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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는 나를 다독가로 아는 사람들이 좀 있지만, 사실 난 그리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평균보다야 많이 읽겠지만, 생각보다 책을 읽는 시간은 많지 않다. 그래도 지식에 대한 욕심이 없지는 않은지라 간혹 읽는 책들은 거의 대부분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분석과 해설을 담은 책들이다. 소설, 그중에서도 특히 고전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언제나 뒷 순위로 밀린다.

뒷 순위 ‘소설’을 다시 만난 계기 

소설을 바라보는 태도를 기준으로 삼자면 사실 이것조차 몇 년 전에 비하면 꽤 많이 개선(?)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전에는 소설을 읽을 의무감도 잘 못 느꼈다. 세계에 대한 지식이 이토록 방대함을 깨달은 뒤로는 ‘객관적 지식’의 실타래를 차츰 풀면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짜릿한 일로 다가왔다. 반면 어차피 소설가의 머릿속 상상에 불과한 허구의 이야기가 그런 지식을 대체할 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는 잘 납득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언제나 ‘딱딱한’ 글만 읽은 것은 아니었다. 르포를 읽는 것은 소설적인 재미를 주면서도 내가 살고있는 ‘실제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보고 싶으면 만화를 보거나 가끔 영화를 보면 될 일이었다. 소설은 여러 의미에서 비효율적이고 매력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소설이라는 하나의 장르, 혹은 표현 양식을 사뭇 다르게 보게 된 계기가 생겼다. 아버지와 어렸을 때 정말 즐겨 보았던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학생 때 즐겨 보았던 오 헨리, 모파상과 같은 고전 문학을 나에게도 읽혔고, 별다른 할 거리는 없고 책은 좋아했던 나는 그 이야기들을 금세 해치울 수 있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다시 나누니, 당시에 내가 느꼈던 재미와 감동들이 20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했다.

물론 이런 건 단순히 과거의 추억을 우연히 마주했을 때 느끼는 일반적인 감상일 수 있다. 그게 영화일 수도 있고, 만화일 수도 있고, 옛날 유행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난 김에 오 헨리와 모파상의 몇몇 작품은 다시 읽어보자는 생각에 그들의 문장을 다시 마주했을 때 느낀 감각은 분명 ‘소설만의’ 무언가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오 헨리가 [물레방아가 있는 교회]에서 찬찬히 묘사한 미국 시골 마을의 한적한 풍경, 모파상의 [쥘르 삼촌]에서 전해지는 부모님의 당황한 모습을 그들이 쓴 문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느끼겠는가.

미국인의 삶을 다룬 ‘단편’의 거장 오 헨리(O. Henry, 본명: William Sydney Porter, 1862–1910, 사진: W. M. Vanderweyde, 1909, 왼쪽)와 프랑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 사진: Nadar)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매체의 형식은 곧 메시지 그 자체다. 종이 만화를 볼 때 우리는 페이지에 나와 있는 컷의 순서에 따라 시선을 옮기며 이야기를 좇는다. [드래곤볼]은 그 시선을 통해 최고의 몰입감을 선사한 작품이다. 영화는 미장센, 몽타주 등으로 대표되는 촬영 기법을 사용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한다. 장면의 흐름, 배우의 연기와 대사, 흘러나오는 소리 등이 종합되어 다가오는 감각은 만화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음악은 리듬과 멜로디로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이 역시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할 때와 뮤직비디오와 음악을 함께 들을 때의 감각이 다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다른 매체와는 다른 소설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재미와 감동을 준다. 소설만의 방식은 설령 다른 매체가 똑같은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서 대체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전부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이었겠지만, 다시 깨닫기까지는 다소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지난 3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소년 만화”(제이슨 톰슨, 2011)이자 소년 만화의 ‘바이블’로 평가받는 [드래곤볼] (토리야마 아키라, 총 42권, 연재 기간: 1984-1995)

작가의 세계를 가장 투명하게 비추는 창  

그 뒤 내가 한때 읽었던 소설들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고골 소설들이 참 재밌었지, 테드 창을 잊을 수가 없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던 소설들이 확실히 대단한 작품들이었구나 등등. 소설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을 생각해본 뒤에는 소설을 읽긴 읽어야겠다는 나름의 의무감이 생겼다. 특히 한때 내가 거들떠보지 않았던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의 미학적 측면 외에도 내가 생각하는 소설만의 가치는 소설이 픽션 중에서는 작가가 생각하는 세계를 가장 투명하게 볼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라는 데 있다.

