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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이 글이 다루는 소재와 주제에 관한 자유롭고 다양한 반론과 보론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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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셀 퍼거슨 제 지도 교수인 미셸 퍼거슨(Michaele Ferguson, 사진)의 전공은 ‘페미니즘’입니다. 그래서 한번 한국의 메갈리아와 관련된 웹 커뮤니티들을 페미니즘 운동으로 볼 수 있을지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퍼거슨 교수에게 메갈리아랑 워마드 이야기를 들려줬더니[footnote]미화하지 않고 최근에 가장 문제가 된 독립운동가 패러디 사건도 이야기해주었습니다.[/footnote], 놀라기는커녕 자기 귀에는 아주 익숙한 이야기로 들린다고 대답하더군요.

제 지도 교수는 여성 혐오적 문화를 도발적이고 위악적인 방식으로 패러디하는 건 미국에서 급진적 페미니즘 갈래에 속하던 활동가·작가들이 활발하게 수행했던 작업이라고 답했습니다. 제 지도 교수는 ‘웹 커뮤니티’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을 빼고는, 메갈리아는 특이하다기보다 오히려 전형적인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의 사례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2.

여성 관련 정책을 입법하거나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가시적으로 확장하는 데 초점을 맞췄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랑 다르게, 60년대에 등장해 미국의 70~80년대를 풍미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단기적인 정책이나 제도의 변화보다, 더 근본적이고 뿌리 깊은 가부장제적 사회구조와 역사-문화 전체를 문제 삼고자 했습니다.

‘래디컬'(radical)이 우리말로 ‘급진적’이라고 흔히 번역되지만 ‘근본적’이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시면 이해하기 쉬우실 것 같습니다. 급진적 페미니즘 안에도 다양한 분파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는 남성들을 아예 배제하고 여성들끼리의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악명높은 레즈비어니스트들도 있었습니다.

메갈리아와 워마드는 페미니즘 운동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국에 많이 있듯, 미국에서도 이러한 급진 페미니스트들을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긴 논쟁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처럼 진보적 성향의 남성들이 이 논쟁을 주도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페미니즘 활동가들 사이의 논쟁이었죠. 이 논쟁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과 급진적 페미니스트 사이의 대립으로도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60년대 전미 여성협회(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를 창설했던 베티 프리댄(Betty Friedan)이라는 자유주의 여성운동가는 미국 여성들의 정치적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급진 페미니스트 중 일부, 특히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을 여성협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프리댄의 판단으로는, 페미니스트 정치의 성공을 위해선 기득권을 쥐고 있는 다수 남성을 적극적으로 설득해나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설득 작업을 위해서는 ‘남성을 싫어하는 레즈비언들’이라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불식시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프리댄은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꾸리고자 했던 레즈비어니스트들에게 특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Political lesbianism)은 페미니즘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그릇된 오해를 확산시킨다면서 말이죠.

배티 프리댄(Betty Friedan, 1960)
베티 프리댄(Betty Friedan, 1960)

4.

프리댄의 결정이 당대에는 그녀가 원하던 정치적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프리댄의 생각과는 다르게 오늘날에는 누구도 급진적 페미니스트들[footnote]그리고 그 한 분파였던 정치적 레즈비어니즘까지 포함해서[/footnote]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한때는 ‘너무 급진적이어서 여론의 역풍을 받는 거 아니냐’,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지금까지 어렵게 이뤄놓은 설득의 결과들을 다 날려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를 받았지만, 지금은 나름으로 역할과 의의를 인정받고 있는 거지요.

요즘 나오는 페미니즘 입문서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제는 급진적 페미니즘을 소개하지 않고 넘어가는 교재는 없습니다. 특히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보지 못했던, 좀 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여성 지배의 양상을 비판한 것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만의 고유한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급진 페미니스트들을 백안시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5.

이렇게 미국의 페미니즘 논쟁이라는 우회로를 돌아와서 다시 질문을 던져봅니다. 메갈리아는 페미니즘 운동인가요, 아닌가요? 그리고 워마드는 페미니즘 운동인가요, 아닌가요? 메갈리아와 워마드의 성격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만, 총론에서 제 대답은 둘 다 페미니즘 운동이 맞다는 겁니다.

저는 오히려 ‘진정한 페미니즘’을 판별하는 문제를 지금 당장 풀어야 할 시급한 문제처럼 제기하는 사람을 의심스럽게 봅니다. 그게 왜, 누구에게, 어떻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걸까요? 그 과격하다고 하는 워마드라고 한들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만큼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아이디어를 내놓은 적은 있었던가요? 그들이 혐오스러운 남자들을 무찌르고 정말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실질적인 노력을 하고 있나요?

표현 방식은 과격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표현하고 있는 건 제가 볼 때 ‘여자도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아주 간단한 메시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가끔 수위조절에 실패한 글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대개 과격한 표현은 남성우월주의적 여성혐오적 문화를 향한 공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가 다시 묻습니다. 이게 페미니즘이 아니면 무엇이 페미니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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