, 야누코비치는 반러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이것이 키예프를 피로 물들인 유로마이단 사태(2013년 11월 21일 시작된 반러 시위, 유로는 ‘유럽’, 마이단은 ‘광장’을 의미)이다.

2014년 1월 19일의 유로마이단 시위, 사실상 내전을 방불케 하는 폭력적 진압과 저항이 오갔다.
2014년 1월 19일의 유로마이단 시위 모습. 사실상 내전을 방불케 하는 폭력적 진압과 저항이 오갔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반러 물결(유로마이단)과 친러 반동(돈바스 전쟁)

자, 야누코비치의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 과잉 진압은 러시아에 하나의 큰 손해와 하나의 작은 기회를 안겼다. 첫째는 그저 버티기만 하고 있어도 러시아에 도움이 되는 야누코비치 정권이 쓸데없는 짓을 하다가 뭉그러져 버렸다는 것은 러시아에는 분명한 손해였다. 어차피 우크라이나 내에서 친러 대 반러는 5.5:4.5 수준이었기 때문에 친러 정권을 잘 유지하면 러시아 국익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러 정권은 그냥 날아가버렸고, 오히려 반러 분위기만 더욱 강화된 것은 분명한 야누코비치의 실책이었다.

2013년 11월 27일, 키예프
2013년 11월 27일, 키예프

그러나 유로마이단 집회에서는 일부에 불과하긴 하지만, 반-루스인(슬라브인)적인 메세지와 네오나치적인 목소리가 있었고, 푸틴은 작게나마 이를 빌미삼아 ‘우리 루스인에 대한 보호’를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불행한 5대 포로셴코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일어난 크림 위기와 돈바스 사태(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돈바스 분리주의 반군+러시아 준군사 조직 사이의 전쟁)이다.

문제는, 돈바스 전쟁으로 인해 영토를 침탈당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더더욱 강경한 반러로 기울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젤렌스키는 그냥 코미디언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미치는 선거구 전역에서 친러-반러 지역을 가리지 않고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된 대통령이다. 즉 우크라이나인의 정치 혐오가 코미디언 출신의 이상한 대통령을 뽑은 것이 아니라, 전임 야누코비치의 폭력과 무능, 그리고 푸틴의 침략이 우크라이나인들의 단결을 이끌어낸 것이다.

‘나토’… 절망 속 불가피한 선택 

실제로 젤렌스키가 나토 가입을 강하게 추진했던 것은 더 늦기 전에 러시아의 침략을 막았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젤렌스키가 나토 가입을 추진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가 침공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구소련의 최전선이었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어떻게든 ‘독립국가연합’의 범위에 붙들어 놓아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친러 정권이 필요하다.

사실 위기를 고조시킨 책임은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위협 때문에 나토 가입을 호소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뭉개고만 있던 미국과 독일에게도 있다. 젤렌스키는 2020년 7월까지만 해도 푸틴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돈바스 위기의 해결책을 러시아와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젤렌스키가 서방에만 기대다가 나라가 망할 위기에 몰렸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 외교가 그 어떤 대통령이든 간에 서방과 러시아 간의 줄타기라는 것을 아예 도외시하는 분들이다.

동우크라니아 사태(돈바스 전쟁) 중 친러시아 성향을 강하게 보이며 분리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의 친러시아 군인들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친러시아 세력이 지배하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남서부를 차지하는 도네츠크의 친러시아 군인들 모습. 돈바스 지역의 친러 세력은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돈바스의 북동 지역) 수립을 선포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무력으로 충돌해 약 1만4천여 명이 숨졌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하지만 푸틴은 젤렌스키와 대화를 하면서도 돈바스 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긴장도를 높였으며, 이 때문에 결국 젤렌스키는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토 가입이라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부 이슈 처리하기에 바쁜 미국과 가스 수입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독일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푸틴은 확신을 내렸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치더라도 저들은 움직이지 않겠구나’라는것 말이다. 경제 제재 정도는 하겠지만, 그 정도는 ‘어머니 러시아’ 를 위한 민족 대단결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되시는가? 물론 젤렌스키의 잘못도 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어정쩡한 태도만 유지하는 서방과 칼끝을 점점 찔러오는 러시아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예프 3~40km 전방까지 러시아군이 몰려와 있는 지금 그래도 수도를 지키고 있는 젤렌스키는 최대한 자신의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아무리 대선이 급하다지만, 상대 당 후보와 타국 대통령을 비교하며 무능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는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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