글은 영상과 이미지로 전달되는 다른 매체보다 훨씬 더 밀도 있게 저자의 생각을 전한다. 모든 작품은 저자가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을 독자와 공유하는 공간이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시각과 나의 시각 사이의 대화 과정이다. 르포나 비문학, 에세이는 어쨌든 ‘실제 세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기 때문에 픽션과는 달리 작가가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하게 담길 수는 없는 장르다.

한편 픽션이라는 점에서는 만화나 영화, 뮤직비디오도 다르지 않으나, 앞서 말했듯 소설은 작가의 의도를 밀도 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구별된다. 당연하게도 르포, 에세이, 만화, 영화, 뮤직비디오가 다른 의미에서 제각각의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요컨대 과거 내가 소설이 ‘별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이유인 ‘허구성’과 ‘높은 밀도’는 오히려 소설만이 갖는 매력이었던 것이다. 작가가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투명하게, 그것도 가장 높은 밀도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일인 것이다.

니콜라이 고골(1809-1852, 왼쪽)과 테드 창( 1967~현재, 사진: Arturo Villarrubia, 2011)

소설에 관한 생각 정리 

소설에 관한 내 감상을 줄줄 늘어놓은 이유는 한승혜의 [저도 소설은 어렵습니다만]을 보면서 소설에 대한 내 생각이 구체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동시에 소설에 관해 정리한 내 생각이 [저도 소설은 어렵습니다만]을 관통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소설의 위상이 갈수록 축소하는 시대에도 소설을 읽는 즐거움, 소설만이 주는 가치를 사람들이 알아주면 하는 뜻으로 이 책을 썼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가 만난 31편의 소설을 소개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은 ‘이 소설이 정말 좋으니 이걸 읽어보세요’ 하는 소설 추천 모음집은 아니다. 오히려 소설을 매개로 저자가 세계, 인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아낸 꽤 일관된 에세이다. 31편이나 되는 소설이 나오지만, 이 소설들은 부제에서 나타나듯 저자가 “살면서 만난 순간”과 공명한 것을 기준으로 선정되었다.

31편의 소설을 통해 저자는 자신이 소개한 소설의 저자들이 바라보는 세계가 어떠한지, 그들이 말하고 싶은 바는 무엇이었는지 추측한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일상적인 순간에서 마주한 순간순간의 느낌을 소설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대사와 장면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소설을 보면서 저자의 과거 기억을 떠올릴 때도 있고, 저자가 어떤 경험을 할 때 과거에 읽었던 소설을 떠올리기도 한다. 골자는 같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놓고 저자는 작품, 작가와 계속해서 대화한다.

저도 소설은 어렵습니다만 | 한승혜 저 | 바틀비 | 2022년 05월 03일

앞서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매력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이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투명하고 밀도 있게 전달하는 매체기에, 저자는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그 작가들과 세계, 인간, 삶에 관한 투명하고 밀도 있는 대화를 하는 셈이다. 그리고 [저도 소설은 어렵습니다만]의 독자는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맛보기로만 보는 31편의 작가들의 시선뿐 아니라 저자 한승혜의 시선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언급된 소설 작가들의 시선이 무엇인지 해석하는 일은 독자가 직접 그 소설을 읽으며 자신만의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일이기에 근본적으로 이 책에서 독자가 온전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저자 한승혜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뿐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에 이 책은 저자 본인이 밝히듯 ‘소설 추천집’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의 시선들이 따로 있고, 같은 작가를 놓고도 그들의 시선을 각자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당신이 누구고 어떤 소설을 좋아하든 간에, 소설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통해 당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풍요롭게 하기를’ 권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 욕망, 성장, 인간, 사랑  

