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국세청 별관이 철거됩니다. 일제 시대 건물로 민족정기를 끊는다는 이유죠. 과연 일제 시대 건물은 모두 철거가 답일지 생각해봅니다. 다양한 의견(기고)을 환영합니다. (편집자)[/box]

종로구민이 된 지 2년이 넘었다. 종로구에 있는 직장에 다닌 지는 12년이 넘었다. 온갖 조선시대 유적과 사적들을 끼고 있는 동네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와 역사에 대한 얘기들에 관심이 많아진다. 우리 집에서 30분 거리에 조선시대 왕궁 2개와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 1개, 박물관 4개와 셀 수 없이 많은 근현대 유적들이 있다.

그런데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많아질수록 이해 가지 않는 일들도 많아진다. 무엇보다 문화재청과 서울시의 관리 기준이 모호하고 이상하다. 기준이란 게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또 언론의 평가도 오락가락하다. 뭔가 다른 꿍꿍이 혹은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거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일단 국세청 별관에 관해 얘기해보련다. 질문은 이렇다.

국세청 별관은 왜 철거할까?

서울 국세청 남대문 별관 (원본 이미지에 합성, 원본 이미지: 네이버 지도)
국세청남대문별관 (원본 이미지에 합성, 원본 이미지: 네이버 지도)

국세청 별관은 덕수궁 옆에 있는 건물로 1937년에 지어졌다. 우리 사무실 창문에서 잘 보인다. (이하 별도 출처 표시 없는 사진은 필자가 찍은 것. – 편집자)

2015년 5월 19일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
서울 국세청남대문별관의 모습

서울신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국세청 별관은 1937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체신청(우체국) 청사로 지은 건물이다. 본래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였던 귀비 엄 씨의 사당 덕안궁 터가 있던 자리다. 시는 국세청 별관 중 기둥이나 벽면 일부는 기념물로 남긴 채 이 터의 역사적 가치를 살린 역사문화광장을 조성하기로 했다.”

서울신문, 일제 잔재 ‘국세청 별관’ 철거…서울시 역사문화광장 만든다 (2015년 5월 12일 자 12면)

이 건물을 허물면 그 뒤에 있는 대한성공회 성당이 훤하게 드러난다. 성공회 교회는 유럽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어진 아주 예쁜 건물이다. 그게 큰길에서 잘 보이면 뭐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사라지게 된 국세청 별관 건물 자체에는 별다른 가치가 없을까. 고종 후궁의 사당이 있던 자리라고 해서, 성공회 성당을 가리고 있다고 해서 확 허물어버려도 되는 그런 건물일까.

훼손되기 전 국세청 별관의 모습ⓒ한국디자인진흥원DB (재인용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08613
훼손으로 변형되기 전(前) 국세청남대문별관 모습 ⓒ한국디자인진흥원DB (재인용 출처: 오마이뉴스)

위 사진은 오마이뉴스에 나온 예전 모습이다. 1930년대 당시 최신 글로벌 유행이던 독일풍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내외부가 많이 변형됐다.) 서울시 공무원들과 기자들 주장대로 일본이 “덕수궁의 정기를 끊기 위해” 우체국 건물을 지었는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증거는 없다. 그냥 그렇다고 우길 뿐이다.

2015년 5월 19일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
왼쪽이 덕수궁, 오른쪽이 국세청별관.

덕수궁 모퉁이와 국세청 별관. 내 눈에는 저 건물이 덕수궁의 ‘정기를 끊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그냥 무난하게 잘 어울린다.

진짜 튀는 건물은 따로 있다

진짜 튀는 건물. (2015년 5월 19일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
진짜 튀는 건물

덕수궁 반대편, 정문인 대한문에 바로 맞닿은 건물인 ‘OOO중국어’ 빌딩이다. 위 사진이다. 이 고층 건물이야말로 덕수궁을 위협하는 형상 아닌가. 국세청 별관은 허물면서 이건 왜 그냥 둘까. 밤에 보면 노란색 OOO중국어 간판이 대한문을 압도한다. ‘대한문’이라는 현판 글씨보다 ‘OOO중국어’라는 글씨가 훨씬 크고 밝다. 일제가 지은 국세청 별관은 없애야 하고, 고궁 대문 바로 옆에 중국어 학원 네온사인 간판은 놔둔다.

이게 끝이 아니다. OOO중국어 뒤쪽으로 보이는 바둑판무늬 건물은 서울시청 별관이다. 이것도 덕수궁을 아주 높이서 내려다보는데, 그럼 그것도 덕수궁을 깔보는 걸까. 또 경복궁 옆에는 지상 19층짜리 정부청사 건물이 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 때 지었다. 그것도 민족정기 모독일까.

한국은 유독 일제시대 건축물을 홀대한다.