그렇다면 저자 한승혜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일까. 나라는 한 독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역시 ‘그럼에도 우리는 세계를 사랑해야 한다’인 듯하다. 어쩌면 너무 거친 요약일 수 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33″]1부[/dropcap]‘일상의 얼굴’은 책의 부제 “살면서 만난 소설적 순간들”과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장이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자신이 일상에서 마주했던 순간들을 더 넓은 시선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파친코]를 읽고 과거 자신이 보았던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을 떠올린다. [모스크바의 신사]에서는 주인공의 ‘답답함’이라는 정서를 통해 팬데믹의 경험을 되짚어본다. 개인적으로 이 장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에세이는 [모래의 여자]에 대한 에세이였다. 전업 주부로서 느껴지는 일상의 반복성을 매일매일 집에서 모래를 퍼야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성찰하고 그것을 현대인 일반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1부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자신을 객관화하며 타인을 이해하는 훌륭한 도구로서 소설의 가치를 가장 일상적 차원에서 보여준 것 같았다.

파친코(이민진, 이미정 역, 문학사상, 2018) ㅣ 모래의 여자(아베 고보, 김난주 역, 민음사, 2001) ㅣ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서창렬 역, 현대문학, 2018)

[dropcap font=”arial” fontsize=”33″]2부[/dropcap] ‘욕망의 그늘’부터는 각 장마다 주제가 좁혀진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무언가 대상을 향하는 인간의 욕망은 삶의 가장 근원적 문제 중 하나다. 욕망은 행동을 이끌어내는 동기의 원천이 되어주고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낳는다. 2부는 욕망의 ‘그늘’이라는 제목에서 나타나듯 주로 욕망의 어두운 면을 관찰한다. 물론 여기서 다루는 욕망이 무슨 거창하고 대단한 욕망, 혹은 야망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정말 일상적 차원에서 느끼는 욕망, 그리고 사소하면서도 매혹적이기에 때로는 우리를 일그러뜨리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종이달]에서는 시작엔 작았지만 점차 빠져들며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자극과 중독성에 관한 이야기를, [연인]에서는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결핍감을 느끼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욕망하며 상호 파괴적인 관계를 만드는지 얘기한다. 소설만큼 극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지는 않을지라도, 저자는 자신의 일상 속에서도 타인이 드러내는 욕망을 기억하고, 관찰하며, 또 많은 경우 스스로 마찬가지 욕망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아마 어쩌면 우리 자신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그늘도 조금만 각색하면 저자가 언급한 소설에 못지 않은 극적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과 욕망이 만드는 그늘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 매혹적인 소재지만, 우리 자신도 그 이야기의 예외는 아닌 점을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욕망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요구하는 거울이다.

종이달(가쿠타 미츠요 저/권남희 역, 위즈덤하우스, 2014) ㅣ 연인(마르그리트 뒤라스 저/김인환 역, 민음사, 2007)

[dropcap font=”arial” fontsize=”33″]3부[/dropcap] ‘성장의 고통’은 자아를 다루는 이야기다. 하지만 자아는 단일하지 않다. 우리는 과거의 우리와는 다른 존재다. 대체로 현재에 만족하는 저자는 3부에서 과거에 미숙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과거의 자신은 현재의 자신에 비해 미숙했기 때문에 여러 실수를 한다. 여러 고통을 겪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자신은 완전히 불완전한 존재고 현재의 자신은 성숙하고 완성된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지금 와서 우스워보이기도 하는 그 시점의 고민과 고통은 너무나 심각한 것이었고 또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현재의 자신’이 만들어졌음을 생각한다면 과거의 자신이 겪은 고통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일은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는 데도 좋지 못한 태도다.

3부의 작품들은 소설을 통해 떠올리게 된 과거 자신의 ‘성장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저자는 과거 시점에서 그 고통이 가졌던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고통을 통해 더 성숙해진 현재의 자신이 어떻게 과거의 상황을 바라보는지도 보여준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서는 단단하지 못해서 어떻게 보면 위험했던 과거의 자아를 들여다본다. [시간의 궤적]에서는 자신도 느꼈던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인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불현듯 다가온 과거를 떠올리며, 과거와 거리를 두면서도 또 과거를 품는 이야기를 담았다. [내가 되는 꿈]에서는 과거의 자신보다 성숙한 현재의 자신도 사실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고뇌하는 또 다른 인간임을 고백하고,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는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하영, 문학동네, 2021)ㅣ 시간의 궤적 (갈정웅, 2009, 한맥문학) ㅣ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앤드루 포터, 김이선 역, 문학동네, 2019)ㅣ 내가 되는 꿈(최진영, 현대문학, 2021) ㅣ

3부는 시간을 통해 변하는 자아의 모습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속에서 나타나는 어떠한 불변성, 혹은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 우리는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현재는 분명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과거의 고통과 기쁨이 모두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저자는 그 변화와 연속을 모두 인지하는 것이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불완전한 자신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임을 말하는 듯하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33″]4부[/dropcap] ‘인간의 비밀’은 역시 모든 인간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 타인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타인은 아무리 나와 가까워보이더라도, 아무리 그에 대해 다 알아낸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근원적 차원에서 미지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4부의 첫 작품인 [너라는 생활]은 타인을 알면 알수록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모습과 다른 의외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으며, 원래 가졌던 이미지는 뒤죽박죽 헝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데 따라오는 숱한 어려움과 모순을 드러내 주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작품 선택이었던 것 같다. [아일린]에서는 우리가 겉으로 ‘약자를 위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런 모든 말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추한 모습’을 보았을 때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다룬다. [숨그네]에서는 러시아의 독일 포로 수용소라는 공간을 다루는 소설을 통해 인간이 상황에 따라서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직시해야함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타인을 이해하는 일 자체가 비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다음에 소개되는 작품인 [인생의 베일]도 타인과의 교감이 숱한 후회와 실수를 만들어내고, 인간을 그렇다고 딱히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그 후회와 실수 속에서도 인간은 변화하고 그 변화에는 어쩌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들에서 저자는 우리의 삶을 다채롭고 아름답고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특질이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는 부정적인 면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임을 읽어낸다.

너라는 생활(김혜진, 문학동네, 2020)ㅣ 아일린(오테사 모시페그 , 민은영 역, 문학동네2019)ㅣ 숨그네(헤르타 뮐러, 박경희 역, 문학동네, 2010)ㅣ 인생의 베일(서머싯 몸, ,황소연 역, 민음사, 2007)

4부에서 이야기되는 타인은 사실 ‘인간의 비밀’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면을 갖는 미지의 존재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다. 나 자신도 언제든지 누구보다 악해질 수 있다. 하지만 타인과 나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의 복잡한 면모가 수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이 세계는 정말이지 넘치게 매력적인 공간이 된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33″]마지막 5부[/dropcap] ‘사랑의 논리’는 사랑이 주는 아름다움과 고통을 다룬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사랑은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강한 힘이자 기쁨의 원천 중 하나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소개하며 저자는 우선 사랑이 가진 강력한 힘이 인간을 얼마나 크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줌을 자신이 느끼는 자녀와의 사랑과 함께 보여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주인공이지만, 자신이 사랑한 그 아이와 느낀 그 순간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다. 이는 더는 살아가는 게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재난의 순간에서도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삶의 의지를 찾는 [로드]의 이야기와도 이어지는 듯하다.