설계와 기획은 일본인이 했다 하더라도 벽돌 하나하나 쌓아 건물을 만든 건 조선인 노동자들인데도 ‘일제 잔재’로 몰아세운다. 물론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이유로 꼭 철거가 필요하다면 철거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일제 잔재기 때문이라고 핑계 대진 말았으면 좋겠다. 건물 철거하면서 무슨 대단한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사 유적은 역사 유적으로 

한편 제국주의 일본이 만든 건물은 그렇게 싫어하면서, 세습 왕족이 살던 건물은 민족의 성지로 여기는 경향도 비이성적이다. 조선이란 나라가 왕들의 삽질 끝에 망한 지가 100년이 넘었다. 일제 통치와 한국 전쟁 그리고 기나긴 군인의 독재 통치와 민주화 운동을 거쳐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국민이 모두 평등한 민주공화국이다. 신분제 세습 왕조국가가 아니다(그건 북한이다).

왜 21세기 공화국에 사는 우리가 조선의 세습 왕족이 살던 궁궐을 민족정기 어쩌고 하면서 신성시해야 할까. 일본이나 북한이나 세습 왕족을 섬기지, 한국은 그런 미개한 풍습은 없어야 하는 민주공화국이다. (엇! 근데 현직 대통령이…)

역사 유적은 역사 유적으로 다루면 된다. 민족정기 살린답시고 불타버린 남대문을 어설프게 다시 짓고, 민족정기 살린답시고 멀쩡한 광화문을 허물어서는 약간 비틀어서 다시 짓고, 한글 현판을 내려다가 중국글자 현판으로 바꿔 걸고… 이게 대체 뭐하는 일들인가.

창경궁에 대해서도 할 말 있다  

일제가 창경궁에 동물원(창경원)을 만들어 조선국민을 모독했다는 얘기도 생각해보면 우습다. 거긴 조선시대엔 왕족만 쓰던 공간이었다. 평양의 김일성 주석궁과 마찬가지다. 그걸 전 국민에게 개방하고, 그 안에 조선 최초의 동물원과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아름다운 식물원을 만들었다면 그게 정말 나쁜 일일까.

동물원 때문에 세습 왕족들의 명예에 먹칠이 됐다고 치자. 그래서 뭐?

나라를 빼앗긴 한심한 왕족의 명예 지켜주고 싶은 생각, 나는 전혀 없다. 세습 왕족의 명예에 침을 뱉고자 세워진 동물원, 식물원이라면 백만 번도 가서 구경하고 싶고, 왕족의 정기를 끊고자 만들어진 우체국 건물이라면 백만 번이고 방문해서 편지를 부치고 싶다.

하다못해 순종 황제 본인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는 것을 원했다. 황제가 창경원을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자고 했더니 그놈의 양반층 대신들, 즉 공무원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공개를 강행했다. 개장식에는 구름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1910년 한일병합 직전인 1909년 일반에 개방된 창경원 동물원은 조선 민중에게 양가적 감정을 주었다."(한겨레, 남종영 기자)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재인용 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ERIES/394/683285.html
“1910년 한일병합 직전인 1909년 일반에 개방된 창경원 동물원은 조선 민중에게 양가적 감정을 주었다.”(한겨레, 남종영 기자)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재인용 출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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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한겨레 기사는 창경원이 식민주의의 유산임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당시 조선국민이 직접 체험한 창경원이라는 근대적 산물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당시 보도 자료 인용을 통해 언급한다.  (편집자)

“순종실록 부록에 의하면

(…중략…)

창경원으로 개칭한 것은 일제가 아니라 순종의 뜻이었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순종이 창경원이라는 명칭을 고집한 것은, ‘궁’이라고 하면 백성들이 드나들기 불편할 것이므로 ‘원’으로 바꾸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어쩌면 그것은 나라를 잃은 국왕이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었던 마지막 성은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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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전국 동물원 식물원이 흔한 구경거리니 굳이 고궁에까지 동물원 식물원을 만들 필요가 없지만, 옛날엔 나라 전체에 그런 시설이 없었다. 1984년 5월 서울대공원이 개장할 때까지 창경원은 서울 시민의 여가 공간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과연 민족의 수치라고만 할 수 있을까?

2015년 5월 19일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
철거 작업이 시작된 국세청 별관 뒷편 모습

위 사진은 이미 철거작업이 시작된 국세청 별관 뒤편이다. 박원순 시장의 결정이 결국 민족주의에 편승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건물을 허물고 잔디광장을 만들어 오는 8월 광복절에 거기서 시장이 기념행사를 한단다.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시민들의 투표로 당선된 지도자가 “왕궁의 민족정기를 살리고” 어쩌고저쩌고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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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별관의 역사와 옛 사진들 (@gosooboogee)

창경궁이 시민 유원지이던 시절의 사진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던 시절의 영상 몇 점 (타논): 링크 글에서 인용한 사진들은 2014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한 2014 서울사진축제 “여가의 탄생”(아래 포스터)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여가의 탄생 창경궁 창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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