[나이트 워치]에서는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사랑이 그 시작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는 데서 오는 서글픔을 말한다. 물론 그런 서글픔이 없다면 찰나에 불과한 사랑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도 없을 것이다. 삼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연년세세]를 소개하며 저자는 사실 찰나와 같은 사랑의 기쁨이 삶의 지루함과 아픔 속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 아니었을지, 그 찰나의 순간을 잠깐이나마 누군가에게서 엿본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자신과 할머니의 일화를 통해 보여준다. [노르망디의 연]에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랑의 기쁨과 고통, 나아가 세계와 인간 자체의 분리 불가능한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을 이야기한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장강명, 문학동네, 2015) ㅣ 로드 (코맥 매카시, 정영목 역, 문학동네, 2008) ㅣ 나이트 워치 (세르게이 루키야넨코, 이수연 역, 황금가지, 2005) ㅣ 연년세세 (황정은, 창비, 2020)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내가 작가의 시선을 가장 명확하게 느낀 에세이는 [노르망디의 연]을 다룬 글, [모든 것을 알면서도]였다. 내가 이 책에서 나타난 저자의 시선을 ‘그럼에도 우리는 세계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거칠게 정의한 것도 이 에세이를 보고 나서였다. 책 내내 저자가 묘사하는 일상의 풍경, 과거의 기억, 혹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과히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모든 것이 즐거운 ‘에덴 동산’보다는 부처가 이야기한 ‘고통의 바다’에 훨씬 가깝다.

노르망디의 연 (로맹 가리, 백선희 역, 마음산책, 2020)

일상은 누군가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차기도 하고, 자신을 향하는 악의를 마주해야 하기도 하고, 뜻밖의 재난에 휩싸이기도 한다. 심지어 아무 일도 없으면 그 평온함은 금세 무료함으로 바뀌기까지 한다. 행동의 동기인 욕망은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무하기보다는 어리석은 방향, 악한 방향으로 이끄는 일이 더 많아 보인다. 인격적 성장을 이루면서 살아왔지만, 왜 그 과정에서는 그리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일까.

그리 고통을 겪으며 성숙했다지만, 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속 고통을 통과하며 끝없는 성숙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타인은 어째서 이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가. 우리는 정말 타인과 통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약한 사람은 때로 추하고 악하기까지 한 것인가. 어떤 때는 왜 악한 사람이 그리도 매력적인가. 사랑은 어째서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약속하지 않을까. 왜 사랑은 그 달콤함만큼이나 이루어지지 못할 때의 고통과 언젠가는 식어버릴 유통기한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인가.

“만약 통조림에 기억을 담을 수 있다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만약 사랑에 유통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영화 ‘중경삼림’, 왕가위, 1995. 중에서)

어쩌면 저자는 과거의 어느 순간 세상에 가득한 어리석음, 욕망, 고통, 악의를 보며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안락한 삶을 누리며 학교의 교육 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현대인은 언젠가는 그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학교 교과서가 약속하는 도덕적인 세상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실 문턱만 넘어도 산산조각 난다. 어떤 학교에서는 교실의 지배자가 군림하며 약자는 그 밑에 깔려 신음한다. 다른 학교에서는 성적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끝없는 경쟁이 사람들을 옥죈다. 눈앞에서 뻔히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 혹은 고통이지만 학교와 사회는 그런 고통이 없는 양 태연하게 도덕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그래도 학교가 제시하는 공리를 받아들이며, 세상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 채 살아가고자 노력하지만 분명 어느 순간에는 그 믿음은 깨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더 많은 고통과 더 많은 부조리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관찰하고 묘사한 세계에는 저자가 살면서 바라본, 세계, 인간, 삶의 부조리가 드러나고 사람들이, 무엇보다 자신이 겪었으며 지금도 겪고 있는 고통들이 드러난다. 사회가 제시한 세계의 빛나는 모습이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세계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이 명확해지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이때 우리는 흔히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첫째는 명확히 보이는 세계의 고통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일상의 문제, 특히 즐거움에 집중하는 길이다. 복잡한 생각은 필요 없다. 당신이 느끼는 행복이 곧 당신 인생의 의미다. 다른 길은 학교와 사회가 이야기해준 세계의 모습, 도덕의 가치 같은 것이 모조리 기만이니, 그런 기만에 대해서 냉소로 응답하는 길이다. 어차피 세상은 썩은 곳이고, 세상의 유지를 위해 만든 가짜 도덕에 휘둘리는 것이 사실 바보다. 세상을 마음껏 경멸하고 그곳에서 내 이익을 구하는 게 차라리 현명한 길인 것이다.

저자는 그 두 가지 길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다. 일단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부조리함, 삶의 고통, 그 모든 것으로 가득 찬 세계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 세계를 직시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도대체 이렇게 엉망인 세계에서 어떻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고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세계의 부조리와 고통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비롯한 여러 선(善)이다.

분명히 학교 교과서에서 가르쳐준 것만큼 선이 세계의 원리는 아니다. 심지어 선을 추구하는 사람조차도 수없이 많은 어리석음과 욕망과 악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쨌든 선은 실재한다. 선을 원리로 삼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선을 넓히려고 노력하고, 역시 불완전하나마 결실을 맺을 때도 있다. 일상에서 그러한 선을 느낄 때, 나를 둘러싼 이들과의 사랑을 느낄 때, 지나간 기억과 고통이 나를 더 깊은 존재로 만들었음을 느낄 때. 이런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정말이지 세계의 기본 원리로 보이는 거대한 고통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찰나의 선, 혹은 아름다움은 고통의 거대함이 있기에 빛이 나며, 그래서 더더욱 소중하다. 그 소중한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 나머지 모든 고통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그렇다.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조차도 수없이 많은 어리석음과 욕망과 악함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어쨌든 선은 실재한다.

[노르망디의 연]을 다룬 에세이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저자의 시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노르망디의 연]의 작가인 로맹 가리가 묘사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의 시선이 어쩌면 세계를 바라보는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겪은 사랑의 환희와 그 좌절을, 전쟁의 잔인함과 그 속에서 간혹 보이는 인간의 선함을, 그 모든 순간을 사진처럼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 에세이의 제목이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알기에 주인공은 인간과 세상을 사랑했고,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맹 가리가 자신의 소설을 드러낸 시선은 [저도 소설은 어렵습니다만]의 한승혜 작가가 드러낸 시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맛보게 되는 환희와 고통, 선과 악, 미와 추를 모두 알면서, 아니 모두 알기에 우리는 세계와 인간과 삶을 사랑한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역설이 바로 세계가 갖는 묘미일지도 모른다.

체리 향기처럼 다가오는 삶의 순간들 

책을 읽으며 저자의 시선이 그런 점에서 이란의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 [체리 향기]와 통한다고도 생각했다. [체리 향기]의 주인공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하고 죽기만을 바란다. 그는 차를 몰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자살하는 것을 도와주면 큰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인부들은 그의 터무니 없는 요구를 거절한다. 중간에 차를 태워준 군인도 거절한다. 이슬람 신학생은 종교를 들어 그를 설득해보려 하지만 설득되지 않는다.

체리 향기(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998)

그러다 마지막에 만난 자연사 박물관의 박제사가 드디어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돈 때문은 아니고, 자신도 그와 비슷한 고뇌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생각을 바꿔보라고 권유하며, 자신의 설득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때는 정말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누구도 돌리지 못했던 그의 마음을 돌리는 그 유명한 문장은 이것이다.

“생각해봐요. 새벽에 막 떠오르는 해를 보는 기쁨, 맑은 샘물에 얼굴을 씻는 상큼함, 보름달이 뜬 밤하늘의 아름다움, 그리고 혀끝에 감도는 달콤한 체리향기…”

어쩌면 저자가 31편의 소설을 통해 얻은 것은, 세상에 넘실대는 고통과 악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치 ‘체리향기’처럼 다가오는 사랑과 기쁨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순간은 자신의 일상 속에, 과거와 현재 속에,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늘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을 깨닫고 그 순간의 의미를 곱씹으며 체리향기를 더 달콤하게 느끼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소설 읽기가 필요하다. [저도 소설은 어렵습니다만]은 저자가 터득한 그 비밀을 풀어주는 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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